7. 9. ~7. 21. 굽네 플레이타운
상상과 차용의 변주 : 달의 기억을 빚다 .

상상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고, 금기시되던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상상력은 박은성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동력이다. 대학원 시절 일상적인 사물을 통해 ‘성性’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 하고자 했던 박은성은,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사회나 문화에 대한 인식을 다 양한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했다. 이번 전시는 박은성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15년 만에 갖는 첫 개인전이다. 달라진 환경과 입지에도 불구하고 오랜 공백을 깨고 다시 붓을 들고, 흙을 만지며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용기를 낸 작가에게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들의 숲3」72.7×72.7cm | Acrylics

「그들의 숲2」72.7×72.7cm | Acrylics
박은성의 첫 개인전 주제는 ‘달의 기억’ 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오랜 시간 사람들과 함께하며 수많은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고,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달’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통해 인간의 염원과 역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대학원 시절 보여주었던 작업에서 대상은 바뀌었 지만, 일상적이거나 보편적인 대상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고, 그 안에 깊은 상상력을 불어넣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방식은 박은성의 변함 없는 작업관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달의 천사」 72.7×72.7cm | Acrylics
차용은 기존의 작품을 매개로 하여 새로운 맥락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행위이며, 현대미술에서 예술가 자신의 정체성, 사회적 문제, 역사적 맥락 등을 표현하는 중요한 도구로 다루어진다. 이번 전시에서 박은성은 기존의 이미지나 작품을 빌려와 재해석하거나 변형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차용’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박은성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용의 모티브는 단연 달항아리이다. 조선 후기의 달항아리는 온화한 백색과 유려한 곡선, 넉넉하고 꾸밈없는 형태를 갖춘, 한국적인 미의 정수로 인식되는 오브제다. 작가는 달항아리를 통해 달처럼 은은하고 신비로운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달과 함께 해온 시간과 장소, 문화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달항아리는 작가의 내면과 함께 예술적 뿌리이자 정체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체이다. 또한 달항아리의 비정형적 형태에서 비롯되는 너그러움과 넉넉함은 그녀의 예술적 여정과 풍부한 상상력의 확장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달항아리라는 전통적인 형태 속에서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실재와 환상의 이미지를 혼재시키며 ‘재창조된 기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달항아리는 박은성의 서사와 예술적 철학, 그리고 작품의 시각적 메시지를 모두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차용 모티브인 것이다.
「천사의 숲」 26×21×22㎝ | Ceramic, Gold
달항아리의 내부에는 15년이라는 공백이 무색할 만큼 긴 시간 숙성된 상상력이 달을 통해 더욱 깊고 넓게 펼쳐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달항아리는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작가의 ‘재창조된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그녀 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세계관을 펼쳐 보이는 무대이다. 따라서 달항아리 안 에 차용된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한국의 산수화 같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함께 담겨 있는 것은 작가가 문화적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융합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 의미로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과 함께 차용된 민화의 배경과 도령복을 입은 아이 역시 작가 자신의 기억과 경험이 동서양의 문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의 숲(조형)」 32×29×33㎝ | Ceramic, Stone
박은성은 이렇게 ‘차용’이라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재창조된 기억’을 시각화 하고, 이를 통해 관람객들에게도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실재하는 이미지와 환상적인 요소들을 섞어, 우리가 인지하는 현실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유동적인지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는 것이다. 즉, 단순히 기존 이미지를 가져다 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시선과 경험, 그리고 기억을 통해 그것들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박은성은 작가 노트에서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실재와 환상의 혼재”된 이미지들을 “재창조한 기억의 소산물”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것은 ‘차용’의 목적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달과 양」 24×22×22cm | Ceramic, Gold, Stone
차용은 현대미술에서도 매우 강력한 표현 수단이다. 예술가들은 이를 통해 사회, 문화, 역사, 개인의 정체성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박은성이 차용한 고전적인 모티브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관념에 기반을 둔 작가 내면의 깊이를 보여주는 동시 에, 달항아리에 붙여진 가위, 바위, 보 처럼 신과 겨뤄보고자 하는 당돌함은 또 앞으로의 작업을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로 다가온다. 박은성만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통해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상상이나 과학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새로운 ‘기억’의 형태들이 차용되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기억’이나 ‘소원’을 담아내는 또 다른 기물들이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달꽃」 32×24×68cm | Ceramic, Figure
사진. 작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