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 미술평론
이흥복의 작업은 주로 도판을 조형하고 변주하는 형식에 착안한 것이다. 도판으로 나타난 평면성이 작업의 기저가 되고 있는 것인데, 주지하다시피 평면성은 클레멘테 그린버그가 회화의 본질(바탕)로 꼽은 것이며, 그 조각 쪽에서의 화답이 도날드 주드의 프라이머리 스트럭처 곧 최소한의 구조다. 어느 경우이건 조형이 가능해지는 최소한의 조건에 천착한 것이며,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식이 미니멀리즘이다. 어슷비슷한 모듈 내지는 유닛을 단위구조 삼아 반복적으로 열거하고 집적한 것이나, 여기에 최소한의 장식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변화를 준 작가의 작업은 이런 미니멀리즘에 대한 반응 내지는 변주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금욕적인 형식은 유교적인 전통에 연유한 중용과 절제의 미적 정서에도 합치되는 부분이 있어서 친근하게 다가오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업은 정통적인 세라믹의 관점에서 보면 생경한 면이 있다. 오히려 조형일반의 열려진 관점으로 다가갈 때 더 쉽게 이해되고, 그 자체를 미적향수의 대상으로서 즐길 수도 있게 된다. 그의 작업은 말하자면 세라믹이면서도 정작 그 생리는 도조(특히 테라코타)에 가깝다. 도판을 만들기 위해서 주형틀을 도입한 것이나 무엇보다도 흙을 소재로 한 것, 그리고 번조과정을 거치면서 흙의 성질 그대로 보존되면서 변질되는(강화되는) 것이 그렇다(번조과정을 통해서 보통의 테라코타가 밝은 주황색으로 나타난다면, 작가의 작업은 창백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흰색으로 현상하는 것이 다른 점이다). 여기에 어떤 구체적인 형상보다는 최소한의 추상적인 조형요소에 기울어진 미니멀리즘적인 외형마저 더해진 그의 작업은 정통적인 세라믹은 물론이거니와 현대도예의 일반적인 경향성과도 뚜렷하게 구별되는 부분이 있다. 세라믹에서 시작했으면서도 정작 세라믹에 한정되지는 않는, 세라믹의 경계를 넘어 조형일반의 생리와 광범위하게 만나지는 일종의 경계 넘나들기가 수행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제작과정을 좀 더 근접한 시점에서 들여다보자. 작가의 작업은 도판을 조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석고주형을 이용해 흙물을 부어 굳히는 방식으로 도판을 조성하는데, 단독작품의 경우에 이 판형을 바탕으로 이후 과정이 진행된다. 그리고 어슷비슷한 유닛을 반복적으로 열거하고 집적하는, 부분과 부분이 어우러져 유기적인 전체를 형성시키는 또 다른 작업의 경우에 그 단위구조의 크기는 단독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다. 대개는 뒷면이 트여있는, 전면에 비해 측면의 폭이 좁은 정사각의 입방체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조성된 각 도판의 전면에 점을 찍고, 그 점을 기점으로 마치 종이를 오리듯 칼로 그어 선을 새겨 넣기도 하고, 길고 좁은 띠 형태의 면을 조성하거나, 아예 그 면을 도판으로부터 오려 내거나 한다.
이로써 마치 루치오 폰타나의 칼로 찢겨진 캔버스 그림에서처럼 평면성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평면 너머로까지 공간을 확장하고, 공간을 평면 내에 끌어들여 화면과 공간이 하나로 연속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작가는 이렇게 오려낸 띠를 화면의 전면으로 밀어 올려 음영을 만드는데, 이때 생긴 그림자 역시 실제의 자장에 속한 성질을 조형의 한 요소로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선 비록 최소한의 조형요소만으로 화면이 조성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이면에선 실제공간과 허구적 공간(화면)이 하나의 층위로 서로 통하는 어떤 경지가 열리는 것이며, 조형요소와 자연현상(그림자)이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 삼투되면서 어우러지는 어떤 내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점으로부터 유래한 선, 선과 선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면, 그리고 면의 운영(투각과 음각 혹은 양각)에 의해 조형의 한 요소로서 화면에 끌어들여진 공간과 음영. 작가의 작업은 이렇게 손바닥 안에 속 들어오는 작은 사각형의 화면 속에서 응축되고 확장된다. 그것은 마치 조형이 시작되는 근원에 대한 비유같고, 하나의 점으로부터 파생된 세계의, 존재의 은유적 표현같다. 그리고 여기에 작은 삼각형이나 점보다는 큰 원형을 더해 화면에 일정한 변화를 유도한다. 삼각형이나 원형은 전체적으로 모노톤의 화면에 최소한으로 도입된 빨간색이나 파란색 띠와 어우러져 자칫 정적이고 금욕적이고 단조로운 느낌을 줄 수 있는 화면에 일정한 장식적 효과와 함께 활력을 불어 넣는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엿볼 수 있듯 작가는 점, 선, 면, 그리고 삼각형과 원형의 기하학적인 형태만으로 화면을 조형한다. 주지하다시피 이 형태들은 특히 회화에서 회화의 장르적 특수성을 담지해주는 최소한의 형식요소들이다. 그리고 모더니즘 미술은 이 형식요소로부터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이유 곧 회화적 특수성을 발견한다. 작가의 작업 역시 이런 모더니즘 논리의 연장선에 놓인 것으로 보이고, 입체이면서도 정작 평면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으로 인해 회화적인 느낌이 강한 편이다.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아우르는 어떤 경지로 봐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예로부터 기하학적인 형태는 자연으로부터 건네진 것 곧 감각적인 것으로서보다는 관념적인 것, 추상적인 것, 이성적인 것의 메타포로 여겨졌다. 기하학적인 형태가 조형예술보다는 수학(가장 관념적인 학문으로 여겨졌던)이나 음악(하나의 동기가 반복 변주되는)과 더 자주 결부되어졌던 것이 그렇다. 이를테면 수열로부터 패턴이 나오고, 비례가 나온다. 그리고 비례는 시각적 쾌감의 원인이 된다(심지어 비례는 황금비례나 신성비례에서 보듯 신성시되기조차 한다). 기하학적인 형태는 어쩌면 주어진 세계, 감각적인 세계를 대체할, 저마다의 내면에 일종의 순수관념과 질서의식(코스모스)에 의해 지지되는 또 다른 세계를 축성하려는 욕망에 연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기하학적인 형태로 조성된 작가의 작업 역시 일정하게는 이러한 욕망(내적질서의 제국, 유토피아)의 메타포처럼 보인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3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