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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06월호 | 작가 리뷰 ]

내 친구 자넷 맨스필드(Janet Mansfield)
  • 편집부
  • 등록 2003-03-18 18:52:41
  • 수정 2018-02-19 09:4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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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자넷 맨스필드(Janet Mansfield)

글/사진 김은숙 미국리포터

 필자가 자넷 맨스필드(Janet Mansfield)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십일년전 일본 시가라키(信樂)에서 였다. 필자의 남편이 일본 도까이무라(東海村)에 있는 국립원자력연구소에서 일년간 연구하게 되어 일본에 살고 있을 때였다. 살던 곳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는 유명한 일본 도예가인 하마다쇼지(浜田庄司)가 작업하고 살던 마시코(益子)라는 도예촌과 가사마(笠間)라는 도예마을이 있어서 필자에게는 꿈도 못꾸어 보았을 행운이 공짜로 찾아온 셈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유명한 도예가들의 공방구경, 전시회, 페스티발 구경 등 정신없는 일년을 보내고 있었다. 같은 해에 시가라키에서는 일본역사상 최고의 야심작인 ‘도예숲(陶藝霖)’을 짓고 대대적인 행사가 열릴 계획이었다.

 행사중에는 IAC(International Academy of Ceramics)회의도 열렸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자넷 맨스필드를 만나게 되는 행운도 생긴 것 같다. 낯설고 말설은 외국에서 가뜩이나 주눅이 들어서 쭈뼜거리고 있는 필자에게 아주 수수하게 차려입은 한 부인네가 말을 건네 왔다. 그는 “호주에서 온 자넷 맨스필드라는 사람인데 당신과 한 방을 쓰게 되었으니 잘 지내보자”고 했다. 너무나 소박해 보이고 친절해서 금방 십 년 지기나 되는 듯 가까이 느끼게 하는 사람. 바로 이 꾸밈없고 수수하게 보이는 사람이 지금 전 세계 도예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만큼 유명한 도예가이며 저술가, 외교관, 학자인 자넷 맨스필드 일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당시 시가라키는 예상외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묵을 수 있는 호텔, 여관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방에 4명 있어야 할 조그만 다다미방에 8명을 숙박시키는 바람에 필자는 한숨도 못자는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그때에도 자넷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순한 어린애처럼 잘 자곤 했다. 2년 전 필자가 살고 있는 테네스(Tennessee)에 자넷이 찾아왔다. 그는 더욱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이었다.

 잘 익은 벼는 저절로 머리를 숙이는 법인가? 여기 자넷이 전해준 ‘소개장’(오스트렐리아의 모나쉬(Monash)대학 도예과 교수 오웬 레이(Dr. Owen Rye)가 쓴 글)을 번역해 본다. “자넷 맨스필드(Janet Mansfield)가 쌓아온 업적은 어마어마하다. 그가 호주의 도예를 위해 이룬 공헌에 대해서는 그나마 ‘호주 명예상(Australia Council Emeritus Award)을 그에게 1990년에 수여한 것으로 어느정도 보상되었다고 봐야겠다. 그의 공적 -전시, 수집, 단체를 위한 수고, 출판, 편집, 집필 등등 그의 업적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크다. ‘호주 명예상’은 호주의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상인데 이상을 받은 수상자는 도합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는다. 보다 더 명예스러운 일은 1987년에 Order of Australia(역자주 : 한국으로 치면 국보, 또는 인간문화재와 비슷한 것)를 수상한 것이다.” 작가(도예가)로서 자넷은 두가지 부류의 작품을 한다. 우선 소금소성(Solt Glaze)과 장작가마(Anagama)로 한 기(器) 종류가 있다. 소금소성한 기 종류는 시리즈로 작업을 하는데 그 하나 하나가 조금씩 다르다. 그 형태는 넉넉하고 꾸밈이 없다. 곡선은 마치 한 곡선이 저절로 흘러내려 다른 곡선을 만나는 듯하다. 작가의 성품과 물레의 과정을 나타내는 듯하다.

 조금도 모나지 않고 원만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여러 가지 다른 가마와 소성방법을 쓰는 이유는 작품 하나 하나가 유일하게 다른 형태와 표면을 갖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출판물에서 볼 수있는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대형 기물이지만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그의 작품은 소품들이다. 공기, 머그, 찻잔, 접시 등 일용품 말이다. 형태가 갖가지여서 손안에 쏙 들어맞는 것을 찾을 수 있고 또 특징이 뚜렷한 표면은 해가 갈수록 더욱더 친금감을 준다. 자넷의 사교적이면서 관대한 성품이 바로 이런 작품을 만들게 하는 원인이 되는 듯 하다. 또한 그의 작품을 이용하게되는 모임이나 축제에서는 그의 작품을 사용함으로 인해서 우러나오게 되는 기쁨은 말로 형언키 어렵다. 그는 1988년 장작가마를 짓고 난 후에 장작소성에서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심미적인 경지를 발전 시켰다. 소금소성된 작품과 비교해볼 때 그 형태나 표면에서 받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다만 그의 장기인 꾸밈 없는 소박함은 그대로 간직하면서 그의 작품이 성공적인 것은 완전히 마무리를 잘 짓는다든지 흠잡을데가 없는데 있는 것이 아닌 작품의 ‘완전함’을 제시하는 데에만 있는 것 같다. 사실상 ‘참으로 소박하다는 것(True Simplicity)’과 ‘참으로 맑고 투명하다는 것(True clearity)을 성취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도 덜도 않고 마무리하는 것이 소박함을 성취하는 길이기 때문인 것 같다. 자넷 맨스필드의 작품 활동 이외 수많은 다양한 활약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외교의 힘’이라고 하겠다. 세계 무대에 호주의 도예를 내놓는 그의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그가 만들어내는 잡지 ‘Ceramics:Art and Perception’과 ‘Ceramics Technical’은 세계적으로 가장 높이 인정받았으며 또 가장 많은 독자에게 읽혀지고 있는 세계적인 도예잡지이다. 그는 또한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국제공모전 심사원으로 참여하고 다양한 심포지움, 워크숍 등을 통해 활동하며 한편으로는 IAC 부회장 직도 맡아보고 있다. 그의 부드럽고 친절한 성격은 온 세계의 도예가들과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많은 도예인들을 호주로 초청해 강연, 워크숍을 하게 하는 초석이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호주에서 가장 인기있는 연사이며 또한 심사원이다. 그는 또한 자기 소유 토지(호주 Gulgong 근처의 Morning View)에 세계각국의 도예가를 초청해 행사를 한 적도 있다. 모두가 다 장차 호주도예계를 세계무대에 올려놓는 발판이 되었고 네트워크를 더욱 넓고 탄탄하게 한 셈이다. 몇 권의 국내외 도예책을 저술함으로서 그의 범위는 더욱 광대해지고 결과적으로 그의 두 잡지를 출판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 셈이다. 한마디로 그는 도예가로서 확실한 지위와 또한 자기 국가를 위한 문화대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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