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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월호 | 전시토픽 ]

뉴 페이스전
  • 편집부
  • 등록 2013-03-27 18:03:27
  • 수정 2013-03-29 09: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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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무한新情無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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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창현 도예가

 

 

한동안 강호江湖에 묻혀 사람들을 보는 일이 무척 데면데면한 지경에 이를 무렵 지난 사오년 동안 멀리서나마 나를 위로하며 격려해주던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계사년 새해에 뜻있는 전시가 가회동의 한 갤러리에 열리니 꼭 찾아와 주라는 부탁의 편지를 받고 나는 하루의 일을 모두 뒤로하고 한달음에 상경하였다. 나의 이 들뜸과 분주함은 단지 지인을 보고 싶은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혹지년은 창작의 주체에 대한 회의가 극에 달하는 시기였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근대미술이 지향했던 예술가의 고유한 책무인 기존의 시각언어와는 완전히 결별할 수 있는 새로운 텍스트의 창조, 하지만 이것은 순진한 이상이었을까? 그토록 절실한 고유한 ‘나’라는 주체만이 살아 숨쉬는 그런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예술은 하면 할수록 절대 익숙해지는 그 무엇이 있었다. 무엇보다 개인전을 거듭할수록 예술은 무언가 알 수 없는 미궁의 세계로 나를 빠뜨리곤 했다. 아무리 작품을 만들어도 새로운 작품은 또 다른 작품이 되기를 손짓하는 하나의 지표 이상의 것이 되지 못했다. 예술에 대한 심한 회의감에 작업실에 주저앉아 있던 나에게 ‘New Face´전 소식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십여 년 전 예술만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던 시절이 있었다. 예술을 하기 위해 그 어떤 모험도 삶의 부침도 각오했던 그 시절 말이다. 그 시절은 내가 불혹지년을 지나면 꼭 데미안 허스트나 브띠 피카소 쯤은 될 거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작은 한반도의 경계도 제대로 넘지 못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나는 다시 처음 예술을 접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때는 아이디어도 주체할 수 없이 많았고, 완성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작품의 ‘참신성’은 담보를 하고 있었다. 그 ‘참신성’은 예술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없이 마음이 가는 데로 가슴에 담긴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가회동이라 했던가? 무척 여성스러운 이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고즈넉이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던 소담하고 모던한 ‘갤러리 이도’는 그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갤러리에는 모두 23개의 대학에서 추천된 44명이나 되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있었다. 한국대학에 도예를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23개나 된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었다. 바다건너 제주도에서 온 작품도 있었다. 갤러리에 들어가자마자 즐비하게 늘어 선 신진작가들의 가작들은 눈이 부셨다. 특히 작품의 완성도의 면에서는 기성작가들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나는 잠시 주눅감이 들었다.

우선 군산대 김태희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전라도 전통방식인 ‘쳇바퀴 타렴’을 응용해서 만든 크기가 1m가 넘는 거대한 「흑단 항아리」였다. 도개질을 하면서 생긴 자연적인 문양이 태토의 어두운 색과 밝은 화장토의 색 속에 스며들어 미묘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람 한명은 족히 들어갈 만큼 넉넉한 내부에 머리를 들이밀고 소리를 질러보았다. 항아리는 공명이 되어 크게 울렸다. 음식의 발효나 저장을 위한 용기로 사용되어온 이 항아리는 각 민족마다 다양한 쓰임새를 지니고, 또한 구전된 이야기 속에 그 독특한 이미지가 드러나기도 한다. 나는 문득 이 항아리가 민족의 고유한 ‘네러티브Narrative’와 결합된다면 재미있는 현대적 설치적인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보았다.

 

 

서울과학기술대 정혜란의 작품 「탈피」는 어린 시절 즐겨 보았던 만화영화 ‘로버트 태권 V’를 팝아트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태토에 색화장토(테라시질라타)를 발라 다소 엔티크한 장난감의 느낌을 주었다. 작가는 키덜트 문화에 주목하고 있었는데, 어른들이 집착하는 아이들의 문화 속에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어린 시절 탐닉하던 장난감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우울한 단면을 시의적절한 담론으로 끌어내는 작가의 능력은 압권이었지만, 어른들의 집착이나 소유의 의미를 전달하는 연결성의 부재가 다소 아쉬움을 주었다.

경희대 김수현의 작품 「web:flower」는 너무나 연약해서 부스러질 듯한 작품의 존재감은 네거티브 공간을 위한 암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가는 빛과 그림자라는 네거티브 공간을 연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파지티브 공간을 구축한다. 흙이 지니고 있는 물성에 저항하면서 작품은 ‘지금-여기’의 현존감보다 존재의 저편을 손짓하고 있다. 문득 꽃들의 유기적인 라인들이 유기적인 기의 형태가 아닌 기하학적인 구조물 속에 대조를 이루고 있었으면 더욱 작품성이 살아났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불과 흙이라는 숙명적인 도예가의 매체를 수많은 실패와 실험을 통해서 자신만의 새로운 시각언어로 구축한 작가의 역량은 미래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서울대 김상우의 작품 「무제」는 하얀 백자 소지를 연마해서 마치 주머니 속의 조약돌의 감촉이 눈으로도 느껴지는 듯했다. 인간과 사물이 오랜 혹은 부단한 마찰로 만들어지는 이 맨들한 사물의 피부는 인간과 사물이 함께 공유했던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유년시절 내 집 한켠에 마련된 다락방으로 통하는 나무계단의 맨질한 촉감의 기억이었고, 할머니와 함께 대청마루에서 여름 한철을 보내면서 생긴 마루의 그 미끈한 촉감이기도 했고, 작은 소녀가 내게 선물로 건네준 개울가의 조약돌을 그 해 내내 만지작거리면서 내 마음도 다 달아버린 그 애틋한 추억이기도 했다. 작가의 작품은 수십 년 동안 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 침잠되어있는 어떤 기억들을 환기시켰다. 작가는 한국 전통의 백자가 지닌 순백의 색과 조약돌이 가지는 보편적인 의미와 조형성을 절묘히 결합시켜 다분히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설치작품으로 끌어올렸다.

제주대 이호철의 작품은 뭍의 사람들에게 한동안 잊혀진 ‘등대지기’를 통해서 인간의 ‘실존’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스위스 출신의 조각가 자코메티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고독한 실존’이라는 말이 내 머리 속에서 순간 맴돌다 사라졌지만, 자코메티의 실존이 황량하고 극한적이라면, 이호철이 삶을 보는 시선은 따스했다. 아마 그것은 바람과 돌이 많은 제주도 사람들의 삶을 대하는 기질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작가의 근대주의적 작법은 정교한 뎃상력과 맞물려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적절한 생략과 상징적 이미지의 조화도 눈여겨볼만했다.

국민대 신지연의 작품은 기하학적인 모양의 원과 반원, 직선과 곡선이 씨줄과 날줄처럼 은은히 직조되어 있었다. 기하학이라는 정교하고도 차가운 이미지를 이용해서 만든 용기들은 따듯한 인간의 음식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조형성이 극대화되었다. 작품의 디자인으로서 가치는 ‘사물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명쾌한 대답이 있을 때 빛을 발할 것이고, 작품의 공예적인 가치는 역사적인 깊이를 현대성 속으로 절묘히 끌어들이는 능력에 의존할 것이다. 신지연은 이 두 가지 갈래길에서 틀림없이 해안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남서울대 최형민의 아이디어 발상은 엉뚱하지만 참신했다. 작품 「endure#2」는 터짐과 분출이라는 속성을 지닌 대포와 그 대포의 입구를 막고 있는 인간의 얼굴을 결합시켜 어떤 돌발적이고 위기적인 상황에 화를 ‘감내, endure´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다. 최형민의 작품에서는 ‘풍자와 해학’적 기질이 다분히 느껴졌는데, 패러디parody나 블랙유머black humor와 같은 탈근대적인 수사를 좀 더 본격적으로 활용하면 더욱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숙명여대 배정은의 「역할놀이」는 정형화된 인간의 몸에 다양한 동물들의 가면을 씌워놓고 인간의 ‘자율성’에 관한 의문을 던진다. 배정은의 작품은 내면의 욕망이나 자유의지는 무시된 채 제도화된 규율 속에서 특정한 역할만을 담당해야하는 인간의 숙명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수작이다. 하지만 인간의 몸이 모두 일률적으로 표현한 부분은 작품의 주제와는 조금 동떨어져보였다. “집단이 규격화시켜놓은 가치평가”에 인간의 일률적인 몸이 대비되기에는 조금 어색한 면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홍익대 이우영의 작품은 어떤 특정한 사물에 대한 집착과 그것에 대한 혐오증을 에브젝션 아트abjection art로 표현했다. 에브젝션 아트는 혐오와 공포가 가져다주는 매혹적인 위력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Cristeva는 ‘오물, 쓰레기, 분절된 신체, 남은 음식’을 정체성, 체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들로 정의하고 이것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을 에브젝션이라고 명명했다. 이우영의 작품 속에 음식을 담거나 음식과 관련된 용기들이 설거지 거리로 등장하고, 그곳에 시간성을 부여해서 오랫동안 설거지거리가 쌓여져 음식 찌꺼기에서 오는 혐오스러움이 과장된 크기의 용기들로 표현되었다. 작가가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은 무척 참신하지만, 에브젝션 아트에서 언캐니uncanny성을 드러내기 위해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직접성’이 지나치게 ‘은유적’으로 표현된 것과 흙의 물성이 강조된 용기의 표현처리는 작품의 주제를 방해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도자에 보기 힘든 이우영의 깊이 있는 주제의식과 완성도 높은 기술력은 미래의 큰 작가가 될 조짐을 보여주었다.

군산대 최기림의 「적자생존」 시리즈는 풍뎅이의 삶을 현대 사회의 인간들의 삶과 대비시켜 표현했다. 강한 턱과 뿔을 이용해 대자연의 풍파를 이겨나가는 억척스러운 한 존재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작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품의 ‘구성적 느슨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은 작가의 뛰어난 표현력과 구성력, 그리고 작품의 완성도에 기인한 것이다.

건국대 송지혜의 「Famme Fatale」은 인체의 파편화된 형상(토루소)과 독을 지닌 뱀을 이용해서 파멸로 이끄는 관능을 지니 여성을 표현했다. 사실 분절된 인체의 형상은 그로테스크하기 이를 데 없는데, 토루소 조각이 미적범례에 들어와 이젠 더 이상 ’불구‘ 혹은 ´언캐니´의 기의를 지니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송지혜의 토루소는 구상조각이지만, 분절된 형상은 추상조각으로의 환원적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구상적인 능력보다는 사물을 추상화시키는 능력이 더욱 두드러져보였다.

 

작품에 대한 긴장된 응시가 주춤하자 갤러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갑자기 갤러리에서 전시된 작품이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그 기시감은 틀림없이 작품의 ‘참신성’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어눌하지만 신인다운 참신함, 공예적인 완성도보다는 새로운 실험과 그것의 시도가 가져다주는 실패의 잔해물들, 나는 그것을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신세대 작가들은 기성 작가들 보다는 새롭고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환경에 살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정보와 수많은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인문학을 배경으로 한 자기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술은 한낱 모방으로만 그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절실한 부분을 인문학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을 시각화시키는 능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작품의 ‘완성도’가 ‘참신성’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이제는 경험이 미숙한 신진작가들에게까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러한 장이 마련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능있고 성실한 작가들이 미래의 주역이 되어서 현대미술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아니 세계 미술계에 한류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날을 그들에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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