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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5월호 | 작가 리뷰 ]

윤광조
  • 편집부
  • 등록 2010-06-11 10:45:10
  • 수정 2010-07-05 1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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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조

신용덕 yfo 갤러리 디렉터

작가의 최근작들은 물레를 사용하지 않았다. 두드린 흙 판을 일으키고 서로 맞대어 붙인 삼각기둥의 형태가 중심이다. 물레에서는 손의 놀림이 조심스럽지만 이런 경우는 오히려 강약 장단이 한편 자유롭다. 결과로 평면으로 이루어지는 작품의 입면들이 말로는 할 수 없는 조절의 손길을 받아 이미 추상적인 완결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 이런 경우 잘되었다 아니다 하는 판단 역시 형태의 완성만 아니라 각 입면의 느낌과 연결부분이 되는 가장자리의 선과 질감을 포함한 전체로서 아주 감각적인 문제가 된다. 각 면들은 바닥을 딛고 의연하게 서서 서로를 의지하는 구조가 된다. 둥근 물레성형의 형태는 원근을 가진 윤곽선으로 드러나지만, 삼각기둥 형태의 경우 각각의 입면이 정면처럼 보여서 하나이자 세 개의 작품을 대하는 듯하다. 작가는 같이 볼 수 없는 세면에서의 정서적 지속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문제를 안는다.
작품의 비례에서도 땅을 딛고 반듯이 서 있는 결과로 저절로 건축적인 스케일의 분위기이다. 작으면서도 당당해서 크게 느껴지는 좌우 비례가 있고 크지만 날씬해서 오는 약간의 불안함을 오히려 시원한 상승감으로 이끄는 크기-비례도 있다. 이 크기와 비례 역시 평면 내부의 처리와 깊게 관련된다. 분청을 중심으로 하는 작가의 일은 결과가 가마에서 나와 식을 때까지 미리 계산하고 설정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오히려 작업에서는 이 과정이 문제가 된다.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실행하고 끝나버리는 분청의 일은 한편 성실한 실행이 중심인 상감 청자의 공예성과 그리고 선명한 형태와 하얀 바탕을 화선지 삼아 그려지는 백자에서의 회화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치밀하고 정교한 그림이 민화가 되면 어리숙해서 편하고 곳곳의 빈틈이 오히려 오래가는 가치가 되듯이 분청은 치밀한 성의나 정교함을 지나 추상적인 완결성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한편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이것은 과정 중에 생기는 많은 변수를 순간적으로 정리하고 극복하는 또 다른 방식의 수련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흥적인 임기응변이거나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처럼 보이거나 우연한 효과나 저절로 되는 결과에 의존하는 것으로 쉽게 보이지만 그 쉬워 보이는 일이 어렵다. 이것은 분청이 청자나 백자보다도 더욱 동양-한국적인 이유이며 서양적인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에서는 어려운 것 같다. 인간이 하는 일인데 인공이나 인위를 지워내고 열심히 전력을 다해 해야 하는 일이지만 놀 듯이, 하는 듯 마는 듯 하는, 어찌 보면 아이 장난 같아 보이는 순진함까지, 말을 넘는 단계는 끝없다.
분청의 중심은 성의나 완성이 아니라 추상성과 여유, 자유와 절제의 정신성이다. 오히려 제행무상의 뜻처럼 늘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순간순간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의 순도를 최대한 높이고 최선을 다한 후 그 결과에서 다시 반성의 여지를 찾는다. 같아 보이는 일을 또 다르게 시작하는 먹고 즐길 사람과 놓여지는 공간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고려와 계획이 절실하며 오히려 있을 수 있는 감동의 기획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 짐작도 할 수 없는 모르는 새로운 세계의 발견을 바라고 뛰어든 예술에서는 오히려 계획과 구축보다도 비워내고 지워내는 일이 문제이다. 너무 잘했다는 기쁨이 조만간 부끄러운 서글픔이 되기도 하고 이정도면 되었다는 단계가 곧 넘어야할 큰 산의 직벽이 되는 것을 늘 혼자 보는 것이 작가이다. 우리는 그 막막함의 극복의 과정과 그다음 단계의 전개에 감동한다.
현대도예는 오히려 전통의 무게에 눌려 숨을 못 쉬거나 주체파악이 안되서 서양의 뒤늦은 깨달음과 감동을 흉내내거나 상업적인 효용에 시달리고 있다. 생각건대 참을 만하면 안하는 것이지 전통은 유지되고 지켜져야 하는 죽은 형식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제일 쉽게 스스로를 드러내고 남과 구별하는 일의 지속과 발전이라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점차로 변해가며 시대와 그 시기의 최선의 노력을 있어온 평가결과로서의 가치에 잇대어 붙이는 그런 과정의 문제인 것이다.
작가의 세계는 2003년 영국 런던의 도자예술전문 갤러리 베쏭에서의 초대 개인전 이후, 동양작가 최초의 필라델피아미술관의 초대전, 시애틀미술관 아시안아트 뮤지엄의 기획전 등 동양의 전통과 이어지고 구별되는 현대도예작가로 서양전문가들이 고찰해야 하는 좋은 덕목과 방향을 가진 원류의 주요작가로 신중히 고려된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시작에 불과한 동양-한국의 예술에 대한 그들의 진정한 이해와 평가의 결과이다.
그는 작업에 앞서 그리고 과정 속에서 적절한 정도를 넘는 계산이나 생각을 부단히 지우는 일이 오히려 작업인 것으로 보인다. 산의 능선 위로 구름이 모이고 흩어진다. 같은 풍경이 어쩌면 저렇게 드라마틱하게 달라지는가를 관망하고 그 풍경을 닮고 그 속에서 방향을 찾는 일이 그의 일인 것으로 느껴진다는 말인데 실로 작가의 작업장은 의외로 휴대전화도 통하지 않는 그런 자연 속에 있다. 옛사람들은 흙과 땔감 그리고 운송의 거리와 방식을 고려해서 작업장이 선택되었겠지만 요즈음은 편리가 우선이다. 작가의 작업장은 한편 편리와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래서 얻어지는 선택된 자연과는 긴밀하다. 경주 안강 옥산서원의 독락당을 지나 도덕산 자락의 저수지를 남으로 둔 골짜기의 이름이 바람골이다. 작업실의 의도적인 큰 창은 그대로 산과 하늘의 더 이상 정리되기 어려운 경치이다. 여기를 지나는 거친 바람이 만드는 구름의 움직임과 변화무쌍함은 그대로 작품 속 정서의 출발이며 말할 수 없는 무상의 조화를 매 순간 느끼게 한다. 구름은 무거우면 비가 되어 흐른다. 조용히 내리는 비와 바람에 힘입은 거친 기운은 한편 저절로 주정적인 문인화와 연관된다. 작가의 작품은 작가가 속한 자연과 닮아 있다. 피상적인 겉모습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추상적 본질의 의미이다. 잠시도 쉬지 않는 바람도 있고 의연하게 풍만한 주변 산의 하루 이틀이 아닌 결연한 선들도 보인다. 작품의 면에는 엄밀한 수직 또는 수평의 바탕이 있다. 이 반듯한 색조의 면적과 공간 분할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거나 거칠게 흔적을 남기는 귀얄-붓의 영역-역할과 호흡한다. 그것은 작품의 윤곽선과도 깊게 관련된다.
도자기는 물을 담아내는 한정이 있는 그릇이다. 흙으로 만들어져서 불의 도움으로 부수기 전에는 지속가능한 정신이 새겨진 형태가 된다. 그리고 불과 금속의 조화인 유약-시문의 결과로 순간적인 정서와 표현을 실어내고 강조하는 색과 질감을 얻는다. 그릇에 물 담고 꺾어 온 나뭇가지를 살려두고 빛 아래 그리고 어스름에 바라본다. 언 듯 당연한 세상을 이루는 목, 토, 화, 금, 수의 상생순환의 조화와 이치에 놀란다.
윤광조의 도자기는 당당하다. 격정의 순간적인 흔적들이 조용함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흙다움을 지나친 세련이 아니라 흙 본질의 수더분한 수용의 미덕이 작가의 망설임 없는 솔직함과 어울려 선명하다. 늘 그렇지만 작품들은 또 다른 한계다. 다음에 대한 용기와 침착한 노력의 지속이 작가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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