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lecule전 2002. 7. 10∼16 갤러리블루
컴퓨터 베이스 세라믹의 비젼
글/안인기 미술비평가
최병건의 이번 전시는 작품 자체보다 그 속에 담긴 제작 프로세스의 엄청난 잠재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름하여 ‘컴퓨터 베이스 세라믹(Computer Base Ceramic)’작업이라는 도예의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에 대한 실험이 그것이다. 분자를 의미하는 ‘Molecule’이란 타이틀로 전시된 그의 작품들은 ‘컴퓨터를 이용한 디자인과 제작(CADCAM)’을 통해 완성한 파티션, 벽장식, 타일과 몇 가지 화병을 포함하고 있다. 최병건은 작업실에 물레나 가마를 두는 대신 컴퓨터와 3D 조각기를 갖추고 있다. 특히 컴퓨터 랩을 갖춘 학교의 도예 실기실은 흡사 공과대학을 연상시킨다.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이용해 아이디어를 컴퓨터 상에서 디자인하고 3D조각기로 프로토타입을 만든다.
이러한 CADCAM 방식은 실물 모형 제작의 번거로움과 시간을 기계가 대신함으로써 아이디어와 완성품 사이의 시간적 감각적 간극은 극단적으로 좁혀지게 된다. 외국의 경우 공예분야의 CADCAM은 최근 10여 년의 짧은 기간을 통해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미국 템플대학의 타일러 학교 금속공예과 스텐리 레흐친(Stanley Lechtzin)은 실제 오브제 제작을 포기하고 오직 가상의 물건만 만들고 전시하는 공예가의 한 사람이다. 레흐친의 경우처럼 컴퓨터는 공예의 근대적 개념을 전복하고 관습적 기능과 역할을 해체하는 매체인가, 아니면 그것을 유지시키는 좀더 복잡한 도구일 뿐인가? 최병건은 이번 전시에서 여기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선보이고 있다. 먼저 제작의 시뮬레이션화를 통한 수공의 기능 변화를 꾀하고 있다. 수공성이 공예의 고유하며 본질적 속성이라면 컴퓨터 베이스의 수공성이란 마우스 클릭과 키스트로크와 같은 디지털 코딩으로 대체된 셈이다. 그럼으로써 오브제로서 공예의 존재 기반은 비물질의 데이터 차원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더 이상 실물을 통한 물질적 오브제 제작을 공예의 본질로 주장할 수 없거나 아니면 공예 개념 자체의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또한 최병건은 도자공예의 새로운 거주지를 모색한다. 그는 이 문제를 건축 공간 속에서 무한히 변형될 수 있는 ‘세라믹’의 존재 방식으로 풀어낸다. 오브제로서의 작품이 아닌 하나의 데이터이자 유동태인 디지털 정보로서의 최병건의 세라믹 개념은 아날로그적 도자의 거주지를 손쉽게 넘어선다. 가상 공간 속에서 그의 세라믹은 유니트화된 블럭으로, 타일로, 파티션으로, 건축의 일부로 혹은 그것의 장식으로 옮아가며 끊임없이 변모한다. 가상공간은 아날로그적 도자의 아이디어적 한계를 넘어서게 하며 제작의 디지털화는 도자의 규범마저 바꿔버리는 것이다.
최병건의 전시는 이 지점에서 멈추어 있다. 새로운 상상력의 도구이자 규범이 된 디지털 프로세스에 대한 탐색의 첫 장인 이 전시에는 최병건의 흥분과 혼돈이 함께 섞여 있다. 이는 작지만 중요한 전진이다. 그의 실험은 도예의 테이블웨어적 기능성과 생활의 미를 구현하는 미덕에도 맞닿아 있고 전복적이고 창의적인 세라믹의 세계를 향한 비전과도 맞닿아 있다. 지금까지의 도예가 아닌 디지털 시대의 도예를 향하는 그는 그 속에서 길을 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