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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월호 | 작가 리뷰 ]

마만 리킨 Maman Rikin
  • 편집부
  • 등록 2011-06-20 15:56:54
  • 수정 2011-06-21 10: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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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양한 예술표현의 수단과 결합
  • medium & combination

전신연

도예가, 미국리포터



인도네시아 출신 미국인 마만 리킨Maman Rikin은 지난 8년간 미국 볼티모어에 위치한 비영리 도자 예술의 산실인 볼티모어 클레이 웍스의 전시장에서, 미국 도자예술 협회 학회 등에서 필자와 여러 차례 마주친 인연이 있다.
현재 볼티모어 카운티의 캐이턴스빌Catonsville의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조교수로 도예를 가르치는 마만은 인도네시아에 있는 큰 섬 중 하나인 웨스트 자바West-Java의 반둥Bandung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는 다양한 종교를 바탕으로 한 다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하면서 자랐다.
국민 대다수가 현재 이슬람 교도인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전통이 문화의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인구가 집중되어있는 자바와 같은 큰 섬에서는 이슬람 신앙의 특징적인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이미 인도네시아에는 다른 종교들이 전래되었고 번성했던 시기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 정령신앙만이 존재하던 인도네시아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힌두교였고, 불교 역시 여러 왕조에 걸쳐서 흥성하기도 했었다. 13세기가 되어서야 향신료 교역을 위해서 이슬람이 들어왔고 많은 국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현재와 같은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기독교는 그 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식민지화를 겪으면서 15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서 전래되었다.
현재 이슬람교가 주류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인도네시아는 힌두교, 기독교, 천주교, 그리고 교인들은 적지만 불교까지 다섯 개의 종교가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독특하고 다양한 종교적 환경과 특수한 지리적 조건에서 마만은 어려서부터 예술적 감성을 키워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전통 목각 공예, 힌두교의 풍성한 조상들, 불교 사원과 건축물, 기독교 미술에서의 인물상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의 문화적 산물들이 아주 어려서부터 마만의 예술적 영감의 기원이 되었다.
학교 선생이었던 마만의 부친은 그에게 기본적인 미술교육의 기회를 주어서 그가 초상화가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한 아버지가 소개해주었던 미술가 친구는 그의 멘토가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70년대 후반에 그는 Pasar-Seni 지역의 예술가 모임을 통해서 많은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이 그룹은 현재까지도 자카르타 북부에 있는 Ancoi 휴양 공원에서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존재하기는 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떠났거나 새로운 모임을 만들어 나가면서 예전의 색채는 잃었다고 한다.
마만은 당시 작가로서의 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계속 공부를 계속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80년대초 초상화가를 하면서 모은 돈이 충분해졌을 때에 그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남아의 큰 도시로 갈까도 생각했었지만, 제대로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서 외국에서 학위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사진 1, 2)
드디어 1981년 봄에 미주리Missouri주, Point Lookout에 있는 College of Ozarks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이 학교는 근처 알칸사Arkansas, 일리노이Illinois, 오클라호마Oklahoma, 캔사스Kansas, 아이오와Iowa 주 등에서 고등교육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학교이기는 하지만, 멀리서는 뉴욕, 메인Maine, 알라바마Alabama, 플로리다Florida, 캘리포니아에서도 학생들이 오곤 했다고 한다. 마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학교를 사람들이 찾는 이유는 학비가 필요없는 학교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모든 학생들은 캠퍼스 근처의 여러 일자리에 배치되어서 주당 20시간씩 일하는 대신 학비와 기숙사비를 면제받는다. 학비 면제의 또 다른 한 가지 조건은 모든 학생들은 학교에 있는 동안은 일요일 예배, 종교 집회 참석 등의 기독교인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이 학교는 꽤 훌륭한 아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고, 마만은 4년 후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학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서 예전의 초상화가로 살 것인지, 아니면 학업을 계속할 지 고민하게 되는데, 이미 학생임에 익숙해져 있던 마만은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다. 그 때까지만해도 가까운 곳에 있던Kansas City Art Institute 말고는 대학원에 대해서 특별한 정보가 없던 마만은 일단은 큰 도시의 예술대학원으로 목표를 잡는다.
아무래도 예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대도시의 예술가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부담이되는 도시 생활은 대학원 졸업 후로 미루고 외국학생에게 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피츠버그 주립 대학원Pittsburg State University으로 진학하여 Studio Art로 MAMaster of Arts 학위를 취득한 후 써던 일리노이스 대학원Southern Illinois University at Carbondale에서 세라믹 아트로 MFAMaster of Fine Arts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에서 추상적 형태의 인물을 연상시키는 원뿔과 피라미드 형태가 복합된 우아한 기능적 도자기와 도조작품을 제작했는데, 이는 힌두 신전의 안쪽 벽에 화려하게 릴리프로 조각된 남녀 인물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사진 3~5) 그런 작품들을 가지고 응모한 볼티모어 클레이 웍스에서 수여하는 로미나 팔로우쉽Lormina Salter Fellowship의 수상자로 선정되어 서던 일리노이스 대학에서의 석사 학위 취득 후 바로 볼티모어로 이동하여 그 이후 줄곧 이 근처에서 살았다고 한다. 볼티모어 클레이웍스에서 일년의 팔로우쉽 기간이 지나고는 레지던트 아티스트로 작업을 했는데, 주로 테라코타 흙으로 모양을 만들고, 라쿠 소성으로 표면을 검게 그을은 뒤, 가장자리를 착색한 알루미늄으로 마무리한 벽걸이용 작품을 제작했다. 자세히 보면 그것들의 가운데에 남자와 여자를 나타내는 상징이 있다고 한다.(사진6, 7)

Nurturing Nature (Fountain)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세워진 높이가 2m 40cm가 넘는 이 샘/분수는 볼티모어 클레이 웍스의 빌딩 앞, 잔디밭 위에 있는 실제로 물이 흐르는 기능이 있는 야외 도자 작품이다. 비영리 기관인 볼티모어 클레이 웍스의 설립 목적은 지역사회를 흙을 이용한 예술활동을 통해 개발하고 돕는 것인데, 이를 상징할 수 있는 조형물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멤버들이 토론을 거쳐 그의 아이디어인 Nurturing Nature 분수가 받아들여져 제작에 들어갔다고 한다. 아이디어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그는 볼티모어 클레이 웍스의 레지던트 아티스트들에게 각자의 대표적인 3~5개의 용기 형태들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뒤, 그가 판 성형으로 제작한 직육면체의 기본형 위에 그것들을 자르고 붙여가며 직관적으로 짜맞추어 작품의 표면에 주요 부분을 장식할 유닛을 한개씩 완성했다고 한다. 시멘트와 콘크리트 등으로 만든 집 모양의 건축 구조물에 콘 10에서 유약 번조를 한 이 유닛들을 중앙에 배치하고, 파란색 계열의 유약을 입혀 번조한 타일들을 양 옆에 붙여서 장식했다.(사진8~11)

Franklin Square Community Project
2001년 볼티모어 시티에서는 버려진 집들이 많았던 다운타운의 프랭클린 스퀘어Franklin Square를 새로이 개발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취지로 여러가지의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마만은 볼티모어 클레이 웍스의 레지던트 아티스트로서 그 중 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빈민가의 아이들과 모자이크 타일들을 만들었고, 그 작품은 현재까지도 한 건물의 앞마당에 원형으로 지면에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그 때 같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은 대학생들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웃음지었다.

Christmas in July
녹색의 많은 형태들이 갤러리의 한쪽 코너에 쌓여진 이 작품은 2005년에 제작된 것으로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시각적으로 연상케 한다. 그 꼭대기에는 부다의 헤일로를 연상시키는 금색 타원이 있다. 당시에 이라크 전쟁 중 미군들이 이라크 군인들을 감옥에서 잔인하게 고문하던 장면들이 신문이나 텔레비젼 뉴스에 방영되었는데 마만은 폭탄, 미사일, 남성의 성기, 발, 부츠, 무기, 옥수수 등을 제작하여 콘 05로 소성하여 군복의 대표적인 색상인 녹색의 아크릴릭으로 색을 입혔다. 또한 쉐프런, 엑슨, 택사코 등의 미국의 대표적인 오일 회사들의 이름을 부조로 군데군데 새겨 넣었다. 프레스 몰드와 슬립 캐스팅으로 하나씩 제작된 것들을 쌓아 올리는 형식으로 전시했다.(사진12)
그가 최근에 제작하는 작품들에는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음부를 나타내는 형태들이 나오는데 그 이유를 묻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들은 인체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들을  무시하거나 혹은 모른체한다.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 한다. 그러나 아티스트로써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있는데 왜 남녀가 몸에 가지고 있는 그 재미있는 형상을 안 만들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런 금기되는 것이 그에게는 도전이 된다고 하면서 그러한 파격적인 소재로 인해 사람들이 한 번 더 작품을 보고, 자극을 받으면서, 그것에 대해 말하게 만드는 것이 그가 원하는 바라고 했다. 그는 또한 "그 누군가가 아티스트들이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무시한 채 작업실에서 열정적으로 작품만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들은 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를 원한다." 라고 덧붙였다.(사진13, 14)
그가 만드는 스타일리쉬한 남녀의 성기는 포르노그라피의 그것과는 구분된다. 그는 자신이 그 오브제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보는 관객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그들이 보는 모양이나 무언가는 그가 상상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4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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