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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월호 | 작가 리뷰 ]

이달의작가 옹기장 김일만
  • 편집부
  • 등록 2021-03-03 11:03:49
  • 수정 2021-03-03 17: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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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작가

 

옹기, 쓰임을 넘은 오브제로써의 가능성
김일만, 스스로 그러하다

글. 안준형 큐레이터 사진. 이은 스튜디오

 

김일만 옹기장 스스로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체화와 사유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양적 축적이 질적 고양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해낸다. 자연을 닮은 옹기장의 옹기는 그 자체의 자연스러움으로 미감과 조형성을 발견하고 즐기는 주체적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규정지을 수 없는 보편적이고 정서적인 함의
‘자연’의 의미를 유추해본다면 ‘스스로 그러하다’ 정도로 볼 수 있지만, 한자가 표의문자 임을 고려한다면 보다 풍부한 함의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자自’는 ‘스스 로’, ‘저절로’, ‘자연히’ 등의 뜻과 함께 어떤 사실로 말미암는다는 ‘인因’의 뜻을, ‘연然’은 ‘그러하다’, ‘틀림이 없다’ 등의 뜻을 갖는 동시에 ‘허락許諾’과 ‘동의同意’의 의미도 있다.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져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는 한자가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대만, 베트남,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국가의 언어는 물론 삶과 정신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는 점을 돌이켜 보면 한자 문화권에서 ‘자연’이란 하나의 의미로 규정되는 것이 아닌 동 시에 보편적인 정서적 함의를 갖는다는 것에 넉넉히 동의할 것이다.

자연을 담다, 자연을 닮다
우리는 몇몇 대상에 대해 ‘자연을 닮았다’든지 ‘편안하고 자연스럽다’는 얘기를 왕왕한 다. 그렇다면 자연을 닮은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다양한 답이 나올 테지만 그 중 에는 일부 예술이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자연의 본성처럼 위대한 예술은 없다’는 로 댕의 인식은 물론이거니와 자연은 어느 하나 불필요한 것 없이 꼭 필요한 것들로 구성 된 가장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동시에 이상적인 순환구조로 이뤄져 있기에 지금껏 이어 져 내려오는 동서고금의 예술품이나 기법에 자연으로부터 비롯된 내재율內在律이 깃 든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하기에 자연의 원형을 최대한 온전히 보전 한, 자연의 원물에 정서적 온기를 더한, 자연을 형상화한, 원초적 감각이 드러나는 예술 품이 떠오르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전시 기획이나 저술은 객관을 기반으로 한다지만 상당 부분 주관에 의지한 채 분명한 책임의 소재를 가리는 영역이기에 완수하고 드러내기까지 그 무 게감이 남다르다. 부담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자연을 닮 은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옹기, 그중에서도 특히 김 일만 옹기장의 옹기를 떠올렸고 앞서 다룬 자연을 주제 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다만 이를 떠올린 근저에 는 옹기를 제작하는 목적, 만드는 재료와 과정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해온 역사였으며 감각적 실재에 연유 한 것이란 점에서 관념적으로나 미술사학, 도상학圖像學 으로 흐르는 것을 지양하고자 한다. 옹기의 과학적인 효 능, 발효음식과 연관한 식문화, 지역별로 다른 제작기법 과 형태, 유약과 소성에 따른 분류, 역사적인 변천 과정, 쓰임에 따른 민속학적 구분이나 타국의 비슷한 도기 및 토기 사례 분석은 이미 많은 연구가 선행된 데 반해 상대 적으로 옹기 본연의 미적 가치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일만 옹기장은 일명, 전통을 계승하 는 이로 그에게 ‘전통과 현대’의 관계는 단순한 계승이나 형식 실험을 넘어서 실재實在, exist에의 끊임없는 회귀 라고 말 할 수 있다. 다만 옹기장이 과거의 방식을 최대 한 이어가려는 것이나 장작 가마 소성만을 고수하는 것 은 단순히 전통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방법이 아니면 옹기에 자연을 담아낼 수도, 자연을 닮게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표면보다 내부의 깊이에 있다.”고 이 야기한 세잔은 단순한 시각적, 현상적 사실에서 다시 근 본적인 물체의 파악, 즉 자연의 형태가 숨기고 있는 내적 생명을 묘사하는 데 목적을 뒀다. 이를 통해 본다면 옹기 에서 자연을 떠올리는 이유는 흙, 물, 바람, 불, 돌, 철 등 의 자연에서 온 원물로부터 오는 안정된 힘과 함께 이 모 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완성되는 과정과 사유 때문 일 것이다. 이는 “한 예술 형식을 다른 예술 형식으로 설 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훌륭한 예술품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 이라는 플로베르의 의견처럼 명확히 전 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딱히 장르적 한계를 넘어설 필 요도, 유구한 장르의 정의를 재규정할 필요도 없다. 마치 “나는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들에게 끌려 들어간 다. 겁 많은 어린애처럼 조심스럽게 그들의 옷자락을 붙 들고 그들의 걸음걸이를 따라 시간의 강을 천천히 걸어 간다. 따스하면서 온갖 감정이 뒤섞이는 여정이다.”라는 위화余華의 말처럼 온전히 지켜보며 그저 음미하면 그만 이다.

차안을 벗어나 피안에 이르는 여정
카프카가 자신의 삶이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학 을 기도와 구원의 형식으로 여겼다면 김일만 옹기장에게 옹기는 삶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이고 삶을 이어갈 수 있 도록 해준 기도와 구원에 다름없었다. 여든에 이르기까 지 김일만 옹기장의 삶은 그 당시 세대가 으레 그러했듯 가난한 나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전란 속에 피난길 에 오르고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주린 배를 움켜 쥐고 가난을 쉼 없이 버텨내는 것이었다. 역동하는 역사 속에서 하루도 편히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 현실과 부딪 혀온 순간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을 업 어 키웠으며 초등학교도 가지 못한 채 열 살 남짓의 나이 에 고사리 손으로 옹기점에서 일손을 거들며 성장한 옹 기장은 평생을 거친 흙으로 고운 옹기를 빚으면서 아내 를 맞이해 네 아들을 키워냈으며, 며느리를 들였고 어느 덧 장성한 손주들에게 아들들에게 했던 것처럼 옹기를 가르치고 있다. 사료를 정리하며 만난 옹기장의 삶은 비 교적 평탄해 보이기 마련인 타인의 삶임에도 불구하고 발을 딛고 선 현실이라는 깊고, 어두운 수렁을 건너는 수 행자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 여겨졌다.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옹기장의 초월적 의지는 피상적인 세계의 장막을 찢고 차안此岸을 벗어나 피안彼岸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었을 테고 본연의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겨를 도 없이 그 길만을 우직하게 걷다 보니 중요무형문화재 라는 사회적 직분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옹기장을 둘러싼 현실과 작금의 기술을 얻기까지의 과정 은 감히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엄혹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연적 재료로 자연을 다루는 것이 실재로의 귀환을 이루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인지 분명하지는 않 지만, 옹기장의 옹기에는 자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 간에게 자연이 아무런 목적 없이 스스로,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장르가 무엇이든 소위 예술가들은 벼리고 벼른 감각으로 자연과의 교감을 이뤄낸다. 현실 의 구체적 재현이나 화려한 외양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 라 자연의 본질을 깨닫고 다가서기 위해 평생을 몰두하는 것이다. 옹기장 자신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체화 와 사유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지난한 노동의 시간을 통 해 비로소 완성되었다. 옹기장의 작품은 ‘역사의 격동기 에서 살아남은 과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근본 이 되고 뿌리가 되어서 천지가 아직 없을 때도 예로부터 진실로 존재한 것’만 같이 보인다. 이는 작품을 만드는 과 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중력에 순응해 땅속에 자리 잡은 흙을 파내어 수백, 수 천 번 치대고 이겨 불순물을 걸러낸 후에야 물레에 오르는 과정이 그러하다. 또한 흙 가래를 쌓아 올리면서 이어 붙이기 위한 타렴질은 중첩 의 과정이지만 결국 애초의 흔적은 사라지고 하나의 형 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마치 “예술은 드러내기와 숨 기기의 상호작용”이라는 하이데거의 의견을 떠오르게도 한다. 김일만 옹기장의 옹기는 ‘인식의 오류로 말미암아 혼란해진 자기 자신을 정화함으로써 본래의 자연스러움 을 회복하려는 방법이며, 동시에 세상을 다스리는 법술’ 이라는 노장사상의 무위와 견줄만한 동시에 양적 축적이 질적 고양으로 전환될 수도 있음을 여실히 증명해낸다.

오브제, 오부자
이번 전시는 옹기와 자연에 주목해 옹기를 만드는 데 있 어 근원과도 같은 원물과 함께 어우러진 옹기가 내놓는 표정과 양태 그리고 서사에 초점을 맞춰 전개되었다. 앞 서 자연을 닮은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 필자는 옹기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흙과 돌, 물과 불, 나 무와 철은 개별 소재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는 단순한 자연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완성된 옹기와 한 공간에서 어우러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새로운 생명력과 옹기 본연 의 조형성에 주목해 오브제로서 옹기의 가능성을 모색하 고자 한 것이다. 혹자는 과거와 현재의 공예를 구분할 때 전통공예는 실용성, 현대공예는 조형성에 방점을 둔다고 여긴다. 필자는 이러한 시각이 여러 사례를 배제한 체 이 분법적으로 구분한 것이라 마뜩잖을뿐더러 전통공예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간과한 것이기에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김일만 옹기장의 옹기만 해도 장을 담지 않아도, 곡식이나 물을 보관하지 않더라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충분하다. 쓰임을 위해 만든 것이지만 생활 속 에서 완상玩賞만 한다 해도 흡족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조형성을 가진 것이다. 오랫동안 봐서 익숙한 것, 귀히 여겨지지 않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갖는 그 자체 의 자연스러움, 즉 미감과 조형성을 발견하고 즐기는 주 체적 즐거움을 더욱 많은 이들이 느꼈으면 한다. 옹기장 의 옹기를 찬찬히 살펴보면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어둡 지만 밝다. 중력에 저항하며 세워 올린 기벽은 곡선을 그 리며 버텨 선다. 흙의 질박하고도 선명한 찰기는 굳건하 게 형상을 이루고, 불을 견뎌낸 흙의 인내는 저마다의 방 식으로 몸에 맞는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보상된다. 인위 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불길을 거쳐 나온 완성된 옹기의 빛깔은 그것이 잿물을 먹인 옹기이던, 연을 먹인 질그릇 이던 마치 모든 색을 다 포함하고 있는 존재의 색, 생명의 색이라 할만하다. 황토색 바탕은 붉은빛을 머금다가도 반짝이는 광택을 내기도 하고, 차분한 검은색으로 가라 앉기도 한다. 다져진 작은 알갱이들은 보석처럼 빛나고 그 어떤 색이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체적으로 한결같은 단색이 아니라 채도와 명도를 달리하며 다채로운 요변을 드러내 각 각의 색을 뭐라 칭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 다. 작품에서 보이는 시각적 즐거움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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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1년 2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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