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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월호 | 작가 리뷰 ]

착시의 캐스팅 리차드 쇼Richard Shaw의 예술세계
  • 편집부
  • 등록 2011-08-29 11:07:04
  • 수정 2011-08-29 1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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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료제공

최석진

미국리포터

 

필자는 작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 44회 NCECANational Council on Education for the Ceramic Arts 학회에 참가했다. 첫날 프로그램에서 도예가 리챠드 쇼Richard Shaw의 제작시연 일정을 확인했다. 한국과 미국의 많은 도예 서적에서 리챠드 쇼의 작품을 보아왔었고, 특히 본인이 재직하는 학교의 도예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리서치 과제로 주었던 작가이기에 더욱 관심이 있어 이틀간의 제작시연 기간 동안 강당의 맨 앞에 자리를 잡고 참관했다.

 

평소 필자는 쇼의 작품에서 점토를 사용하나 전혀 점토 같아 보이지 않는 치밀하게 마무리된 기술적 성취에 경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장에서 만난 쇼는 이와 더불어 커다란 웃음을 이끌어 내는 선천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작업 시범 내내 즐겁고 편안한 유머와 함께 타인을 배려하는 여유로운 태도에 강당의 앞줄의 필자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의 부드러움에 동화되어 마치 한 반의 친구들처럼 긴장을 풀고 그의 제작 시연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시연이 끝난 후 많은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그의 작업 기법에 관해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하기도 했고, 여러 사람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도 성의껏 대답하는 그의 태도가 참 보기 좋았다. 이틀간의 제작시연이 끝난 후 필자는 그를 직접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해리슨 버그의 집으로 돌아와서 쇼로부터 그의 작품집 팜플렛을 받기도 했다. 쇼는 작년 1월 29일부터 5월 30일까지 소노마 카운티 박물관Sonoma County Museum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대규모의 작품전 <리챠드 쇼: 40여 년간의 도예>를 전시했다. 다음 내용은 그의 팜플렛에 게재된 소노마 주립대학교Sonoma State University 미술사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마이클 슈웨이거Michael Schwager가 쓴 쇼의 작품세계에 대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만일 가수 고 제임스 브라운이 ‘쇼 비즈니스 분야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작의 작가이며 다재 다능한 음악가 그리고 영감을 주는 선생님이자 가정에 헌신하는, 관대한 친구이자 동료인 리챠드 쇼는 베이 지역에서 가장 열심히 작업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이며 전문적인 분야 모두에서 그의 에너지는 전설적이다. 그는 자택이 위치한 마린 카운티 fairfax에서 버클리 대학 내 자신의 사무실까지 자전거로 이동하며 그의 작업실에서는 마라톤과 같은 긴 시간을 보낸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선생, 멘토, 학생의 세대를 지냈으며 전역의 갤러리, 박물관, 대학에서 정기적으로 전시와 강의를 해왔다.(그 중에서도 똑같이 전설적인, ‘스튜디오 13 재즈 밴드’와 같은 정기적인 음악회는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가장 사랑받는 사람들 중 하나인데, 이것은 만약 그의 학생들, 미술과 관련된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이전의 교수들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쇼가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 재학할 당시 그의 첫 스승 중 한사람인 론 네이글은 쇼를 가리켜 ‘미술계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1)

그러나 명확히 리챠드 쇼를 국내외 현대 도예계에서 가장 존경 받으며 자제심이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일상의 사물을 정확히 모방해 만드는 놀라운 도예 조각들과 그의 열심히 일하는 작업관, 특별한 에너지 그리고 비범한 기술적 솜씨 때문일 것이다. 쇼는 그의 일상용품들과 쉽게 지나치게 되는 물건, 녹슨 페인트통, 다 쓴 연필, 수채화물감, 카드, 담배케이스 그리고 가끔은 담배들 등을 이용해 복잡한 과정이지만 석고몰드와 자기질 슬립, 스크린으로 프린트한 전사지 그리고 유약을 통해 아름답고, 유머스러운 또한 날카롭고, 기술적으로 놀라운 것으로 변화시킨다. 쇼의 조각, 오브제들에서 착시를 일으키기 위해 트롱프 뢰우(불어로 눈의 속임)의 전통적인 방법을 도입하는 이런 변형은 오브제들에 실제로 들어있는 순수하게 점토만으로 만들어진다.

쇼의 ‘트롱프 뢰우’의 사용 - 관람객이 그의 조각작품들의 하나와 첫 번째 마주 할 때의 매혹적 효과 - 은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한 부분, 리챠드 쇼에 의하면, “일상용품을 다루고 그것들을 예술로 만드는 방법으로서 단순히 슬쩍 다가가는”2) 한 부분에 불과하다. 리챠드 쇼의 착시에 대한 뛰어난 전문적 기법과 똑같이 중요한 것은 그의 조각이 함유하고 있는 평범한 오브제들의 혼합 뒤에 내재된 이야기들이다. 쇼의 과거 스승이며 베이 지역 도예 작가의 고참인 제임스 멀쳐트는 “리챠드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 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는 오브제들의 내면 생활 - 역사를 거슬러 올라 -에 흥미를 갖는다.”3)

그의 어린 시절 자라온 환경을 생각해 본다면, 쇼가 예술가 또는 -보다 정확하게- 자신의 작업에서 스토리의 힌트를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그는 그 스토리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말하며 실마리나, 뒤에서의 조언, 질문 등을 제공한다고 말한다.4)
그는 1941년도 할리우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캐티는, 많은 업적 가운데 하나인, 유명한 잡지 개그 만화가인 버질 파취가 경력을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왔던 예술가였다. 그의 아버지 딕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작업실에서 일했던 만화가였고 후에 ‘미스터 마구’의 캐릭터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의 부모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다닐 때 만났다.(놀랍게도 그의 부인 마사의 부모도 모두 그곳의 학생이었고 마사의 할아버지는 실물 드로잉을 가르쳤었다.) 이러한 어린시절 환경의 영향으로 쇼는 고등학교 재학당시 영화 제작으로 그의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그는 친구들에게 ‘세실 비 쇼’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졌다.) 이후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미술사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학교 자습실에 있을 때 Art in America의 열렬한 독자가 되기도 했다. 쇼는 결국 영화제작은 그의 재료가 아니고 또한 만화 제작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는 순수예술이 본인을 마법처럼 끌어당긴 것을 되내이며 ‘진지한 예술가’ 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다.  

도예를 하기 전 쇼는 화가였다. 그는 존 하벌1856-1933 그리고 윌리엄 하넷1848-1892과 같은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뿐만 아니라 엘머 비숍1916-1991, 리챠드 다이벤컨1922-1993, 네이든 올리비에라b.1928 그리고 데이비드 파크1911-1960와 같은 20세기 전반 유럽의 초현실주의로부터 베이지역 구상주의작가들까지 초기의 영감을 주는 작가들을 인용한다. 하벌과 하넷의 트롱프 뢰우 정물화의 반향은 Warren Walter, William(1981)에서와 같이 그의 걸어가는 상에서 발견되는 기대하지 못했던 뜻밖의 조합들과 결론이 없는 초현실주의의 어두운 유머 등을 보여주며, Vanitas with Artist’s Sketchbook (2004)을 포함한 쇼의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 보여지고 있다. 쇼의 화가로서의 뿌리와 그의 회화에 대한 계속된 사랑에 대한 관련성은 「Still Life with Apples and Palette」(2005)와 「Palette Bottle with Mustard」(2009)에서와 같이 스케치북과 페인트튜브 그리고 수채화 쟁반같은 것을 같이 사용하는 수많은 조각 작품들에서 보여진다.

쇼는 자신과 그의 부인 마사가 캘리포니아주 코스타 메사의 오렌지 코스트 대학의 학생이었을 당시 점토를 예술의 재료로 처음 발견하기 시작했으나 그가 1963년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SFAI)에 등록할 때만 해도 화가로 남아있었다. 이후 그는 멀쳐트와 네이글의 지도아래 도예 분야에서 더욱 빈번히 작업하기 시작했고, 결국 점토를 그의 최우선의 재료로 생각하기 시작했다.(이와 함께 그가 한번도 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 로스엔젤레스에서 활동하는 도예가 켄 프라이스와 점토를 사용하는 베이 지역의 많은 다른 작가들도 쇼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언급 되어야 한다.) 또한 그 당시는 자신의 인생에서 “작품의 아이디어 -보통의 물건들, 민속예술- 를 찾아 어디든 다니며”, 그의 스승들이 보여주는 슬라이드에서 영감을 발견했고, 똑같은 존경과 흥미를 가진 자연으로부터 비서구적이고 유럽풍의 예술 또한 이미지들을 다루는데 그 자원에서 가치 구분의 명백한 부족을 발견했었던 시기였다. 대학에서 스승들로부터 영향받은 이런 태도는 완고한 주의의 현대미술 장르 중 현대 해프닝, 행위예술, 그리고 개념예술을 포함하는 보다 열린 형태의 예술을 향해 길을 열어주었던 1960년대의 미술세계에서의 큰 변화를 반영한다. 이때는 어떤 규칙을 파괴하고자 했던 때였는데 쇼는 점토를 사용해서 기술적으로 구조적으로 그리고 미적으로 이것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65년도에 그 대학으로부터 BFA를 받은 후 쇼는 네리(그 당시 데이비스에서 가르치고 있었다)를 따라 당시 혁신적인 교수들과 재능있는 학생들로 잘 알려진 예술 프로그램이었던 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비스에 입학했다. 네리와 더불어 쇼는 윌리엄 티 윌리와 도예 조각가 로버트 아네슨1930-1992로부터 지도 받았다. 아네슨의 재치와 펑키 스타일은 윌리의 시각적이며 문자로 쓰여진 익살과 함께 쇼가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 다닐 때부터 이미 탐구하기 시작했었던 유머의 사용에 영향을 주었다.

1968년도에 캘리포니아대학, 데이비스에서 MFA를 받기 전부터 쇼는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이미 완성도 높은 작업을 만들기 시작했다. 쇼가 탐구해온 첫 번째 주제중의 하나는 ‘매 학기 리더스 다이제스트 버전에 실렸던 타이타닉에 대해 기억해야 할 밤을 읽었던’5) 결과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끊임없이 그려왔던 이미지인 가라앉는 증기선 이었다. 소파 속으로 가라앉는 배는 풍경과 바다의 경치의 환상적인 회화를 위한 배경의 역할을 하고 있는 캔버스의 질감을 가진 소파와 안락의자 연작 작품 중의 절정이었다. 이 이미지는 그의 스틴슨 해변의 작업실로부터 태평양과 화라론 섬의 경치로부터 직접 그려진 것이다.


마이클 슈웨이거Michael Schwager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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