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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7월호 | 작가 리뷰 ]

KIM YOUNG YOON 김용윤
  • 편집부
  • 등록 2011-09-05 11:58:24
  • 수정 2011-09-07 09: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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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분청자粉靑瓷의 미학

김병수

미술평론가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현대 도예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코스모폴리탄하게 작업하는 예술가들과 토착적 방식에 치중하는 경우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김용윤의 현대 도예는 자신의 커뮤니티와 문화에 대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보다 넓고 보편적인 세계의 일원이 되겠다는 의지에 대한 표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예술적 민족주의는 과격한 배타성으로 인해 기형적이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갖는 유용성 또한 부인하기는 어렵다. 현재에도 소멸하는 언어들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일상생활과 밀접한 전통도예가 비일상적이게 된다는 것은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김용윤의 작업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여전히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에토스에 천착하면서도 세계 공통의 상상력을 자신의 작품에 담으려 애쓰기 때문이다. 그것들과의 미적 체험 속에서 우리는 존재의 심연, 혹은 어떤 시원성primitiveness에 가서 닿는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썼다. “인제는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데가 내 고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서 어떻게 앉아 있어도 쓸쓸하지가 않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몹시 쓸쓸하다.” 우리의 조형 어법을 대할 때 우리는 아주 당연시하면서도 동시에 낯설어한다. 가장 한국적인 미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분청자를 보는 경우에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난다. 조선시대 분청자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세계를 지니고 있는데 김용윤의 도예 미학은 거기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는 스스로 밝히기를 “분청사기에 관한 책을 제외하고는 요즘 잘 안봐요. 자꾸 딴 거를 흉내낼까봐서!” 라고 했다. 김용윤과 분청자의 관계는 불가분적이다. 분청사기粉靑沙器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분청자라는 이름은 한국미학과 미술사학의 태두인 고유섭 선생이 1940년대 개성박물관에 재직할 당시 부여한 명칭이다. 백자와 청자의 미적 특질과는 다른 분청자의 미학에 대하여 오해 혹은 편견이 있다. 전자를 귀족적이라면 후자를 서민적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러한 용어들은 일견 편할 수도 있으나 지극히 전근대적일뿐만 아니라 미적 술어로써 정당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족주의적 미학의 근거로서 분청자가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하는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할 때 한국의 근대미술사학은 분청자를 제시했다. 거기에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청자를 얘기할 때 ‘한국적’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종의 순환논법이다. 그때 등장하는 술어들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청자가 갖는 깔끔하고 이지적인 느낌에서 벗어나 ‘형태가 수더분하고, 마치 숭늉 맛처럼 구수하다’는 것이다. 전자가 명사적 판단이라면 후자는 형용사적 수사이다. 그래서 분청자에는 “마치 뚝배기에 끓여 놓은 된장 맛처럼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맛이 담겨져 있다”고 하는데 이런 부분들은 앞으로도 계속 강조될 것이다. 이에 대한 논구는 다른 차원을 필요로 한다. 수사학에서 미학에로의 전환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요청이다. 그리고 김용윤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이와는 다른 루트를 찾아야하는데 그의 출발지점인 분청자에 대한 미적 판단과 지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여기서, 우선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김용윤의 도예는 세련되고 섬세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조각으로서 현대 도예를 보여줄 때 드러내는 감각과 정치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분청자에 대한 어떤 판단과 선택에 대한 사태를 보면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분청자는 조형적으로 이미 모던한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많은 경우 형태와 문양에서 박진감이 넘치고 자유분방함을 느끼게 한다. 또 분청자의 무늬는 활달하고 민예적인 것이 특색인데, 특히 무늬의 재구성과 추상적인 변형은 조선시대 도공들의 예술적인 탁월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분청자가 갖는 중요한 미적 속성은 유머이다. 이러한 분청자의 미적 속성들에 대한 김용윤의 판단은 일종의 지성이다. 지성은 자신의 내적 선택이고 결단이다. 과학적인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고스란히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하는 고독의 윤리학이다. 예술가로서 짊어지는 운명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했다. “흙을 개고, 빚고 불을 가마에 지필 때까지만 좋아요. 가마를 열고나면  그저 죽고 싶어요.” 처연한 몰락의 에티카이다.
분청자에 대한 미적 모양새나 느낌을 기술하기 위해 적용되는 형용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는 김용윤은 결단과 연마를 통해 명사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미적 술어로 가득한 판단들에게 새로운 체계 혹은 계열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는 스타일리스트이다. 고전주의자 혹은 전통주의자와는 궤를 달리한다는 의미이다. 미학은 경험에 관한 것이다. 그의 모든 도예 작업이 창조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경험은 누군가의 경험과 비슷할 수 있지만 비슷할 뿐이다. 그것은 그만의 것이므로 동일한 것일 수 없다. 그의 미학은 미술사학적/공동체적/문화적 특징을 타자와 공유할 수 있지만 그만의 경험으로 인해 구별된다. 예술가로서 김용윤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에 대하여 중심적인 것으로 분청자에 대한 자신만의 미적 경험을 취하기 때문에 경험의 형식 또한 중심적이 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그 경험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형상은 창조적일 수도 있고, 반복적일 수도 있다. 창조적일 때 이는 경험에 새로운 형식을 부여하고 도예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그렇다면 김용윤의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스타일이란 그의 도예작품의 속성으로, 혹은 도예가로서 그만의 특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월문리에서」연작과 「자연의 소리」연작이 특정한 스타일을 가진다거나, 도예에서 분청자의 스타일에 대한 복잡한 변이를 특징으로 한다고, 또 그냥 김용윤은 그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때 스타일은 우리로 하여금 김용윤의 스타일을 다른 것과 구별해주는 형식적 속성과, 특징적인 스타일에 속하는 특징적인 내용에 주목하도록 한다. 스타일은 작품의 속성이면서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에게까지 확장해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색채와 같은 단일한 속성이 아니다. 전체의 패턴으로 그것은 게슈탈트 속성이라고 한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7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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