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보이지 않는 곳곳에 무림의 고수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단지,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들은 드러난 자들보다 내공이 깊은 자들도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작가 역시 도예계에서 주목하기 힘들었던 작가이다. 주로 순수예술계라는 보다 큰 울타리에 속해서 작업을 이어온 작가이기에 더욱 그랬을 뿐이다. 인간의 감정과 실존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는 김나리 작가는 사실주의적 표현주의Realistic Expressionism 성격을 띤다. 사실적 묘사와 내면 감정의 강렬한 표현(표현주의)을 혼합한 형식 즉, 대상을 재현하는 것처럼 표현하지만, 그 속의 내용은 작가의 감정, 주관성, 비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방식의 작업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형식의 접근은 포스트모던 시대 이후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리얼리즘이 단순히 재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현실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나리의 작업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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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나리는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산업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했다. 인간의 감정과 존재, 타자와의 관계를 주제로 도자 조각과 설치 중심의 현대미술 작업을 펼쳐왔다. 국내외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으며, 광주비엔날레, 사비나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등 주요 전시에 초대되었다. 현재, 2025년 11월 호랑가시나무아트폴리곤 초대전시 준비 중이다. 김나리 작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등 유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나리 작품 속 눈물, 그리고 악몽
김나리 작가의 눈물시리즈 두상頭像 작품은 눈물이 얼굴에 흐르면서 상처로 파인 골汨을 만든다. 섬세한 리얼리즘 위에 첨예한 작가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때, 눈물과 상처는 인간이 겪는 고통과 아픔, 그리고 기억에 대한 메타포가 된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그 눈물은 단지 슬프고 아픈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즉, 눈물은 카타르시스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와 상황을 한 걸음 떨어진 객관적 시각에서 극명하게 인식하고, 한계점에 무릎 꿇은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분연히 일어나 다시 걸음을 내딛는 동력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스위스 출신의 초기 낭만주의 화가 ‘헨리 푸젤리(Henry Fuseli, 1741~1825)’의 ‘악몽 시리즈’에서 고블린(악마)은 유혹과 본능을 깨우는 한편, 인간 내면의 잠재적 죄의식을 소환한다. 즉, 억압된 성적 욕망이나 충동, 공포를 상징한다. 이에 비해 김나리 작가의 ‘악몽 시리즈’는 실제 본인의 꿈에서 생생하게 겪은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작업실을 현재의 작업실로 옮기고 난 후, 작업실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려는 악령들과의 사투에서 결국 그들을 누르고 평정하기까지 오히려 작가는 그것들을 만들고 불에 구워내어 현실에 내놓으면서 그것들을 이겨낸 것이다. 눈물시리즈와 악몽 시리즈의 공통점은 바로 그것들에 수동적으로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능동적으로 제압했다는 것이다.

「도깨비꿈 An illusion」 75×34×45cm | Hand-built earthenware | 2019
불 속에 모두 태워버리고 싶은 사악한 존재들, 그리고 페르소나
작가가 살면서, 아니 우리가 살면서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빌런Villain들이 있다. 정치, 사회, 문화, 동종업계, 심지어 가족 관계에서도 자신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인연들이 있다. 하지만 그 빌런 또한 그 누구에게는 소중한 존재일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어떤 이에게는 나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빌런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각자의 관점에서 그 사악한 인연들을 대한다. 공공의 적일 수도 있고, 나만의 괴물일 수도 있다. 작가 김나리는 그러한 인물들의 얼굴에 동물이나 악마의 가면을 씌운다. 때로는 식물 같은 형상을 두상 주변에 배치해서 피부에서 자라나게 한다.
누구나 이 작품들을 보면 느끼듯, 그것은 악의 표상이고 저주의 상징이다. 부와 명예, 욕망 앞에 영혼을 파는 자, 그것들을 위해 주위의 사람들을 수단시하는 자들. 예의 바르고 한껏 화장한 뒤의 위선의 가면을 쓰고 사는 그림자 인간들. 바로 페르소나Persona의 개념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보여준다. 앞서 얘기했듯 그 모습들이 모두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했을 뿐. 아이러니한 점은 그러한 모습들을 흙으로 만들어 모두 태워버리려 불에 던졌으나, 오히려 더 명확하고 견고하게 불에 구워져서 욕망 덩어리로 재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모습 앞에서 공포를 느낀다. 자신에 비친 자신을 보고 놀라 뒷걸음질 치게 하는 지점이다.

「없는 사람, The nonexistent person」 65×32×25cm |
Hand-built earthenware, Terra sigillata | 2024
다시 치유의 형상으로; 인식과 현상의 경계에서
김나리 작가는 어느 순간 평정심을 되찾는다. 근작들을 보면 기괴하고 샤머니즘적이며 공포스러운 형상에서 점차 밝고 환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모든 삼라만상의 만 가지 감정을 내려놓고 해탈의 경지에 든 부처의 두상은 작가가 이미 그 고통의 터널을 지나온 것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고 이 세상이 작가에게 있어서 마냥 밝고 온화한 세상으로 인식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이 문제는 인식론적 입장으로부터 현상학적 개념까지 모두 섭렵하며 통찰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알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서 정당화와 믿음, 진리에 관한 주제, 그리고, 자기 초월과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힘을 향한 의지를 강조하는 니체의 존재론을 연결할 수 있으며, “나와 사회의 의식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며, 그 경험은 어떤 구조를 이루는가?”에 대한 현상학적 측면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이때, 김나리 작가가 표현하는 몸은 몸을 통한 지각의 중요성을 강조한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육화된 의식embodied consciousness 즉, 인식을 넘어 세계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 몸의 의미를 활용하면서 작가 자신에 대한 여정과 균형 잡힌 세계관을 찾아가는 여정을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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