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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5월호 | 나의 작업세계 ]

장수홍 Jahng Soo-Hong
  • 장수홍 도예가
  • 등록 2011-07-12 17:23:55
  • 수정 2024-07-19 13: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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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즐겁게 헤매기 _ 흙과 나무 사이

그 전부터 간간이 목공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작업 테이블이나 책꽂이 등을 만들어 쓰기도 했지만. 주로 판자나 합판을 각목에 대고 못질하는 정도였고, 더러는 한옥 짓는 현장에서 기둥이나 서까래 등을 대패로 다듬어 보기도 했지만, 2006년의 개인전을 끝내고 조금 본격적인 취미생활로 목공일에 몰두하게 된 듯하다.
학교에 장작 가마가 있어 땔감으로 제재소에서 나오는 피죽을 사다 쓰기도 하지만 관악 캠퍼스에서 간벌을 하거나, 건물공사로 인해 벌목한 나무나,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땔감으로 쓰라고 많이 가져오는데, 그 중에는 장작으로 뽀개 쓰기에는 아까운 크고 잘생긴 통나무들이 있어 하나둘씩 주워다 톱질도 하고 끌질도 하면서 놀기 시작한게 그럭저럭 몇 년이 되었다. 그동안 질리지도 않고 본업인 도자 일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 나무로 작업 해온 것을 보면 목공일이란게 묘한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질박質樸하다는 말이 있다. 이 박이란 글자가 통나무를 뜻한다.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가공되지 않고, 거칠고, 길들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형용하는 말인 게다. 통나무를 깎고 다듬어 애써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갈라지고 뒤틀리며 변하는 것을 보면 나무가 유기물질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아무리 다듬어도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나무의 성정이 그러해서인가 싶다. 또 중심이 있는 통나무는 늘 갈라지니까 판재를 만들때는 중심을 피해서 나무를 켜는 것이다. 실제로 중심을 파서 들어낸 통나무는 어느 한 방향으로 크게 갈라지지 않는 걸 보면, 나무도 ‘마음을 비우면’ 오히려 부동심不動心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결국 사람이 깎고 다듬는 인공적인 행위도 통나무가 가진 자연스런 성정과의 조화로운 임계선을 지켜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이유미가 쓴 「우리나무 백가지」에는 감나무의 칠절七絶이니 오상五常이니 하는 예찬의 글이 나오는데 오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감나무 잎이 종이가 된다 하여 문文이 있고, 나무가 단단하여 화살촉으로 쓸 수 있으니 무武가 있으며, 감의 겉과 속이 모두 똑같이 붉어 표리부동하지 않아 충忠이 있고, 노인이 치아가 없어도 먹을 수 있는 과일이므로 효孝가 있고, 늦가을까지 남아 달려 있으므로 절節이 있다.”
이는 감나무의 좋은 점을 설명한 대목이지만, 대부분의 나무에 위의 두세 가지는 해당되고, 그 외 또 다른 장점이 있는 것이고 보면 나무란 자연이 우리에게 베푼 덕목이 많은 존재임이 분명하다.

작업실 한쪽 구석에는 하다만 작품들이 먼지를 쓴채 뒹굴고 있다. 시작은 했는데 작업중간에 나무결이 이상하거나. 형태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혹은 더 이상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몰라 방치해둔 것들이다. 그중에 어떤 것은 시간이 좀 지난 뒤에(몇달 혹은 몇 년 뒤) 손을 봐서 끝내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것은 뒤늦게 쓰레기통이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또 어떤 것은 발 받침대로 사용하니 그때마다 신발에 밟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목수의 마음에 든 녀석은 정성스럽게 단장하고 방에 잘 모셔 놓고 수시로 수건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어디가 갈라지지나 않는지, 비틀어지지나 않는지 보살피는 데 비하면 나무의 입장에서는 참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무는 부잣집 거실의 귀한 탁자가 되면 어떻고, 가난한 집 아궁이의 불 쏘시개가 되면 어떠하며, 혹은 그 자리에서 썩어서 거름이 된들 아무렇지도 않다고 할지 알 수 없다. 다만 사람의 관점에서 귀천과 유무익을 따지는 것이고, 본래 자연은 그런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게 아닌지. 천지天地는 불인不仁 이라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면 내가 나무와 노는 것인지 나무가 나와 놀아 주는 것인지 헷갈릴 뿐이다.
나무는 썩어 없어질때까지 계속 변하고, 도자는 거의 변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축축한 흙이 고온에서 굽혀 자기가 되는 것은 지독한 압축의 변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급격하고 아찔한 메타모르포시스Metamorphosis 이다. 이렇게 깊은 겨울의 골짜기 같은 음기를 띤 흙이 밝은 봄날의 햇살 같은 양기를 띤 자기로 바뀌는데 소요되는 에너지는 아마 나무가 천천히  썩어 없어질때까지의 에너지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변하는 듯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은 듯 변하는, 두 질료들, 흙과 나무,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한심한 꼴인데,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일러준다.
“금이라 해서 다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헤매는 자가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이 어찌 즐겁고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니던가!

 

그동안 나의 목공선생노릇을 하느라고 시달린 류수현 군과, 궂은 도자 일을 맡아 도와준 문평군, 그리고 도자 작업실 한켠을 점령하고 온갖 소음과 먼지를 날리는데도 불평 없이 참아준 학생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11년 봄날 관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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