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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월호 | 작가 리뷰 ]

고만경-청송 사기장의 인생이 깃든 백자
  • 편집부
  • 등록 2013-08-30 12:11:13
  • 수정 2013-08-30 1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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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경

Go Man Kyeong

청송 사기장의 인생이 깃든 백자

│김성희 본지기자

일부사진협조 청송백자전수장 안세진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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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의 남단에 위치한 경상북도 청송군의 주왕산은 암벽으로 둘러싸인 산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석병산 또는 주방산이라고도 불리운다. 산세가 깊고 지질이 우수해 여름이면 다양한 동식물이 산속에 가득한 이곳. 길을 달려 주산천이 흐르는 법수마을로 들어서면 산 속 깊은 곳에 백자요장이 자리하고 있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 여름, 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청송백자를 지키고 있는 고만경(84) 도예가를 만나보기 위해 청송백자전수장을 찾았다.

 

생계수단 위해 시작한 도예

청송사기장 고만경은 1930년 12월 29일 청송군 부남면 이현리에서 팔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43년 13세에 무남면 내룡리에 위치한 내룡간이학교에 입학해 1년 6개월간 다니다 중퇴, 15세가 되던 1944년부터 부남면에 위치한 웃화장 도예공방에서 흙 작업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직 해방 전이었던 일제강점기 당시 그가 도자기를 배운 이유는 단순히 많은 식구와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해 입이라도 하나 덜기 위해 서였다. 물레작업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당장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 했던 그에게 도자기란 그냥 평범한 그릇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도예공방 점주(곽명수)의 집에 기거하면서 도자기 제작과 인연을 맺게 됐다. 비록 농사일과 함께 배우긴 했지만 도자기와 관련된 점주의 심부름을 하면서 공방의 형태와 기능, 일하는 사람들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청송백자에 대한 기술을 본격적으로 배운 것은 점주의 권유에 의해서다. 수입이 많았던 도자기 제작 기술을 배우면 앞으로의 생활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당시 물레대장은 경상북도 영덕 진불 출신인 남촌어른이라 불렸던 이규장. 하지만 사기제작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은 없었고 어깨너머로 보고 스스로 터득하며 작업한 것이 전부였다. 과거 청송사기의 경우 민간사기가 대부분이었기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그리 중요하도 않았고 쓰기에 편하고 실용적이면 충분했기에 굳이 예술성을 갖추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잔심부름을 통해 사기제작 기술을 하나하나 익혀나갔다. 질밟기가 끝난 흙꼬막을 나르면서 반죽의 정도를 가늠하기도 했고 대장이 손에 물을 묻혀가면서 흙을 만지는 것을 보고 흙을 다루는 법을 알아 나갔다. 또한 굽깍기를 할 사기를 나르며 적당한 건조정도를 생각했고 칼의 종류와 모양에 따라 굽의 모양도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알았다. 물레작업은 사기대장의 맞은편에서 몰래 목물레 돌리는 발차기 연습을 하면서 어느 정도 익혔다. 그렇게 스스로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그릇을 만들며 조금씩 도자기 제작기술에 대해 알아나갔고 3년 뒤 어느 정도의 사기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1947년, 그는 한소밭골 공방(곽명수 점주)에서 처음 사기대장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고 맏형 고봉경과 함께 직접 공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외국의 산업도자기와 플라스틱 등이 국내에 대량으로 들어오던 시기, 다른 지역 전통도자기와 마찬가지로 청송의 도자기 또한 사람들이 점점 찾지 않으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식기류는 전혀 팔리지 않았고 병과 단지만이 주문에 의해 겨우 조금씩 판매됐다. 결국 그는 사기대장 일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농사와 함께 정미소, 행상, 포장마차, 농막 일 등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고 도자기는 그의 머릿속에서 점점 잊혀져갔다. 그러던 중 과거 문화유산 중 청송백자를 되살리기 위한 청송군의 노력이 시작됐다. 고만경 도예가의 복귀를 위한 주변 도예가들의 노력도 잇따랐다. 결국 2007년 청송백자 복원사업이 이뤄졌고 2년 뒤 청송백자전수장이 자리 잡으면서 고만경 도예가의 작업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역사도 외면한 서민그릇 청송백자를 찾아서

고만경 도예가가 제작하는 청송백자는 청송 지역의 도석을 통해 만들어진다. 도석은 괴상의 형태로 산출, 빻아서 사기제작 원료로 사용한다. 지금이야 기계를 이용해 도석을 갈지만 과거에는 디딤방아를 이용해 도석을 빻아 사용했다. 때문에 작업하는데 있어 늘 흙이 부족했고 흙을 아끼기 위해 큰 기물보다는 작은 기물을 먼저 만들었다. 수비, 건조를 거친 도석은 도자기 제작을 위한 도토로 만들어지는데 밀가루와 같은 순백색으로 보통의 백자토에 비해 많이 하얀 편이다. 이후 성형작업에 용이하도록 질밟기로 점도를 높이고 물레를 통해 다양한 식기로 제작한다. 건조된 그릇의 표면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데 복잡하지 않은 간단한 무늬만을 새겨낸다. 본래 청송백자는 대부분이 일반인들을 위한 식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화려한 문양은 사용하지 않았다. 건조된 기물에는 각각 유약이 발라내는데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광물질이 유약으로 사용된다. 가마번조작업은 재벌 없이 단벌로 구워지는 것이 특징. 입구에 나무를 가득 채운 다음 불을 지핀 후 연료를 더 넣지 않고 나무가 다 타면 창불로 조절하며 한 번에 번조를 마친다.

이런 고유한 특징을 가진 도자기지만 청송백자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한 자료가 없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은 민간 도자기를 하층문화로 여겨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조선의 웬만한 역사 문헌자료에서도 청송백자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그나마 19세기 초반에 저술된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에서 청송백자를 처음으로 청송지역의 특산물이라고 기록할 정도다. 이후 청송백자 생산에 대한 기록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편찬한 『조선산업지』에 청송군 내 3개 마을에 가마 수는 4개로 1년간 생산액을 500원으로 적었다는 기록이 있다. 청송군은 2005년 옛 문헌 등을 바탕으로 청송백자 가마터 지표 조사연구를 실시하기 시작, 연구 결과 청송군 내 36개소에 48개의 백자 가마를 찾았고 시기적으로 16세기부터 청송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를 토대로 과거 주막으로 사용되었던 건물과 광산사무실을 원형대로 복원했고 도석을 캤던 광산 주변에 청송백자전수장을 만들었다.

 

 

청송백자 작업을 위해 불태워 나갈 마지막 혼

청송백자는 흙 대신 도석이라는 돌을 빻아 만들어, 다른 도자기에 비해 기벽이 얇고 가벼운데다 설백색의 흰색이 특징이다. 산간오지인 청송 지역의 특성상 유통조건이 매우 열악해 과거 보부상 같은 상인들이 등짐으로 그릇을 운반하다 보니 지역의 사기장들은 무게에 상당히 민감했다. 하지만 일반 백토에 점력이 약한 청송의 도토는 얇고 큰 기물을 만드는 데 있어 쉽지가 않다. 고만경은 “처음 사기대장으로 일 할 당시 영덕옹기공장에서 한 옹기장이 찾아온 적이 있어요. 옹기장으로 오랫동안 일을 해왔다며 그릇을 빚어 보겠다 했지만 제대로 만들지는 못했어요. 청송 흙은 명주고름같이 보드라운데 잘못하면 뭉개지고 말거든요. 대장하려고 왔다가 그 사람 아주 애먹었어요”라며 과거의 일화를 통해 청송백자제작의 어려움을 말한다. 비록 오랜 경험을 가진 도예가라도 청송 흙이 가진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제작에 있어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만경은 앞으로 청송백자 작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 혼을 불태우려 한다. 청송 지역에 마지막 남은 사기대장인 만큼 함께하는 제자들에게도 청송백자 기술에 대한 모든 것을 전수하겠다고 한다. “지난날 사기대장으로 독립해 좌절을 겪으면서 기능적으로, 인격적으로 원숙한 장인의 경지가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스스로 절감했다”고 말하는 고만경 사기장. 그가 빚는 청송백자는 이제는 평범한 그릇이 아닌 진정한 예술품이자 남은 고독한 여생에 대한 꼭 이루고 싶은 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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