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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월호 | 작가 리뷰 ]

해강청자, 새로운 이상을 찾아서-유광열
  • 편집부
  • 등록 2013-03-06 10:43:06
  • 수정 2013-03-07 09: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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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강청자海剛靑磁는 우리 근현대 도자의 흐름에서 근간을 차지하여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이전의 근대기는 물론 해방과 전란 이후 산업화기간 우리 사회의 변화의 소용돌이와 함께 해강청자 역시 변화의 중심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평가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 된다. 이제 해강청자는 일제강점기 20세기전반 제1, 전란 이후 산업화시기 20세기후반 제2기를 지나 현대화 21세기 제3기를 맞으면서 시대적인 변화 요구에 직면한지 십 여 년이 지나고 있다. 21세기 시대정신이 해강청자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21세기다운 해강청자일 것이다. 주변 모든 상황의 변화 속에서 해강만이 20세기에 남겨져 있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993년 백수白壽의 일대 해강옹海剛翁 이후 이대二代 해강海剛을 향한 변화의 요구를 그는 2007년 첫 개인전 작품을 통해 답하였다. 당시 개인전 도록에는 전통의 계승과 변화에 대한 압박감을 ‘작가의 후기’를 통해 솔직히 토로하고 있다. 그는 첫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두려움이 앞선다 하며, “가장 큰 고민거리는, 옛 것을 재현하면 모방이라고 폄하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면 국적불명이라 비판한다. (그리고) 형태와 장식에서 시대를 넘나들면 잡탕기법이라고 한다.”는 세간에 평가였다. 이러한 사회일반의 평가는 전승과 전통의 계승을 이상으로 하는 모든 조형예술분야에서 너 나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당면 과제이다. 어느 누구도 구체적이며 가시적 모델을 제안 할 수 없는 길이면서 모든 책임과 질타는 제작자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해강청자의 제3기를 위한 준비는 사실 일찍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2기의 후반을 지나면서 옛 상감청자를 이상으로 여겼던 제1기와 제2기에서부터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그의 생각은 해강청자를 중심에 둔 다양한 탐구와 실험의식의 실천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전승과 답습의 청자에서 원본인 고려시대청자를 직접 연구하고 수집함으로서 생생한 시각과 촉각을 통한 미적체험을 축적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실천방법이었다. 이어 현실세계와 적응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세계 도자선진문화를 접촉하면서 창조적인 도예가들과 긴밀한 교유를 맺는 것 역시 해강청자의 폭을 넓히는 계획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한다. 21세기를 향한 미지의 해강청자를 중심에 둔 이러한 일정한 계승과 창작의 조화를 향한 이대二代 해강海剛의 일관된 의지는 이번 七旬을 맞는 제2회 개인전유광열 고희기념전 2012.00.00~00.00 000갤러리에 잘 나타나고 있다.

지난 제1회 개인전 작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몇 차례 보았듯이 이번 제2회 작품도 지켜 볼 기회를 가졌었다. 처음에는 청자의 극한에 도전하기 위한 시도 같이 보였으나 입체조형이 조정되는 과정에서 극적인 요소들이 완화되고 정제되면서 규모는 크지만 단정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고려청자와 해강청자에 전유물이다시피 한 삼차원의 세계는 변화와 정제 과정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형태는 규모를 크게 확대함으로서 옛 청자다운 모습에서 현대성을 암시하는 모습으로 더 가까이 접근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렇게 고려청자와 해강청자에 있던 각각의 조형요소들을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한편 규격을 확대함으로써 얻어진 조형들이 전에 본 적 없던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평면을 처리한 표현기법에서도 전에 있던 청자와 다른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배경 상감문양의 고밀도화高密度化는 물론 대범하게 포치布置한 낮은 부조浮彫로 새겨 올린 윤곽선의 처리는 문양과 문양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전체로부터 생동감을 느끼게 하면서 정적인 분위기를 율동적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상감 모란당초牡丹唐草의 선은 소문素文의 양각 면과 운학雲鶴 무늬와 함께 균형을 유지하면서 평면조형을 한 차원 더 높였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옛 상감청자의 정적을 깨고 현대의 다양함과 조화 속으로 이끌어내려는 노력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해강청자를 상징해 왔던 고밀도의 당초문 위에, 문양 소재를 극적으로 확대하여 전면에 과감하게 펴 놓고 그의 외곽을 저부조低浮彫 기법으로 새겨 한 층 떠 올린 후,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문양패턴을 오려내어 삽입시키는 극적으로 계획하고 구조화시킨 조직적이며 치밀한 계획에서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고려상감청자」와 일대一代 해강海剛청자, 그리고 이대二代 해강海剛을 포함하는 세 계통의 조형요소들이 마치 끈임 없이 오버랩 되면서 순환하고 있는 무대의 배경과 같은 관계를 연출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아마도 이 셋, 크게는 같지만 작게는 각각 다른 세 인격체들의 조화와 융합 이대二代 해강海剛 그의 목표인지, 아니면 이 셋이 서로 끈이지 않고 순환하면서 나타내는 활기찬 움직임인지를 가늠하는 일은 아직 이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옛 상감청자와 일대해강을 그대로 이어나가려는 계승의 정신 위에 새로운 이대해강의 표현의지를 조화시키는 방향은 아직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해강옹海剛翁이 조각칼을 놓은 후 이십년 되는 해이며 이대二代 해강海剛이 칠순七旬을 맞는 해이다. 도예가로서 칠순은 기량을 닦고 연마하여 선수장善手匠에 들어서는 나이임에 틀림없다. 이 해방解放과 전후戰後에 두 번째 해강청자를 펼치면서 한국도자 발전에 견인 역을 했던 시기도 칠순을 전후한 시기였다는 기억이 새삼스럽게 되살아난다. 조선시대 최고 최대의 백자를 만들었던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을 주제로 한 시에는, “… 칠십노인의 성은 박씨인데 그 안(사옹원분원 사기장沙器匠들 가운데)에서 선수장으로 불린다네.(이하곤李夏坤(1677-1724), 『두타초頭陀草』에서)라는 도예가라면 마음 깊이 새겨 두어야 할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다. 칠십 세에 이르는 오랜 경륜과 기량을 닦은 후에야 비로서 선수장善手匠으로 도예가로 평가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제 전승과 재현의 100년이 지나고 있다. 그 말미에 해강옹海岡翁이 은밀하게 일탈의 모습을 내 비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21세기 정서에 어울리게 할 새로운 청자를 향하는 변화의 서곡을 거부하는 백수노인白壽老人의 고집 뒷면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숨겨놓은 호기심에 찬 익살스런 변화의 모습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해강옹海剛翁의 손끝으로 새겨 넣은 일탈과 변화의 정신은 이대二代 해강海剛 유광열柳光烈에게 그대로 계승되는 것 같다. 물론 옹 이후 20, 두 번째 개인전 작품에서 변화와 벗어남은 고려청자와 해강청자로부터 변화하려는 시간으로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그 벗어남이 변화의 완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신호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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