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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월호 | 작가 리뷰 ]

분청과 유리가 만드는 묘화妙畵 김한사 Kim Hansa
  • 편집부
  • 등록 2018-01-08 15:46:08
  • 수정 2018-01-08 15:4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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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업실엔 그가 세계 이곳저곳 여행하며 수집한 물건들이 가득하다. 작품과 함께 어우러진 모습에서 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위태로움이 없고 편안하며 탈 없는 성곽. 경기도 안성安城은 유독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드는 지역이다.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에워싸고 앞으로는 금광호수가 지척인 햇살 가득한 곳에 김한사 도예가가 터를 잡았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15년이 흘렀다. 처음 왔을 때와 같은 풍광을 지니고 있다는 고요한 안성은 작가가 오로지 작품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선사했다. 혹자는 너무 중심에서 물러나 외로이 작업하는 것이 아니냐는 염려를 내비치지만, 예순이 넘은 작가는 자신과 가정을 돌아보고 작업을 살피기 위해 결정했던 지난날의 해안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줄 없는 외줄 타기
순수미술을 전공하던 아들이 부모의 큰 반대를 짊어지고 도예의 길로 들어선지 30년이 흘렀다. 집안에서 환쟁이 나왔다 난리였지만 오히려 그런 반대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막상 다가온 현실은 물론 막막했다. 80년대 초, 이천에 작업실을 두고 시작했으나 이렇다 할 연줄이 없으니 어디서 출발해야 할지 몰랐다. 학연도 지연도 없이 그저 맨몸으로 부딪히는 일 뿐. 그야말로 줄 없는 외줄 타기였다. 유약은 다른 도예가들과 마찬가지로 책과 부단한 실험을 통해 익힐 수 있었다. 허나 연구가 아닌 몸으로 익혀야 하는 물레는 달랐다. 다들 자신이 작업 꽤나 하는 줄로 알고 있었으니 대놓고 가르쳐달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웃 작업실을 드나들며 그저 인사차 들렀다 말해놓고는 온 신경이 물레에 가있기 일쑤였다. 한 번 본 것을 기억했다가 얼른 작업실로 돌아와 연습해보길 여러 번, 그렇게 어깨너머로 배운 물레가 지금의 작가를 완성했다. 그는 36살 때 이삼평 14대손과 함께 전시를 열었고, 2000년에는 이태리 밀라노의 유서 깊은 미술관 Palazzo Isimbardi에서 유럽연합의 초청으로 개인전도 열었다. 운이 좋았다 겸손을 보였지만, 그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기회들이다. 줄 없는 자를 외면하는 현실은 지금도 다를 바 없다. 지방대학과 서울지역의 대학 출신들이 기회의 차별을 받는 일도 부지기수다. 작가는 그런 일들이 쌓일수록 자신과 같은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오래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말한다.

 

예술을 직업으로 삼을 때
예술도 유행이다. 작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컬렉터가 아님을 깨닫고 인정할 때 오래 작업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말한다. 예술가를 지원하는 귀족이나 패트론patron이 없는 시대에 예술은 자생적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도자에 유리를 접목하게 됐냐는 질문에 작가는 담백하지만 무거운 답을 먼저 꺼내놓는다. “먹고살기 위해서.” 자기복제의 반복은 대중들에게 외면받는다. 새롭지 않으면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경제가 무너지면 문화도 무너지듯, 예술가도 돈벌이를 등한시할 수는 없다. 때문에 작가는 매일을 작업실로 출근한다. 그는 작업의 연속성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움에 대한 믿음이 있다. 영감은 어딘가에서 갑자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철학을 바탕으로 꾸준한 실험과 새로운 감각에 대한 집요함이 작가를 새로운 미감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는 예술가란 직업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 작업실이 곧 직장인 것만 빼면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작가는 분청의 맛에 매료됐다. 이거다 싶었다. 그길로 박물관에서 분청에 관한 연구서적 하나를 사들고 와 읽기 시작했다. 전통 분청에 대한 기형과 문양, 제작 기법 등 모두 책을 통해 배웠으니 옛 방식을 그대로 익힌 셈이다. 철화를 쓰더라도 직접 산화철을 만들었으며 인화도장 하나라도 그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그의 분청은 시작부터가 전통 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 후 우연히 만난 한 미국 작가의 말이 그의 눈을 뜨게 했다. 우리 전통 자기의 모습을 닮은 작품에 “어디서 한국 도자를 배웠느냐.” 물었더니 “인터넷으로 찾기만 해도 이미지며 모든 것이 다 나오는데,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느냐.”라며 반문한 것이다. 그때 무언의 경계가 깨졌다. 우리 도자기는 우리 흙으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우리 것만이 최고라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됐다. 원하는 재료를 얼마든지 구해다 쓸 수 있는 좋은 환경이 갖춰진 지금, 전통만을 고수한다면 세계적인 시장에서 당연 도태될 수밖에 없다. 우리 도자를 알리기 위해서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그를 현대적인 분청, 자신만의 색으로 재해석한 분청으로 이끌었다. 공자는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전통과 새로운 것을 고루 알게 된 작가는 스승이 될 경지에 오른 것이다.

 

김한사 도예가

 

분청과 유리의 만남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가 어느 날 성당 제대 뒤에 놓을 작품을 의뢰받았다. 기쁨과 동시에 깊은 고민에 빠진 그에게 아내가 유리를 접목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새로운 시도였다. 도자와 유리는 늘 불이라는 속성 앞에 교집합을 두고 있으나, 그 둘의 조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다름 아닌 불이었다. 흙과 유리의 용융점이 다르니 자칫하면 유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거나 색이 날아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작가는 불을 다루는 법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지난한 실험과 실패의 반복에도 불이 흙을 통해 유리를 변화시키는 작업은 도예가로서 놓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이제는 작업하면 열에 아홉은 만족스럽게 나온다고 하니, 인고의 시간에서 배어 나온 숙련도가 느껴진다. 작가는 어쩌면 제한적일지 모를 도자의 색을 유리를 통해 확장했다. 기존의 분청에는 없는 색에 유리 특유의 투명함까지 더해져 더욱 매력적이다. 한번은 자신의 전시를 찾아온 독일의 한 유리업체 사장이 자신들의 제품도 한번 시험해보라며 샘플을 보내오기도 했다. 유리마다 투명도, 기름이나 기타 합성물의 유무, 가스발생의 유무까지 다양한 특징들이 존재한다. 작가는 실험을 통해 작업을 컨트롤하지만, 유리의 특성에서 오는 우연적인 효과들도 기꺼이 포용한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4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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