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김효진 본지기자
“호롱불은 꼭 그림자가 사방에 생겼다. 아이들은 손가락을 이용해 벽에 개, 여우, 나비, 도깨비, 주전자 등의 그림자를 만들어 놀았다. 지금은 간접조명에 삼파장 스탠드가 방마다 밝혀주는 그림자가 없는 시대이다. (중략) 너무 밝고 많은 빛은 그림자를 잡아먹는가? 어둠과 그림자와 빛의 의미를 모르는 신세대들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김종태 『옛 것에 대한 그리움』중에서
지금은 전기로 인해 사라진 호롱불. 옛적 어머니들은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아이들은 책을 읽었다. 어두컴컴한 길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멀리 보이는 흔들리지만 또렷이 보이는 불빛은 어두운 밤바다의 등대처럼 오는 이를 인도해주었다. 어린시절 호롱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작가 나용환(51)은 옛 정취를 떠오르게 하는 호롱을 전통과 현대적 미감을 지닌 작품으로 승화시켜간다.
호롱, 인생의 등대가 되다
나용환은 도예를 시작한 이후 생활자기 또는 다기를 주로 만들어왔다. 커피잔, 국그릇, 밥그릇 등을 상품화시키고 팔기 쉬운 것들을 제작했고, 2000년부터는 국내 차문화 발전에 발맞춰 다완을 집중적으로 만들었다. 어느 정도 도예가로서 입지를 다져갈 즈음, 문득 허전함을 느꼈다. 자신의 창의력,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어떤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전통적인 색깔을 유지하고 상품으로써 가치가 있되,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작품, 호롱 제작은 그렇게 시작됐다. 2005년도부터 시작한 호롱제작은 끊임없는 과정을 거쳐 점차 발전해 나갔다. 한국의 미를 살리며 실용성을 갖춘 호롱을 만들기 위해 유약실험과 기법의 변화 등 수많은 시도를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2006년 <경기도공예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등잔」이다. 당시 이 작품은 ‘서민적인 이미지의 분청자기로 다양한 전통상감문양을 잘 표현했다. 특히 대량생산이 용이하고 가격도 저렴해 공예품대전 개최목적에 부합한 수작’이라는 평을 받으며 당당히 대상에 선정됐다. 이것을 계기로 호롱작품제작에 더 매진하게 된다. 그토록 원하던 그만의 색을 지닌 작품의 형상을 찾은 것이다.
도자기파편과의 인연
나용환의 고향은 전라남도 장성이다. 유년시절 집 마당이나, 밭을 거닐다 보면 도자기 파편이 곳곳에 있었다. 청자뿐만이 아니라 분청, 토기, 기와 등 다양한 도자기 파편을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이 도자기와의 첫 인연이었다. 당시 야산에서 개간을 할땐 완성품도 많이 출토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도자기를 모으곤 했고, 그때 모은 도자기들은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단순히 땅에서 나온 오래된 조각들이었지만 거기엔 알 수 없는 묘한 끌림이 있었다. 유년시절이 지나 도자기를 잊고 살 때 쯤, 경기도 이천 근처에서 군생활을 하게 됐다. 군훈련 일정에 따라 여주나 이천을 방문하며 전통가마나 도자기를 접하게 됐다. 도자기와의 두 번째 인연이다. 그리고 26세가 되던 해, 군제대후 주저함 없이 도예가로 살기로 결정했다. 고향을 떠나 이천에서 도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광주 도원요의 지당 박부원 선생 아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3년간 선생의 작업을 도우면서 무엇보다 분청에 대한 기법을 많이 익혔으며, 도예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쌓을 수 있었다. 이후 1995년 신금면 이누리에서 개인작업장을 마련했고, 1997년에 현재 작업장으로 옮기게 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결국 유년시절 도자기 파편과의 인연이 그의 인생의 길을 이끌게 된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미가 조화된 호롱
호롱은 특히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작가는 “사실 호롱이 이렇게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을지 예상치 못했습니다. 제 작품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을 보며 느낀 점은 백자나 청자도 좋아하지만, 분청의 한국적인 느낌을 더 매력적으로 받아드린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점을 살려 작품 속에 한국의 미를 살리기 위해 고심한다. 초창기 만들었던 「등잔」작품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물레성형뒤, 전통적 방법인 백상감과 덤벙기법, 박지기법을 사용했다. 기존의 등잔에는 다리가 없지만, 굽을 한옥의 다포에서 영감을 받아, 예술성이 돋보이는 장식을 했다. 촛대의 장식은 신라 금관장식의 옥모양으로 만들었다. “한복이나 한옥에서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옛 선조들의 유물이나 물품, 생활을 보면 디자인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곤 합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한국전통의 미를 살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최근에는 현대적인 미를 그 안에 담아내길 원한다. 지난 <제6회청주공예문화상품대전>에서 수상한 「전통문양을 활용한 호롱」은 그러한 시도 끝에 완성된 작품이다. 사각의 형태에 친근한 새, 꽃, 이파리 모양이 그려진 호롱은 잘 다듬어진 색감과 형태로 전통과 현대의 절묘한 조합을 느껴지게 한다. 네모난 호롱은 약 1년 전부터 시작했다. 사각모양은 구성을 다양하게 선보일 수 있겠다 싶어 선택했다. 더불어 석고작업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현대적 감각을 높이고자 했다. 석고작업으로 인한 공산품 같은 느낌은 기법으로 보완했다. 성형된 기물위에 옹기토를 바른 뒤 덤벙을 흘리고 간단한 조각, 또는 그림을 손으로 그렸다. 동양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문인화를 직접 배워 그림의 완성도도 높였다. 유약으로 천목을 사용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발전된 유약이지만 그가 생각하는 기물의 이미지를 잘 표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작품은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금이나 은으로 장식을 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 기물의 이미지를 실현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꼈다. 고정된 것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찾아야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재밌다는 자신의 지론을 스스로 증명해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만드는 호롱의 상품적 가치를 더해가게 만드는 한 요인이다.
호롱의 국제적 상품화를 위한 노력
도예가 나용환은 “저는 생산자지만 제 작품을 가지고 간 사람이 애지중지하면서 예뻐할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상품화과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사람의 입장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호롱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용하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고 마음의 위안을 주는 작품, 자주사용하면서 잔잔한 감흥을 줄 수 있는 작품, 문화와 나라, 세대를 떠나서 공감하고 즐겨사용하는 작품이 바로 호롱이었던 것이다. 이전 세대들에게는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전기가 아닌 아날로그의 새로운 느낌, 체험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그는 호롱을 국제적인 상품으로써 발전 시켜나갈 계획이다. 환경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도자기상품이 한국의 대표적 문화관광상품이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저가 상품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네 관광문화상품 속에서 역사성을 지닌 한국도자기는 커다란 가능성을 가진 매체이다. 한국적이면서도 문화를 뛰어넘는 공용성이 있고, 현대의 생활방식과도 어울리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끄는 도자상품이라면 충분히 국제적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국제적 명품도자상품의 실현이 멀게만보이지만, 그 비전을 향해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나아갈 것이라는 작가 나용환. 그가 만들어가는 호롱의 불빛 속에서, 그리고 그 안의 흔들리지 않고 존재하는 작품을 향한 신념이 그 가능성을 조금 더 가깝게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