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읽는다는 뜻을 지닌 독화讀畵는 전통 회화 양식 중 하나다. 그러나 시대와 문화에 따라 유행이 변해가며 회화나 기타예술장르의 창작자들에게 특별히 주목받지는 못한 채 조용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무언가 의미있는 도자기를 만들고 싶었던 고희古稀의 한 도예가는 1989년 출간된 한권의 책을 손에 들고 이것을 도자에 접목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달, ‘꿈과 소망을 품은 달항아리’라는 주제로 약 50여점의 말하는 도자기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마음의각성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목표로 가는 길의 나침반이 되고자 태어난 도자기들. 이들을 각기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세상에조심스럽게 선보인 도예가 김배한을 만났다.
Q 법학을 전공하고, 그동안 경영직에 오래 몸담아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예계의 입문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요.
대기업의 CEO로 일했지요. 그 생활 자체가 밤낮이 없고 긴장이 연속인 삶이에요. 30대 후반에 임원이 된 후 오랫동안 몸 관리를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병도 생기게 됐는데, 환갑을 기점으로 직장과 인생 전반을 정리하기로 결심했어요. 후반부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준비하던 중에 우연히 도자기를 만드는 영상을 보게 된 것이 계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취미로 흙을 빚고 만들면서 집중하면 좋겠다해서 도자기를 배우게 된 것이 벌써 11년차가 됐습니다. 도자기를 만들 때는 그 시간동안 다른 생각없이 집중할 수 있게 되는 점이 좋습니다. 어느새 제 인생의 생활 중심이 도자기와 그림이 되었네요. 엄밀하게말하면 제가 프로는 아니지만 아마추어로 재밌게 즐기면서 도자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Q 거의 모든 공정에 ‘몸’이 쓰이는 작업을 하시는 것에 대한 소회가 궁금하네요.
기업인과 도공의 차이를 재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 입장에서는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기업을 경영하는 것보다 수월했어요. 기업은 책임의 범위가 소비자와 사회 전체에 미치는 것이니까요. 조직원과 그 가족에 대한 책임 등 범위와 내용이 한도 없지요.그것에 비하여 도자기는 단순합니다. 도자기도 차별화에 대한 고민으로 재료를 찾아 전국을 다니기도 하고 상당한 노력을 지속하지만, 그것을 그만둔다고 해도 누가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 따르지는 않지요. 절대적 책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오래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Q ‘독화도예’를 본격적으로 작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도자기는 10년을 배우고 동양화도 4년 정도 배우던 중에 그림을 계속 화선지에 그릴 것이 아니라 도자기에 그려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도자기는 초벌 후에 물감을 흡수하는 성격이 있지요. 캔버스처럼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미적 감상으로 뛰어난 그림을 그리기는 어렵겠다 싶었어요. 뜻이 있는 도자기를 그려야겠다 마음먹고 서점에서 자료를 찾다가 『동양화 읽는 법』이라는 책을 접하게 됐습니다. 책의 저자인 조영진 박사는 미술을 전공하고 의과대를 다시 간 분입니다. 그분의 말이 자신은인물화를 전공하고 싶은데 사람의 껍데기만 그리는 것에 대해 의문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미인도를 그리면서도 사람 속이이렇게 생겼는가 항상 물음표를 달고 있었다고요. 그래서 해부학을 공부하기 위해 의과대를 가서 지금은 해부학 박사가 되셨지요. 마찬가지로 도자기도 조형미를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 외에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게다가 도자기 위에 그림은 안료의화학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수채화처럼 농담의 다양한 표현도 어렵고, 유화처럼 색을 많이 쓸 수도 없습니다. 1250도를 견디고 불에 타지 않는 것만 그릴 수 있는데 보통 회화의 미적 감상 기준을 도자기에 적용해서 그리는 것은 억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을 예로들면 그 그림은 농부가 석양에서 추수하는 모습을 묘사해 ‘감상’을 유도합니다. 이것은 자기 도전이나 발전을 위한 공감은 아니에요. 감상의 대상으로서 그림이지요. 도자기가 가진 표현의 한계성을 스토리 텔링이 보충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독화도자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Q 구체적으로 ‘독화도예’가 고무하는 점이 있다면.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서가의 모습을 많이 그렸습니다. 족자에다가 책을 그린 것인데 서가와 꽃을 함께 그렸습니다. 선비가공부하는 방은 공감을 부르는 정서가 있습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쉬지 않고 학문에 정진해야 한다, 어딜 가든 책을 놓지않아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그 족자를 걸어놓고 보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지요. 내가 마음과 정신으로 공감하는 이야기를 도구화시켜서, 가까이 두고 매일 매시간 보면서 교감하는 것입니다. 독화가 있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자기 관리를 하고 없으면 안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곁에 두고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면 자기 반성을 하는 데에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Q 독화가 가진 가치로 ‘압축된 결론의 그림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깨닫고 실천을 독려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요. ‘우의법1)’의 독화는 배경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눈으로 감상이 바로 전달이 되는 미적 감상의 그림들과 달리 독화는 이해를 못하니 ‘저게 뭐야?’하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에는 별도의 설명을 달아두었습니다.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면 부모의 고생을 상징하는 풀이 연蓮 입니다. 연은 더러운 물속에서 살지만 꽃은 찬란하고 화려합니다. 시커먼 껍데기는 부모를, 그 안에 하얀 속살은 자식을 의미하는데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식만은 깨끗하게 키우려 노력한다는 것이에요. 꽃을 화려하게 그리지 않고 뿌리만을 그려놓고도부모의 은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누군가 옆에서 “부모의 은공을 알아야 한다”, “열심히 공부해라” 잔소리로 훈육해봐야 귀에 잘 안 들어오지요. 그런데 스스로 공감했을 때는 그림만 봐도 우리 부모가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어렵게 나를 키우느라 시커먼 흙 속에서 사셨구나, 내가 나태하게 살아야 되겠나 하고 깨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옛날에 우리 선조들이 문인화나 민화에서 쓰셨던 것 보다도 훨씬 많아요. 현대에 맞게 연구를 하면 더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림 사조에서 회화적 독화를 그린 분들은 상당히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그렸는데, 도자기에 독화를 하신 분들은 학문을 연구하신분들이 많지 않아서 스토리 텔링의 소재가 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이 무슨 뜻인지 압축한 설명을 간략하게 표현해 줄 수 있는 글이 필요한데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옛날 포도문 항아리는 포도를 그린 게 아니라, 자녀의 번성을 기원하며 그린 것입니다. 줄기가 있는 식물을 한자로 ‘만蔓’이라고 하는데, 만대 식물은 뻗어나가면서 수십 수개의 결실을 맺는다는 뜻을 지녀요. 자녀의 번성을 나타낼 때 이것을 그리는 것인데, 그것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장식적 요소로만 생각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에 만약 자손 번창에 대한 글을 간단히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3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