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윤성호 개인전
<거기에 있는 사물>
글.홍지수 미술학박사,공예비평 사진.편집부
윤성호의 작업에서 ‘장소’는 작업의 선제조건이자 실마리다. 작가는 그 속에 우리의 일상 속에 볼품없이 존재하는 것들을 프렉탈 이미지로 환원하여 단순화, 재구성한 것들을 배치했다. 흙으로 만든 구조물은 장소의 조건에 따라 단독으로 존재할 수도 혹은 군집을 이뤄 풍경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윤성호의 작업은 자신이 속한, 그리고 사는 세계에 대한 즉각적 반응 그리고 섬세한 관찰을 모태로 한다.
사물이 ‘거기에 놓여 있음’은 공간과 사물이 하나로 동화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때에 따라서 사물이 공간과 분리,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 작품은 독립적, 자율적 가치와 의미를 지니지만, 그에 앞서 본질은 지구의 중력에 영향을 받는 물질이자 고유의 부피를 지닌 사물이다. 따라서 실내 공간 혹은 외부 환경 어디든 매달리고 놓이고 기대야 만 현실 속에서 존립,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물질적 형상 없이 개념이 주가 되는 작품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형 작품은 태생적으로 장소공간와 분리 불가능한 숙명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에서 장소성의 개념이 부각되면서 미술의 장소 개념 역시 많이 바뀌었다. 미니멀리즘이 초래한 연극성 개념의 등장 이후 그리고 미니멀리스트들이 고안한 화이트 큐브가 품고 있던 이데올로기를 여러 방법을 통해 탈피하려는 예술가들의 시도들이 늘면서 미술관 갤러리의 공간을 단순히 물리적 관계나 위치 지표로 보거나 예술품의 수장과 전시기능을 위한 장소로 보던 시선은 최근 미 술 현장에서 거의 사라졌다. 최근 한국 도예의 표현에도 부쩍 장소에 대한 작가들의 인식과 관심이 높아졌다.
굳이 장소성을 주개념으로 다루지 않는 작가들일지라도 아예 작품을 제작하거나 전시를 계획할 때부터 특정 장소의 구조나 설치방법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거나, 주어진 전시장소의 특성에 따라 전시할 작품의 종류와 수를 조정하는 것이 요즘 작가 들의 전시 및 작업의 추세다. 그 중에서도 윤성호는 장소와 사물과의 긴밀한 관계를 묻고 인간의 인식을 일깨우는 작업을 한다. 그는 특정 장소, 환경을 궁구하고 그에 들어맞는 불가분의 사물을 만든다. 작가는 설치 장소가 정해지면 작품이 놓일 장소가 지닌 구조의 특징과 의미의 맥락을 파악한 후에야 자신이 무엇을 만들지를 그리고 그것을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를 궁리한다. 그의 작품은 작가의 취향이나 임의로 꾸려진 가상 서사 속에 돌출한 것이 아니라 공간 및 주변 환경과의 긴밀한 인과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존재하는 관계적 사물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윤성호의 작업은 최근 작가들이 예술의 각축장 위에서 제기하는 여러 문제 중에서 예술 작품을 더 이상 통제된 공간 혹은 물질에 배속시키지 않고 탈주시키려는 현대미술의 실천들과 맥을 같이한다. 장소-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로서 로버트 시미드슨Robert Smithson의 사이트/ 논-사이트Site-non-Site 개념이나 윌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나 마이클 하우저Michael Heizer의 랜드아트 개념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특정 장소의 특징과 역사성과 혼성되며 또 다른 공간 속 제3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윤성호의 작업에서 ‘장소’ 의 선택은 굳이 외부와 내부공간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 다고 노골적으로 장소-특정적 미술을 전면에 내세워 장소가 지닌 역사, 사회, 문화적 알레고리를 적극적으로 작품 에 반영시키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장소성에 따 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작품의 또 다른 의미와 잠재적 형상 의 가능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앞서 예를 든 장소-특정적 미술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특히 그의 작업은 설치 장소에 따라 작품이 달리 변신한다는 점에서 장소와 면밀한 관계를 갖는다. 작품은 환경 즉, 어떤 공간 속 어떤 자리에 어떤 방향과 높이로 놓이는가에 따라 장소 그리고 관람객과 다양한 인터렉티브를 만든다. 관람객은 능히 익숙하고 잘 인지하고 있다고 여기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작 가가 전시장에 새롭게 배치한 구조물을 통해 해당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거나 재발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예를 들 면, 이안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전시대를 벽과 일정한 간격 뜨임 없이 코너에 바짝 붙여 놓았 다. 전시대를 마치 벽으로부터 확장, 돌출된 또 다른 구조 처럼 활용했다. 일반적으로 전시대가 오브제를 지층의 현 실로부터 수직 상승시켜 작품을 이상세계로 견인하고 특별한 것처럼 보이는 역할을 한다면, 윤성호의 이번 전시에서 전시대는 단순히 작품의 지지대 혹은 현전의 무대를 넘어 작품과 함께 전시 공간의 구조를 바꾸고 새롭게 전환하는 구조적 조합 역할을 한다. 작가는 전시대 위에 직사각형 구조물을 정면방향이 아닌 사선으로 틀어 올려놓았다. 작품의 뒤배경, 천장으로부터 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온 모서리 선은 전시대 윗면의 빗변을 만나 180도로 갈라진다. 이 선은 다시 전시대의 모서리 선으로 흘러 하나로 수렴되고 전시장의 바닥을 향해 내리흐른다. 여기에 작품을 공간과 전시대의 모서리 선에 맞춰 90도 대각선 방향으로 대응하여 놓은 덕분에 천장부터 바닥, 공간과 전시대로 이 어지는 선의 수직성과 운동성, 방향성 그리고 그를 은연중 따라가는 관람자 시선의 이동 역시 전환되고 역전된다. 같은 흙의 구조물, 전시대라도 공간의 대들보, 기둥의 돌출, 구조에 대응하여 어떻게 배치하는 지에 따라 그를 바라보는 관람객의 시각과 인식기억은 모두 달라진다. 그의 전시를 주도하는 인공 구조물들. 여섯 개 혹은 이상의 면이 서로 맞물려 각을 이루며 기립한 공간 혹은 구조물은 도시풍경 속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다. 적은 자본과 시간, 인력의 투입대비 거두어야 할 생산성의 효율 속에 서 태어난 모던 디자인은 장식을 이 세상에서 제거해버리고 이러한 단순한 구조로 물건을 만들고 각진 건축물을 세우고자 했다. 그 덕분에 근대 이후 도시 그리고 일상의 풍경은 기술과 과학적 보편성에 기초해 일체의 장식을 제거 한 순수 기하학적 형태들로 빠르게 채워졌다. 산업화가 정점을 향해 달릴수록 정면과 후면을 따로 두지 않는 형태 즉, 대량생산을 위한 모듈화된 형태가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높이, 빠르게, 대량화될수록 가려지고 사라지고 잊히는 것들도 많아졌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는 자신의 눈에 매일 들어온 인공물들을 재현하고 전시장으로 인종했다. 도시를 모태로 한 자의 눈에 들어온 다양한 인공물들로 가득한 도시풍경은 반대로 농촌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품은 향수나 기억만큼이나 익숙하고 당연하다. 그러나 아무리 도시 태생이라도 매일 하루가 다르 게 익숙한 것들이 바뀌고 사라지는 현실, 경쟁하듯 수직으로 치솟는 건물의 그림자 뒤로 가려지고 사라지는 것들의 부재와 망각을 당면할 때는 무척 애달프고 속도에 쉽게 적응하기 쉽지 않다. 전시장에 흙으로 만든 구조물 그리고 그것을 전시대와 함 께 공간 속에 세우고 눕히고 벽에 걸어 만든 풍경은 작가 가 일상 속에서 눈여겨보고 쉬이 보고 마주쳤던 사소한것 들, 사라지고 잊혀가는 것들에 대해 늘 아쉬움과 연민을 대하던 것들로부터 가져왔다. 그것은 창문을 열 때마다 버스 창 너머로 보이는 도심의 풍경들-아파트나 전봇대의 도열 일수도, 길거리에 흔히 설치된 볼라드주·정차 방지봉이나 맨홀 뚜 껑, 도로 우수관, 철길 등에 근한 이미지일 수도 있다. 작가는 일상 속에 볼품없이 존재하지만, 우리의 인식 바깥에 있 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고 살피면서 자신이 만들 형태와 설치의 모티브로 삼는다. 삶에서 보고 관찰한 형상은 프렉탈 이미지로 단순화 재구성된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