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창작 Jeux et Création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다고 하는 그것은 바로 작가의 숙모님의 하이힐이었다. 당시 작가는 겨우 다섯 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였다. 이후로는 매번 사람들이 선물로 뭐가 좋겠냐고 물어오면 하이힐을 달라 했다고 한다. 하이힐은 작품 속에서 단순한 오브제라기보다는 모티브로서 기능하며 끊임없는 반복과 변형의 고리를 이룬다. 하이힐은 하늘의 무지개 같은 곡선으로 여성들의 다리를 받쳐준다. 그러나 이 도자조형 설치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어느 한 성性이 아닌 ‘인간’ 그 자체다.
흙 Terre
작품 속엔 남성의 구두도 매달려 있다. 담담히 빛나는 부분에서 미묘한 선을 따라 드러나는 검은 흙빛의 어두움. 가까이 다가가 비로소 이 구두들이 도자조형 작품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나면 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이 오브제의 위상, 이 모티브의 의미, 그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짝 Paires
이번 작품에서는 100개 이상의 구두가 새장 속에 매달려 있다. 한 쌍의 구두보다는 각각의 구두가 우리들 개개인을 표현하고 있다. 모티브로서 구두는 무한히 복제되어 허공에 매달린 새장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이 구두들은 ‘내’가 또 다른 ‘나’에게 부대끼며 존재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예술 Art
각각의 구두는 그러므로 여기에선 ‘몸’처럼 존재한다. 어떤 전리품이나 짐승의 유해처럼, 노출되고 전시된, 드러난 ‘몸’ 또는 오지 않을 자유를 기다리는 ‘몸’으로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새장 속의 새, ‘우리’는 두려움 속에 있을 때 더욱 꼼짝 못하게 된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 그것은 상징으로서 다룰 소재들을 잡아낼 줄 아는 예술가의 힘이다.
성스러운 Numineux
이 도자조형 설치작품은 그러므로 멜랑꼴리한 동시에 슬프다. 만약 이 구두들이 새장 속의 새라면 새장은 감옥, 무덤들의 감옥이다. 아티스트는 오브제를 상징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작가가 구두를 죄수들처럼 매단 것, 그러나 동시에 새처럼 새장에 가둔 것은 우리에게 삶의 모순을 보여주기 위함일 지도 모른다. 새들은 늘 우리처럼 어서 자유로워지길 희망하므로.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7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