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도예가 윤광조가 말하는 전업 작가의 생은 외롭고 지난한 길이다. 그는 일생을 작가로 살아가는 일이 알몸으로 가시덤불을 기어 나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배고픈 예술가의 세상에서 작가로 먹고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살이 뚫리고 피가 솟는 고통에서도 그것을 감내하고 나아가는 일은 얼마나 괴로운가. 그럼에도 작가로서의 운명은 마치 만신이 드는 듯 그를 비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시는 괴로웠던 작가의 길을 ‘유희遊戱’라 칭한다. 하고 싶은 일 맘껏 하다 세월을 먹었으니 삼매三昧에 이르렀다. 함께 작가의 길을 걸으며 만난 벗인 윤광조와 오수환 작가는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을 나이, 일흔에 접어들었다. 1970년대 후반, 장욱진 화백을 통해 동갑내기 두 작가가 인연을 맺은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림은 직업이 못 된다”고 말했던 장욱진 화백의 말에도, 자기표현의 즐거운 맛을 알았던 후배들은 근면하게 작업에 몰입했다. 물욕을 떠나 성실하게 자신의 작업을 이어갔던 장욱진 화백은, 생전 작품가가 꽤 나갔던 때에도 욕심부려 큰 그림 한 점 낸 적이 없었다. 술자리에서도 늘 화내는 법 없던 선배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두 후배들에게 큰 존경의 마음이자 작가의 길을 정진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남아있다. 그런 후배들이 이제는 선배의 나이를 훌쩍 넘겨 한국 화단사에 족적을 남길 큰 작가가 되었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예로부터 드물다 하여 이를 축하하는 잔치古稀宴를 열기도 한다. 지금이야 일흔을 넘기는 일이 예삿일이라 하여 축하받기 민망하다 하지만, 임금도 70이 넘은 신하에게 예우를 갖추고 기로연耆老宴을 베풀었다 했으니 분명 기념할 일이 맞다. 두 작가가 다른 길 걷지 않고 오직 예술로만 긴 세월 넘겼으니 대단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칠십의 도반道伴 중 도예가 윤광조는 그의 예술인생을 논하는 자리에서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흙에 대한 예찬을 풀어놨다. 형식은 내용에 충실했을 때 자연히 나온다고 생각하는 그는 전통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새로운 미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문화란 ‘시간’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자식이다. 긴 세월 쌓여온 문화는 늘 발생과 모방, 변형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이 흐름 속에 작가란 무릇 복속되고 위조된 문화를 경계하고 뿌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움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의 손에서 분청의 전통은 현대적인 형태를 입어 산이 되고, 바람이 되고, 혼돈이 된다.
“자유스러움, 자연스러움”
윤광조는 흙을 만질 때 무아지경의 ‘도취’상태로 접어든다고 한다. 자연과 세상에 가슴을 활짝 열고 귀를 기울이면서도 ‘중도’를 지켜야 집중할 수 있다. 그는 고된 작업 중에 자신을 몰아세우기도 하지만 늘 혹사시키지도, 그렇다고 스스로 잘났다 치켜세우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함, 정定으로 삼매三昧에 드는 수행자의 마음과 같다.
그는 작품이 순수한 고뇌와 노동의 땀으로 이루어질 때 독자적인 조형언어로써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아직도 경주 자옥산과 도덕산이 만나는 골짜기에서 홀로 흙을 만진다. 유독 사람 만나는 것에 서툴고 피로함을 느끼는 그가 산골 생활에 접어든 지도 94년부터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었다. 자연과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이유 있는 고립 덕분이었을까. 그의 작품에는 산과 자연, 그리고 작가 자신의 혼란스런 마음까지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한 사람이 작가에게 작품을 보며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물으니 소박해 보이나 진정한 깨우침이 담긴 대답이 이어진다. “자유스러움, 자연스러움” 모방하지 않는 새로움으로 작가의 자유분방한 정체성을 지키며, 그럼에도 낯설지 않고 자연스러운 조형미의 교차가 일흔이 넘은 작가에게 아직도 목마른 예술의 경지인 것이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9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