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 본지기자
30여 년간 꾸준히 도자 다도구만을 빚어온 도예가 양계승(53). 다양한 유약과 기법으로 완성된 그의 찻그릇엔
소박함이 담겨있고, 서정적 이미지가 녹아있다. 흙을 빚으며 설렘을 느끼고 늘 삶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는
그를 만나보기 위해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 마륜리 산자락에 자리한 금산도예를 찾았다.
전국 각지의 태토연구와 500여 가지의 유약 실험
양계승의 작업실인 금산도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그가 키우는 여러 마리의 닭과 강아지, 그리고 직접 재배하는 작은 녹차밭이 눈에 띈다. 위층의 다실과 함께 마련된 전시실에 올라가면 「흑류장미문」, 「가시연황금다완」, 「사토3인다기」, 「흑유황금다기」, 「매회피사각굽다완」, 「흙박이옥다기」, 「진사요변다완」 등 수많은 다완들이 진열돼있다. 「운화향雲花香」, 「춘신春信」, 「백옥연가白玉戀歌」 등은 다기별로 지닌 독특한 개성을 이미지로 전환해 이름 붙인 것이다. 또한 차를 마시면서 지압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표면에 가시를 붙여놓은 「가시연다기」, 투명유약의 「투명투각다기」, 전통 호롱등잔 형태를 빌려 응용한 「호롱다기」 등 재미를 곁들인 다기도 있다. 다기들은 대부분 전통을 모티브로 자신만의 개성을 담아낸 작품들이다. 전통도자도 중요하지만 현 시대에 맞는 도자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자신만의 개성을 심어줄 태토와 유약재료를 구하기 위해 재료가 있는 곳이라면 광산과 공사장, 어느 지역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나선다. 작업장 주변의 황토는 그의 작품만이 지닌 고유한 빛과 색을 돋보이게 한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실험 끝에 그는 다채롭고 오묘한 색깔을 나타내는 500가지가 넘는 유약을 완성했다.
30여 년을 겪어온 도예가의 애환
1982년 군 전역 후 취업 준비 중이던 양계승은 우연히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활동했던 고남식 도예가의 도자기 빚는 모습을 보고 숨이 가슴에 턱 막히는 설렘을 느꼈다. 평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도자기에 대해서는 관심 없던 그였다. 그는 그곳에 남아 기본부터 천천히 도자기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감동과 설렘은 화려한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았고 호락호락하지 않는 흙과 불의 세계에는 좌절과 고통, 열악한 환경만이 전부였다. 추운 겨울, 언 흙을 발로 밟아서 반죽한 일, 하루에 육십 덩어리의 흙을 손으로 반죽했던 일상은 초심의 설레었던 그의 마음을 조금씩 회의와 포기, 갈등의 시간으로 바꿔 놓았다. 같이 도자기를 배웠던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하나 둘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 떠나갔다. 그 또한 너무 힘든 탓에 혼란과 갈등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흙작업을 시작했을때의 처음 설렘과 뭉클한 감동은 그럴 때마다 다시 불꽃처럼 되살아나며 마음을 다잡게 했다. 도자기를 빚는 것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형태를 만드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 후 1988년 그는 경상남도 김해시에 작업장을 차렸다. 하지만 생계에 치우쳐 예술적 작품은 아예 만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찻그릇이 잘 팔릴까만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비좁은 공간에서의 작업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송판 하나 제대로 구입하지 못해 시멘트 바닥에 두었던 기물은 쥐들에게 치여 깨졌고, 밤늦게까지 가마불을 지피다가 깜빡 잠이 들어 온도가 너무 올라가 모든 기물이 못쓰게 되기도 했다, 또한 유약조합을 잘못해 대부분의 유약이 버려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열악한 공방환경과 작업의 실수들은 그에게 내공으로 채워졌다. 15년 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전라남도 순천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세월이 흐르면서 작업실에 찾아오는 다양한 다인들을 만났고, 다인을 통해서 예의와 겸손이 담긴 다도를 배웠다. 값진 인연과 삶의 자세를 배우며 찻그릇 빚는 일은 어느새 그의 인생의 전부가 되어 있었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0.07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