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구는 그 자체가 ‘융합’ 이었다
이홍원 한국도자재단 큐레이터
남미은 작
장신구의 발전을 보면 인류문화의 역사가 보인다.
장신구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에 이미 시작이 되었고 인간의 "장식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한 장식설이 유력한 학설로 설득력을 갖는다. 이러한 장신구의 역사는 세대를 거듭하여 계승되어 온 장인 기술과 함께 여성들의 유행 변화와 보석이나 귀금속들을 예술적 스타일로 승화한 개인적인 장신구의 역사가 함께 융화되어온 문화적 산물이다. 로마 ‘Pigorini’ 박물관에 있는 조개를 엮어서 만든 목걸이 형태의 장신구(이것의 나이를 대충 BC. 15,000 - 5,000 정도로 추정)와 영국 ‘British Museum’에 있는 조개와 홍옥수를 꿰어 만든 형태로 이라크에서 출토된 목걸이BC. 7000년으로 추정가 대표적 구석기, 신석기의 장신구 유물이다. 청동기 시대로 들어서면서, 금, 은 유색 돌들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나갔으며, BC. 1000년 이후 철기 도구가 개발되면서 장신구의 큰 변화가 있게 된다. 페니키안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장신구는 다소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듯 하면서 표면 장식 기법과 금선 세공 기술을 재해석 하여서 새로운 느낌의 장신구 세계를 펼쳐 나가게 된다.
귀금속의 세공 기술은 상감 세공 기술과 표면 장식 기술이 뛰어난 고대 이전의 에트루리아 인들로부터 시작,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계속 이어져 발전되어 왔다. 고대 시대의 귀금속 장신구는 지배층의 권력과 부를 상징하기 위하여 착용되었고, 주로 황금이 쓰였으며, 보석은 부차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리이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보석이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유럽으로 유입되는데 이것이 로마로 계승되어 황금에 의존했던 장신구의 재료가 화려한 보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세에 들어오면서 보석은 종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등장했으며, 교회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는 장신구에 있어서도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새로운 조형미와 독특한 디자인을 추구하게 된다. 이때부터 ‘금과 은’은 보석을 아름답게 하는 부속물로 취급하게 되었고 보석의 가치는 훨씬 높아졌다. 보석은 인간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저택의 장식에도 많이 사용되어, 보석이 박혀 있는 테이블이나 액자들을 위한 기술들도 발달하게 된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때는 군주와 왕권의 심벌로 남성들도 많은 보석을 이용하게 된다. 19세기의 귀금속 장신구는 나폴레옹의 화려하며 웅장한 보석 장신구에서부터 다양하게 발전하기에 이른다. 또한 모든 장신구들은 의복과 많은 연관을 맺으면서 함께 발달했다. 특히 1800년대를 넘어 오면서 유행의 주기가 짧아지고, 아프리카에서의 다이아몬드 광산의 발견, 합성석의 연구는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많은 보석상들이 출발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빅토리아 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기계가 개발이 되어 귀금속 생산은 대중을 위한 생산으로의 변혁을 맞는다. 이 때, 이탈리아는 혼을 고집하는 우수한 작가들의 작품 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구불구불한 커브와 자연미, 훌륭한 기술력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프랑스의 디자인 운동인 아르누보는 장신구라던가, 보석에 촛점을 두기보다는 작가의 장인 정신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심플하면서도 다소 원시적인 사물이나 꽃 문양, 셀틱 문양 등을 이용 하였으며, 브로치, 펜던트, 팔찌, 목걸이, 모자 핀 등에 사용된 보석은 터키석이나 자수정, 오팔, 라피스 라즐리, 장미석이 주로 사용됐다. 이후 1920 -1939년대의 아르데코의 세공업자들은 이전의 그 어느 것 보다도 아름다우며, 화려하고 대담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재즈가 유행하던 분위기와 기계문명에 보다 더 의존하는 다양한 문화적 상황을 예술적 감각으로 승화했고, 디자인을 그 어떤 시대보다 중요시하여 매우 광범위고 다양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따라서 장신구 재료 또한 전통적 소재인 금, 다이아몬드, 진주, 루비 등을 벗어나 플라스틱, 크롬, 강철, 백금 등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또한 화려한 목걸이나 귀걸이, 재미있는 모양의 팔찌 등으로 디자인한 모조 장신구는 ‘코코 샤넬’이나 ‘엘자 치아파넬리’에 의해 점차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1920년대의 길게 늘어뜨린 구슬 목걸이와 1930년대의 여성들의 모자나 신발, 칼라 등에 부착되어졌던 기하학 문양이나 꽃 모양, 인물 모양의 브로치나 펜던트와 같이 다양한 소재, 다양한 디자인의 모조 장신구가 널리 제작되어 대중화 된다. "칵테일 장신구cocktail jewelry"라고도 불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940년대의 장신구 디자인은 아르데코 시대 후기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보다 에너지가 넘치는 독자적인 스타일의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러다가 1940년대의 장신구 디자인은 움직이는 기계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도구나 기계들의 움직임, 나사못, 베어링 등은 장신구 공예에 있어서 중요한 디자인 재료가 되었다. 이후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보석 등 소재 보다 ‘디자인’ 자체가 중요시되는 트랜드에 편승하게 됐다.
김정선 작
임선주 작
산업인가? 예술인가?
도예가들은 단지 장신구 뿐만이 아니라 타 영역에서도 산업과 예술 사이의 생산이냐, 작업이냐를 놓고 수많은 고민의 시간을 갖는다. 그래도 장신구는 그 영역이 좀 더 분명한 영역 안으로 들어와 있다. 즉, 디자인이 중시 될 수밖에 없고, 디자인은 개인적 예술성 보다는 공공의 취향과 미감을 우선 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익히 지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비해서 같은 장신구 분야의 타 공예품에 비해서 제한적 요소들로 인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위에서 장황하게 장신구의 역사를 살펴 본 이유는 ‘어떻게 장신구 역사가 발전해 왔고, 우리는 현대에 있어서 과연 어디에 서있고, 어디로 가야하느냐?’의 문제를 짚어보기 위함 이었다. 몇 년 전만해도 값 싼 기념품이나 일회용 엑세서리 정도로 취급 받았던 ‘도자장신구’가 이제 버젓이 하나의 굵직한 영역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제 부터가 문제다. 아직도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와 틀에 갇혀서 자족과 위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르네상스시대 이전부터 고민하고 변화했던 디자인과 트렌드의 문제를 아직도 새로운 시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자체가 심히 걱정스런 부분이다.
사실, 지금은 방향과 사고의 틀부터 재정비해야 할 때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홍보나 마케팅, 유통을 함께 신경을 써야한다. 장신구는 그 시대적 디자인의 집약이고 작가 감각의 엑기스라 할 수 있다. 특히 ‘도자장신구’ 작가들은 자신이 디자인한 작품을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 말은 자신의 의도대로 순간순간의 우연성과 수정, 보완 과정까지 예민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말이며, 이 부분은 일품 공예가 갖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보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진열장에 진열돼 있는 장신구들을 보라! 브로치의 고정 핀은 쉽게 떨어지고, 장신구에 얹혀진 준보석이 도망가기 일쑤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디자인은 변하지 않고, 그저 도자기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는 작가들도 많다. 다이아몬드가 귀하다고 반지 전체가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진다면 그 다이아몬드가 귀하게 여겨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가 제작해 낸 작품들이 시장갈 때 꺼내 입는 옷과 매치가 될 작품인지, 특별한 날, 특별한 의상에 매치 될 작품인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포지셔닝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어내야 할지 말이다.
귀한 것은 엣지 있게 표현 될수록 그 값어치를 더 할 수 있다. 특히 무거운 흙으로 장신구를 만든다면 그것이 모두가 의복과 잘 어울리겠는가? 오로지 도자기 느낌의 장신구와 타 재료 안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도자기,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과연 무엇을 고르겠는가? 아직도 도자기 작품은 첨부터 끝까지 흙으로만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가들이 있다. 이 얼마나 시대와 창조적 사의, 그리고 디자인 정신을 거스르고 있는 것인가? ‘나의 작품이 왜 주목을 받지 못하는가? 작가들의 스킬이 모자라서 일까? 기본적인 뎃상력과 무엇을 보고 재현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스킬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자신이 아름다운 그 무엇을 보는 눈이 있다면, 남들로 하여금 나의 작품을 선택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왜, 안팔리는가?’에 대한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매력적이지 못하던가, 실용적이지 못하던가, 가격이 맞지 않던가 보통 세 가지 경우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살펴 본다면 ‘도자장신구’는 두 말할 필요 없이 산업과 예술 사이에 존재하는 ‘공예품’이며, 공예는 상업적 디자인 위에 예술적 감각을 융합한 장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신구작가는 끝없이 디자인하고 시도하고 창조해 내야 한다. 거기에 그것을 취하는 사람들의 기호와 취향까지 고려해야하는 부담까지 갖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 도전하고 있을 때, 박수를 쳐주고 용기를 북돋기 보다는 그리고 자극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뒤에서 약점을 찾아 내면서 자신의 발전을 스스로 붙들어 매는건 아닌지 돌아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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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은 선택인가? 필연인가?
「2011 미래유망기술세미나」에서 한 강연자는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들 때, 다양한 언어로부터 영감을 얻고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융복합의 역사가 생각보다 길다’라고 말한 바 있다. 뜬금없거나 근거 없는 ‘창조’란 있기 힘들다. 필요와 연구에 의해 고리에 고리를 엮어가며 힘들게 태어나는 결과물이 바로 ‘창조물’이 아니던가! 현대는 감성테크의 시대다. 바야흐로 예술가들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 즉, 기존의 테크푸시의 시대는 끝났고, 소비자들의 감성을 중시하는 "Humanitech"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어느 분야건 예술적 감성이 빠지면 얘기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들이 앞으로 개척해 가야할 분야는 매우 넓고 다양할 것이다. 마케팅 전략에서 1+1은 단순이 2가 아니다. 3이나 4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1+2나 3은 무한대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융복합’이란 단순이 소재와 장르만의 융복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애플사’의 성공은 독특한 감각과 디자인, 그리고 UI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본다면 수 많은 타 분야에 ‘도자’라는 장르가 더해 진다면 그들이 갖고 있는 상상초월의 시너지 효과가 따라 올 것이다. 지금껏 도자기만 갖고 얘기하고, 그 안에서 나누고, 가르고 하느라 밖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스스로 외면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럴수록 도자 공예의 영역은 더욱 고립되어져 갔음은 당연 지사다.
이제는 최소한 소재와 장르의 결합과 활용 정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시기 상조라 한다면 적어도 기본적 융합에 대해서 더 이상 어색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순수 도자를 버리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도자와 일반 시장 마케팅이 만나고, 트랜드를 적극 수용, 활용한다면 아마도 그 활력은 대단해 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도자장신구’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마음껏 트랜스폼 할 수 있고, 어느 장르와도 결합 할 수 있다. ‘도자’의 한계를 벗어버릴 때 비로서 도자의 가치를 획득 할 수 있음도 인정 한다면 아마도 많은 변화와 결과가 따를 것이라 예견한다. 금과 은 속에 박혀 있는 영롱한 보석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도자가 자리 한다면 도자가 바로 ‘보석’이 되는 것이다. ‘엣지’ 있는 디자인, 주인공으로서의 도자, ‘귀한 것은 흔하지도 남발하지도 않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인식 한다면 또 다른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리라 기대한다. 흙의 변주로 꾸며지는 이번 전시가 도자계가 아닌 패션계와 타 디자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면 아마도 도자장신구 발전의 한 획을 긋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