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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월호 | 작가 리뷰 ]

이수종-청담에 뜬 달
  • 편집부
  • 등록 2013-08-30 12:07:51
  • 수정 2013-08-30 1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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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종

Ree Soo Jong

청담에 뜬 달

│지종진 지앤아트스페이스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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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백자달항아리」의 출현

지난 6월 18일 이수종의 개인전6.18~9.15 지앤아트스페이스이 열렸다. 이번 전시는 한국현대도예 역사의 산 증인으로 걸어온 작가 이수종의 47년 도예인생을 되돌아보며 감춰진 그의 진면목을 재조명하고 도자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기 위해 마련된 전시다. 근작에서 더욱 호방해진 기존의 분청사기 작업은 물론 전통의 맥을 이음과 동시에 이 시대 현대도자의 새로운 전형을 일구어낸 백자 달항아리, 원초적 에너지와 절제된 감성을 보여주는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의 작업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특히 그 중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이는 두 작품에 주목하게 되는데, 두 개의 커다란 사발을 서로 이어 붙일 때 발생되는 흙물이장·泥漿·slip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와 완성된 「백자달항아리」와 용이 그려진 「철화백자용문달항아리」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처음 본 느낌이 참 특이했다. 그 동안 「백자달항아리」는 수도 없이 많이 봐왔지만 이런 정체 모를 「백자달항아리」는 난생 처음이다. 분명히 우리 고유의 정서가 듬뿍 담긴 정통적이고 전통적인 느낌은 흐르는데 결코 토속적인 맛은 아니다. 시골보다는 전원이란 단어가 또 도회적이란 단어가 어딘지 잘 어울리고 민속공예적이라 하는 것보다 왠지 예술적이라고 하는 어감이 훨씬 잘 어울린다. 여하튼 처음 만나 살펴본 첫인상은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떤 「백자달항아리」보다도 현대적 감성이 물씬 느껴진다는 점이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하나하나 파고들며 살펴보니 완벽한 구체에 가까운 형태와 크기로 달의 형상을 닮아 있는 달항아리는 분명하나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가는 선 하나가 달항아리의 중앙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그렇다면 바로 이 희미하고 가느다란 한줄기의 선 하나가 이토록 다른 개념의 달항아리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란 말인가?

두 개의 커다란 사발을 마주보고 포개놓은 것처럼 보이는 이 새로운 「백자달항아리」는 제작과정의 특성상 상하가 나뉘어져 한 덩어리의 기물로 만들어지는 단계를 굳이 다듬어 감추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대로 남겨둔 채 분청토와는 또 다른 백자토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흙의 물성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그 이음새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발의 무게와 소성 과정에 의한 태토의 수축으로 인해 원래의 표면보다 아주 살짝 안으로 오그라져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장 배가 부른 가운데 부분이 마치 어떤 띠와도 같은 것을 두른 듯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우둘투둘한 이음새 부분은 표면에 발려진 투명한 백자유약과 함께 자기질화되어 전혀 새로운 빛을 띤 「백자달항아리」로 탄생하게 된다. 결국 작가 이수종은 이제까지 보여준 자신의 분청사기 작업에서의 자유분방함과 파격의 이미지를 「백자달항아리」 작업에 와서도 범상함을 넘어선 파격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 미완의 「백자달항아리」는 전통의 깊이와 맥은 그대로 이어주면서도 통상적 「백자달항아리」를 뛰어넘어 마치 대지를 품은 듯 고즈넉한 하늘과 바다 그리고 가로지르는 수평선을 연상케 하고 있다. 또 어떻게 놓고 보면 보일 듯 말듯한 지평선처럼 오묘한 원근감과 함께 그 너머에도 세상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여명과도 같은 빛을 뿜어내고 있다. 마치 우주의 블랙홀처럼 빛을 뿜기도 빨아들이기도 하는 아주 얇고 가느다란 선이 그어진 이 「백자달항아리」는 결국 생각의 여지를 남겨둔 풍경화처럼 감상자로 하여금 사유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현대적 감성의 ´수트(?)´를 걸친 「백자달항아리」

이는 작가가 백자 달항아리를 통해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짐작컨대 오랜 세월 동안 청빈한 삶 속에서 흙을 친구로 삼아 구도의 길을 걸어온 지금의 작가가 아니었다면 인위적인 손길로 애써 채우려 하고 다듬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움의 덕은 그로 하여금 비우고 남겨놓게 함으로써 오히려 자연스러운 파격적 시도를 감행하게 한다. 마치 완전한 동그라미가 되면서 더 이상 노래를 할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어 답답해진 이가 빠진 동그라미 우화에서처럼 또 비워진 부분이 있어 숨통이 트이는 우리네 삶처럼, 두 개의 사발을 이어 붙인 자국을 다듬어 완전한 구체를 만들어내는 ‘채움’에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으리라.

이로서 17~8세기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한 장인의 손에 의해 빚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적 미를 대표하던 달항아리는 전통의 계승을 뛰어넘어 모시적삼에서 현대적 감성에 걸맞은 ´수트´로 갈아입고 나온듯한 모습이다.

“나는 더 이상 네가 알던 달항아리가 아니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작품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작품을 통해 기존의 질서에 충격을 던졌듯이 달이라는 형상의 모방을 던져버리고 그저 커다란 백자사발 하나를 다른 하나에 엎어놓은 백자라는 것을 일깨움으로써 일상의 의미 속에 함몰되어있던 달항아리를 깨고 새로운 미학적 가치의 재편성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단지 두 개의 사발을 이어 붙이는 과정에서 슬며시 멈춘 것뿐이거늘 어찌 이렇게 대자연의 기운을 담아낼 수 있는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회화이든 조각이든 아무리 재료가 바뀌고 제작과정과 환경이 바뀐다 해도 꿈틀거리는 그의 본능은 마치 자신이 정한 엄격한 내적 질서에 따라 엑기스를 추출하듯 자연의 기운을 작품 속 본질로 승화시키는 신비스런 재주를 지닌 작가가 바로 이수종이다. 이는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백자 달항아리로 이 시대를 대변하는 백자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고 있으며 조선백자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우리도예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철화백자용문달항아리」

하얀 달항아리의 몸을 휘감아 돌아가고 있는 용그림은 마치 달을 지키는 수호신인양 여의주와도 같은 달항아리의 표면을 견고히 거머잡고 누군가 달을 훔쳐가기라도 할라치면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할퀴기라도 할 기세로 발톱을 잔뜩 세우고 있다. 이제껏 보아오던 구름 속을 날고 있는 전통적인 도예에서 등장하는 용의 모양새는 전혀 아니다. 사실 이제까지 나타난 도예예서의 용그림은 민화적 성격의 그림들로 공예적인 기법으로 그려진 것들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오랜 세월 숙련된 장인의 손끝에서 손끝으로 이어져 내려온 재현의 대상으로 옛 것을 기교적으로 묘사한 용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용들은 제아무리 많은 용을 그린다고 한들 거의 모두 비슷한 모습의 용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이수종 작가의 용은 오직 하나만이 존재한다. 철사의 농담을 적절히 조절하며 속도감 있는 필력으로 거침없이 표현된 이것은 세부적인 묘사는 과감히 생략하고 힘차고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굵은 선으로 달항아리의 몸통을 한 바퀴 돌아가면서 용의 동세를 잡아간다. 그리고 날카로운 도구와 작은 붓을 이용하여 용의 주요한 특징만을 살려낸 그야말로 살아 숨쉬는 기운생동하는 용으로 자신만의 특유한 화법이 담긴 현대적 미감의 「철화백자용문달항아리」로 탄생하게 된다.

사실 이 작품은 여태까지 그의 작업에서 보여주었던 그림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가 분청작업에서 보여주었던 그림들은 추상적인 내면의 표현이었는데 비해 비록 상상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구체적인 형태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이례적이다. 지금까지의 전 작업을 통틀어 자연의 대상물인 매화 또는 난초 등을 연상시키는 형상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구체적 형상을 좇은 예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느닷없이 분청에서 백자로의 확장을 도모한 것처럼, 그림에서도 구상까지를 아우르는 전 영역으로 확장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인가? 물론 이 작품 하나만을 가지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작업에 머물러 있기엔 작가 이수종이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의 진면목을 여기서 또 한번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분청사기 하나만 하더라도 평생을 걸어도 오를지 못할 경지이건만 전혀 다른 작업인 백자달항아리를 테마로 자신만의 조형언어가 담긴 담백하고 청아한 달항아리를 만들어 낸다. 이는 작가가 어떠한 경지에 올라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흙과 함께한 구도의 길에서 얻은 깨달음에 연유하고 있음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도예가로 살아온 일생 동안 흙과 불을 기법적으로 자유자재로 다루는 단계를 뛰어넘어 이들과 함께 자유로이 노니는 경지를 터득했음이요, 흙을 통해 하늘과 땅에 닿고 자연에 내재한 질서와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하기에 전방위 어떤 작업에서라도 억지로 이루고자 하지 않고 자신을 내려놓아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언어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만일 오백 년쯤 지난 후대에 이 작품이 어디선가 출토된다면? 이 작품이 이수종이란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알 수 있을까? 갑작스럽고 아주 짧은 동안이지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만약 작가가 더 이상의 용그림 백자를 만들지 않는다면 이후로도 이런 작품은 나오기 힘들 것이란 생각이다. 그것은 적어도 아직까지 흙 위에 이토록 거침없고 역동적인 필력으로 활달한 모습의 용을 이처럼 회화적으로 표현한 작가가 이제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안빈낙도하는 흙의 철학자

한국미술계에서 전업작가의 길이란 얼마나 험난하고 외로운 길인가. 미술계의 기형적 구조 속에서 교수=좋은 작가라는 공식이 아직도 통용되기에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정진하려 하기 보다는 교수가 되기 위해 작업하고 전시하는 이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작가는 안정적인 교수직을 박차고 홀연히 전업작가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아마도 그의 천성이 어디에 얽매이고 고여있기를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며, 세상의 명리를 쫓기보다는 세속을 등지고 자연과 벗하여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가운데 오로지 흙과의 치열한 교감으로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관념보다는 노동으로 그만의 철학을 체득하고 이를 작품으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지극한 희열이 세상의 어떤 즐거움보다 강렬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듯 작가는 40여 년의 세월을 흙과 함께 하며 흙의 성정을 배워가고 닮아가며 자연의 도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으며, 이에 더 나아가 잡다한 인간적인 삶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들을 초월하는 달관의 경지에서 욕심 없는 담박한 삶과 작품활동을 즐기고 있다.

무위자연 하니, 청담淸談에 달이 뜨다

도예는 흙을 재료로 한다. 흙이란 재료는 다른 어떤 장르의 예술에서 사용하는 재료보다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에 가까우며 제작의 과정에서 여타의 도구를 거치지 않고 신체와 직접 접촉하게 된다. 흙을 만지고 사는 도예가는 그렇게 자연과 직접 교감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며, 도는 자연을 따른다고 했다. 흙을 만지고 주무르고 물레를 차는 동안 작가는 오롯이 흙과 단둘만의 대화를 나누고 교분을 한다. 수많은 시간을 흙과 대화하는 가운데 흙의 물성을 이해하고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작가 이수종은 그렇게 흙과 함께 평생을 살아오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흙이 말하는 것을 담담히 듣고 그 목소리를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작품으로 나오는 것들은 인간의 손끝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려한 것이 아니라 얼핏 보면 아무렇게나 대충 만들다가 만듯한 미완성 상태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성인무적聖人無積한다고 한다. 덕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쌓지 않고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운다는 것. 작가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작업은 그야말로 청담淸淡한 마음으로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의 연속이며 그 결과 작품은 자신의 오랜 친구와 물아일체를 이루고 자신을 비운 무아지경의 경지에서 보여주는 무위자연의 산물로 나타난다.

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미학이란 인위적으로 억지로 함이 없이 꾸밈없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상태에서 잡다한 세속의 욕심을 벗어두고 자신을 버리고 비워낸 무심의 경지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뜻. 이수종은 이미 자신이 다루는 재료인 흙과 유약 그리고 소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자재로 흙과 대화하며 자연의 이치를 몸소 깨닫고 있는 작가이기에 억지가 아닌 농부가 철에 따라 농사를 짓듯 작업에 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인 기법과 내적인 철학이 담긴 작품은 언제나 그의 손끝을 통해 담겨 완성된다. 번잡한 세속의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이 맑은 숨결만이 흐르는 멈춰선 듯한 시간. 세한도歲寒圖에 나오는 정갈한 초옥과도 같은 그의 작업실에는 세속을 멀리하고 정신적 자유로움을 얘기하던 죽림의 일곱 현자들이 맑은 술을 마주한 채 맑은 이야기에 한창이다. 그 사이 작가가 빚었는지 자연이 빚었는지 모를 투명한 달이 청담淸談의 시공으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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