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ssom moon jar 3」
달 항아리는 부정형과 비정형으로 나타난 한국적 미의식을 함축한다. 여기서 좀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그렇다면 그 결과는 성공적인가 아니면 실패한 것인가. 작가 김효선의 달 항아리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은 바로 이 뜬금없는 질문과 더불어 시작된다. 뜬금없는? 진지한? 돌발적인? 모든 진지한 질문은 뜬금없이 온다. 돌발적이다. 상식을 건드리고 당연을 깨고 들어오는 것이다. 바슐라르라면 불연속적이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부정형과 비정형으로 나타난 달 항아리는 성공적인가 실패한 것인가. 적어도 미의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성공적이다. 부정형과 비정형이 인위적이지 않음과 자연스러움으로 나타난 에피스테메(당대의 지배적인 지식체계)에 부합하는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 유교사상(장식에 대한 거부)과 도교사상 (무위 곧 위에 대한 거부)이라는 시대감정에 한정되는 점은 있다. 시대감정이란 것이 변하기 마련인 것임을 인정한다면, 미의식 역시 가변적인 것임을 뒷받침하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부’와 ‘비’가 말해주듯 정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형이 뭔가. 특히 달 항아리와 관련해서 정형은? 작가가 보기에 정형은 완벽한 형태 곧 엄격한 좌우대칭에다가 처짐이 없는 형태다. 그런데 실제로는 불완전한 형태 즉 물레를 사용했음에도 좌우대칭이 아닌 형태며, 상하부를 따로 만들어 이어 붙인 흔적이 여실하고(차라리 흔적에 무심하고), 여기에 한쪽으로 처진 느낌마저 준다.
이런 불완전한 형태와 공공연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대의 미의식에는 부합한다? 여기서 작가는 미적 기준의 상대성과 성공과 실패의 임의성, 혹은 자의성의 문제를 건드린다. 미에 대한 기준은 상대적이다. 칸트는 미를 취미라고 부른다. 그리고 알다시피 취미란 개별적이다. 원체는 개별적이지만 공통감각을 매개로 미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정형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부 혹은 비정형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떤 시대가 어떤 형태를 정형 혹은 비정형이라고 정의하느냐는 것이다. 정형 비정형 자체도 그리고 정형 혹은 비정형에서 미의식을 느끼는 미적 감정도 시대 초월적이지가 않다. 그 배경에 정의 문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언제나 정의가 문제다. 그렇다면 다시, 정형이 뭔가. 정형이란 올바른 형태다. 올바른 형태? 누가 올바른 형태를 정의하는가. 정형을 미학적으로 보면 올바른 형태가 되고, 사회학적으로 풀면 올바른 태도가 된다. 그렇다면 다시, 누가 올바른 형태며 태도를 정의하는가. 이 문제는 미셀 푸코의 정상성과 비정상성 문제에 연동된다. 푸코에게 정상성과 비정상성 문제는 지식과 권력의 문제에 연동된다. 사회학적으로 정상성과 비정상성 문제는 미학적으로 정형 비정형의 문제에 연동된다. 정상성과 비정상성 문제가 이데올로기(혹은 헤게모니)이듯 미의식(그리고 개별적인 취미)마저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굳이 말을 하자면 당대의 예술계에 의해 공공연한 합의에 이른(제도화된) 결과물이고, 부르디외의 논법으로는 상징투쟁과 인정투쟁의 소산이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9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