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적 농담濃淡을 담은 도제陶制캔버스
투박한 화장토 붓질 위로 감도는 철ㆍ동채의 매화문. 잔잔했던 식탁 위를 생동감있는 문양들로 연출해준 (주)광주요의 테이블웨어를 기억할 것이다. (주)광주요의 전속작가로 활동했던 이력으로 잘 알려진 작가 김순식(47)을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단절되어 조용한 환경에 둘러싸인 박스형태의 벽체건물 앞에서 그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국경없는 회화 김순식의 그림들은 보통의 회화작가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부 작가들처럼 풍경, 동물, 식물 등에 대한 느낌과 욕구에 충실하다는 것 이외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성향적으로 문인화를 기초로 하는 동양화로 자연인상을 주제로 작업해왔던 보통의 작가다. 그런 그에게 1989년 (주)광주요 도자디자인개발과 회화작업을 하면서부터 자그마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화풍의 변화가 아닌 도자회화기법을 선보인 것이었다.
작가의 손에 의해 그려진 그림은 가마에서 불길이 내미는 부드러운 혀에 의해 자극을 받으며 그 모습이 숙성되어 갔다. 불길은 유약의 성질에 따라 그 색채와 질감을 변화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는 투박한 항아리나 그릇의 유기적인 선과 형태에 그림이 녹아 들어가게끔 그려내는데 미묘한 균형과 조화를 이뤘다. 이렇듯 도자회화는 불과 그림의 화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표면에 그려진 그림은 무심한 듯 던져지고 그려진 이미지로 일정 함량의 산화철과 산화동의 안료가 불길 속에서 흙과 만나 그 절정을 이룬다. 그의 자유분방한 붓터치가 돋보이는 벽화와 그릇 위의 그림은 기법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도자회화는 도자사적으로 보면 그리 대단하고 중요한 장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자회화는 단순한 그림 장식표현으로 일반회화처럼 주어진 안료와 도구, 화면이 있어서 가능한 작업이 결코 아니다. 도자의 물성과 그 제작공정, 번조 방법, 조형적인 미의식과 감각, 그리고 시간과 인내의 노동이 필요한 그야말로 총체적인 작업인 것이다. 말 그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자연풍경에서 볼 수 있는 들꽃이나 소, 당나귀 등을 대상으로 한 그림들은 우선 도예작품의 소재로는 드문 신선감을 발산한다. 도예가들의 표면표현에는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에 천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로 이러한 회화이미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도자회화라는 구체적인 이슈를 가지고 접근한 작가의 의도는 자칫 간과하기 쉬운 ‘그린다는 행위’에 효과적으로 다가서게 된다. 이러한 소재의 그림들은 도판 또는 그릇의 밀도와 짜임새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도자라는 편견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한다 김순식의 노련한 농담은 막연한 이미지의 한계를 극복해 그 이상의 시각적 효과를 얻어낸다. 보통은 대상을 발견하면 사진으로 담거나 간략한 드로잉으로 화폭에 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작가의 소화 능력에 따라 실물과 대상의 어색함을 극복하게 된다. 특히 그의 그림은 먼저 툭 던져놓음으로써 감각적인 리듬에 따라 움직이고 대상 자체를 충실히 묘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어떻게 그릴 것인가 초안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점하나라도 찍어놓고 시작한다. 언뜻 무책임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이런 자신을 즉흥성이 많다고 설명한다. 무엇을 해야겠다는 배경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생각을 그림을 통해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던 지인의 말은 그에게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도자예술이라는 넓은 범위에서 생활도자와 순수도예로 구분된 방향과 정체성에 대한 갈등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닌 도예가들이라면 한번쯤은 겪었을 갈등의 요소였을 것”이라고 한다. 작품을 만드는데 있어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끊임없는 물음 때문일까. 시인은 잘 정돈된 언어로 그 물음에 답하고 예술가는 그 조형성으로 표현한다면 작가 김순식은 그림으로 그 물음에 답한다. 자신에 대한 물음과 끊임없는 대답들을 쉼없는 필치로 그려낸다. 그에게 있어 회화와 도자의 접목은 자신에 대한 대답이자 또 다른 장르의 개척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프레스코기법을 응용한 도자회화를 비롯해 색유를 활용한 회화장식, 도자수묵화 기법 등으로 평면과 입체 표면위에서 자유롭게 풀어내고 있다.
작가 김순식은 경기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후 중국 경덕진으로 건너가 도자회화기법을 연구했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자기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다양한 도자기법의 표현을 통해 도자미술의 활용과 확대의 기대를 안게 했다. 그가 말하는 도자회화기법이 일반회화표현기법과 다른 점은 붓의 사용 방법, 안료 특성에 따른 사용방법, 장식법에 따른 기술의 습득과 이해가 요구되고 특히 번조의 운용 기술이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청화, 철화, 동화기법에 의한 섬세한 표현에서부터 활달한 필치를 필요로 하는 소재까지 다양한 발색의 변화와 그 효과에 매료된 듯하다. 그동안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지만 자신에게는 학습지침서였던 것. 지금도 중국과 일본에서 나온 회화기법의 자료를 구해 따라해보며 도자회화기술을 위한 체득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고온발색의 실험에도 많은 노력을 들여 보다 다양한 색상표현에 힘쓰고 있다.
현재 그는 기법적인 고민보다는 회화로 돌아가는 터닝포인트 시점에 있다. 도자재료와 도자화필법陶瓷畵筆法을 통해 프레스코와 도자를 접목한 세라프레스코Cera Fresco벽화와 수묵화기법을 응용한 도자수묵화의 기법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모름지기 작가는 반복된 행위와 그 산물을 경계해야 하고 곧 지루한 것을 피해야 창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근래에는 도자벽화시안의 사업계획으로 분주하다. 실내가구를 비롯해 주거공간, 실외 건축벽화에 이르기까지 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장식소품과 타일제작에 주력하고 있다.
앞으로 좀 더 적극적인 공예 본질인 ‘쓰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학의 부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그는 이러한 모든 연구 결과물들이 생활도자와 공간에 실용화되고 도자회화의 특성과 아름다운 도자회화기법이 모든 사람들에게 편하게 다가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