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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월호 | 작가 리뷰 ]

재현적 사고를 넘어 진화하는 달항아리
  • 편집부
  • 등록 2011-04-12 11:54:06
  • 수정 2011-04-13 10: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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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ng Shin Bong 강신봉

도예가 강신봉(45)은 일반적인 백자달항아리의 고정된 형태를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작가다. 재현적 사고의 근간이 되는 본질이나 동일성을 넘어서 미시적 또는 거시적으로 전통에 다가서 자신만의 색깔을 담아낸 작품을 만들어낸다. 지난달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은 함박눈 위를 어렵게 내달려 여주군 북내면 중암리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 ‘소우재’를 찾았다.


흙과 맺은 인연 그리고 시련
경상남도 합천 출신인 강신봉은 1986년 창원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하려 했지만 기계 다루는 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원하는 일을 찾기 위해 몇 달을 방황했고 당시 발행됐던 『서기 2000년』이라는 잡지를 우연히 접하게 됐다. 잡지에는 어느 도예가의 일생을 담은 성공스토리가 소개돼 있었고 이 내용은 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는 도예를 배우기로 마음먹고 안동호, 유근형, 황규동 도예가 등 유명한 원로 도예가들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백자를 배우기로 결심한 그는 그 해 12월 무작정 여주에 있는 안동호 도예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하지만 수많은 제자들 사이에서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다른 도예가의 작업실을 물색하던 중 인근에 조병호 도예가(현재 여주 도예명장으로 활동)의 요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조병호 도예가와 인연을 만들었고 본격적으로 백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힘들게 도예를 배워나갔지만 시골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흙은 언제나 즐거움이었다. 시골 특유의 흙 냄새가 그에게는 고향이었고 흙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8년간 흙작업을 배웠다. 그 후 1994년 여주에 그의 첫 작업실을 마련했다. 조립식 건물이었지만 작업실이 생긴 것에 너무도 행복했다. 하지만 얼마 후 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작업실에 불이 났다. 가마 안의 기물을 식히기 위해 너무 빨리 가마 문을 열어놓은 것이 실수였다. 가마 속 뜨거운 열을 견디지 못하고 일순간 석고보드인 천장으로 불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렇게 화마는 그의 작업실을 남김없이 집어삼켰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당시 여주도예촌에서 작업실을 운영하기 위해 구해 놓은 땅을 모두 처분해야만 했다. 그리고는 근처에서 2년 정도 작은 작업실을 구해 운영했고 지금의 작업실로 이전했다. 661m2 정도 크기의 현재 작업실은 원래 소를 키우던 외양간이 딸린 집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적 집의 형태와 비슷한 이곳이 마음에 들어 손수 차실과 작업실을 꾸몄다.

 

달항아리의 이분법적 창조
강신봉은 도예작업을 위해 국내에 있는 흙공장에 직접 찾아가 원토를 구해 볼밀하고 수비해 사용한다. 특히 좋은 백자토를 위해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도석 등 암반질을 직접 찾아내 분쇄해 쓴다. 원하는 흙의 밀도라든지 정도를 맞춰 쓰는 작업방식은 어느 하나 쉽게 넘어가는 부분이 없이 철저한 과정을 거친다. 그는 이렇게 준비된 재료를 사용해 두 가지 형식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첫째는 넉넉함의 미학이 엿보이는 전통 백자달항아리, 둘째는 다양한 현대미술을 달항아리에 접목시킨 그만의 개성 있는 작품이다.
첫째로 그는 전형적인 전통 백자달항아리를 제작 연구 중이다. 달항아리는 모두 비슷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의외로 종류가 다양하다. 조선왕실에서 사용했던 각이 예리하고 빈틈없는 순백의 깨끗한 달항아리, 사대부나 양반의 안방 또는 서재의 선반에 놓여진 입이 곧게 세워지고 몸체가 길어 원숙함이 느껴지는 달항아리, 부엌이나 뒤주에 세워둔 자유로운 형태의 달항아리, 그리고 그가 현재 작업중인 군데군데 빈틈이 오히려 호젓한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서민들의 곁에 있던 달항아리가 있다. 조선 후기 무렵에는 지배 세력의 확대에 따라 일반 민가에서도 달항아리들이 사용됐다. 도예가들은 달항아리 중 제값을 받기 힘든 상품들을 저렴한 가격에 서민들에게 넘기기도 했다. 이렇게 팔린 달항아리들 덕분에 당시 웬만한 서민들조차도 달항아리를 소장할 수 있었다. 그는 오히려 당시 서민들이 소장했던 달항아리 제작이 현대에 와서는 쉽지 않다고 한다. 볼밀이 잘 된 흙이 아닌 거친 태토를 사용하기 때문에 점력이 떨어져 물레 사용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달항아리 표면에 우연적으로 나타나는 달무리 형상의 희미한 반점들과 작은 홈들을 표현해내야 하기 때문에 가마번조 시 성공확률이 높지 않다. 현재 그의 차실에는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진 두 점의 백자달항아리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업은 기본적인 달항아리 형태에 다양한 색채와 조형적 변화를 가미해 완성한 독특한 형태의 달항아리이다. 자신의 유년시절에 대한 회상을 달항아리에 진사로 표현한 「광대의 불꽃놀이」를 비롯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마당위에 널어진 고추로 표현한 「추억」, 달항아리를 자신만의 뜻대로 바꾸기 위해 붕대를 두른 듯 부조로 표현한 「치유」, 19세기 스페인의 현대미술가 안토니오 따삐에스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아 완성한 「해변의 비취」 등은 그의 자유분방한 드로잉과 감각적인 표현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자신의 따뜻한 유년시절과 페이소스(비애감)가 공존하는 형상의 달항아리이다.
2008년 11월 포항 포스코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에서 그는 이 현대적 달항아리를 선보였다. 전시장을 찾은 컬렉터들은 그의 작품에 대해 독특하다며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현대도자라고 평가했다. 이 전시로 주목을 받은 그는 2010년 1월 대구의 동아미술관과 서울의 경인미술관의 초대를 받아 연이어 기획전을 열기도 했다. 전시준비기간이 짧아 서둘러 태토를 준비하고 한국도자재단의 장작가마를 빌려 작업을 진행했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한 겨울 직접 구한 태토를 수비하고 빻아서 가스가마에 불을 켜 건조시켰다. 그는 “당시 날씨가 너무 추워 작업하는데 많이 힘들었다”며 회상한다. 거친면과 부드러운 면을 자연스럽게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입도 있는 알갱이 정도의 흙과 두께가 있는 흙을 적당히 섞어 써야 했다. 급하게 작업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 때문에 많은 수의 작품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120점 정도의 작품을 제작했지만 가마번조 과정에서 6점의 작품만이 살아남았다. 시간은 촉박했고 뜻대로 작업은 되지 않았다. 결국 주변 도예가들이 그의 작업을 도왔고 그간 연구해 온 전통 백자달항아리를 무사히 완성해 전시를 마칠 수 있었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2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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