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모하는 이 시대의 청자
유광열
글 김태완 본지 편집장
“옛 것을 재현하면 모방이라고 폄하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국적 불명이라고 비판하며, 시대를 넘나들면 잡탕 기법이라고 무시한다.” 전통과 전승을 고수하는 도예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거나 겪어봤음직한 비판이다. 위 비판을 현대미술의 이론적 시각으로 풀이해보자. ‘재현’은 추상예술과 대립되기는 하나 딱히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순수한 추상미술조차 예술가의 상상에 대한 재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재현예술’은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로 분류된다. 다음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는 문화와 예술 각 장르간의 엄격한 구분에 대한 폐쇄성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미술사조인 ‘포스트모더니즘’과 맥을 같이 한다. 마지막으로 ‘시대를 넘나듬’은 다른 범주에 속한 양식을 교착시킨다는 의미의 ‘퓨전’ 혹은 ‘크로스오버Crossover´인 것이다. 현대미술적 접근으로만 이해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 전승과 전통도예에 대한 예술적 범위는 현실적으로 유지하기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지켜 고수해내야만 한다는 문제점에서 표류하고 있다. 유광열(65)은 그 문제의 중심에 서있는 도예가이다. 2대에 걸쳐 청자재현에 심혈을 기울여 온 그가 작업시작 46년 만에 처음으로 개인전(2007.12. 4-12.11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을 앞두고 있다. 그는 첫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두려움이 앞선다고 한다. 오백년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던 아름다운 청자를 재현이란 미명으로 흉내내 만들어 오면서 고정관념에 길들여져 왔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어떻게 발상의 전환을 해야 될까? 어떻게 변모 발전시켜야 될까? 그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의 말로 비유하자면 이번 개인전을 통해 보여지는 작품은 발전 없는 제자리걸음의 ‘전통’과 역사 없는 흙장난질의 ‘현대’라는 양비론 속 환골탈태의 결과물인 것이다.
유광열은 현대 한국전통청자 재현의 과도기인 1960년경 부친(고 해강 유근형)을 따라 이천에 정착해 요장을 운영하면서 고려청자의 유약과 형태의 개발을 통해 단절돼 왔던 전통청자 재현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특히 청자에서 특별히 강조돼온 상감기법을 전수받아 청자재현작업을 보다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1970년경부터는 전통도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창작력이 돋보이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전통도자는 완전한 유물의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야한다는 선친으로부터의 가르침을 받아 청자 연구에 정진했다. 그의 선친은 1894년 동학 혁명이 나던 해에 태어나 1993년 백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84년간 청자재현을 위해 일심으로 일관해 왔다. 유광열은 선친에 대해 “학처럼 고고하게 세속의 욕심을 모르고 살아오셨다. 도예가로서 지녀야할 정신과 혼을 가르치셨다. 아무리 선친의 뒤를 쫓으려 해도 역부족이었다.”고 술회한다.
선친의 호인 ‘해강’을 승명 받은 그는 1988년 전국 공예품 경진대회 대통령상을 비롯해 2001년 옥관문화훈장서훈, 2006년 대한민국 도자기공예명장 선정 등 다수의 상장과 포상을 받으며 청자도예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또한 1990년에는 부친과 함께 그간 소장해 온 유물을 사회에 환원하고 도자학술 연구 활동을 지원하고자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에 해강도자미술관과 해강청자연구소를 건립했다. 이후 사재의 많은 부분을 미술관 운영과 지역도자문화 발전을 위해 기증하는 활동을 보여 왔다.
그러나 최근의 척박해진 전승도자에 대한 인식은 미술관 운영에 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해마다 8명 직원의 인건비와 운영비만 억대의 비용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다. 이천시에 미술관을 기증 해볼까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다행히 2006년부터는 이천시에서 년 간 6천만원의 운영비를 지원해주고 있어 그나마 숨통이 트인 상황이다. 유광열은 이같은 상황의 가장 큰 이유를 미술관을 찾아주는 관람객도, 유물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닌 자신 스스로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전승·전통도예가들에게 있다고 자책한다. 그는 “60년대 한일국교정상화 시기에 많은 전승도예가들이 어렵지 않게 돈을 벌어왔습니다. 가마불을 때면 가마떼기로 작품을 사들이는 일본인들이 있을 정도였지요. 그러다 보니 도예가들 스스로 어려운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을 잃게 된 것입니다.”라고 전한다.
그는 선친이 타계한 1993년 경부터 자신의 작품성향에 대해 적극적인 변모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그러한 모습에 주변 동료 혹은 선후배들의 많은 질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념은 더 견고해졌다. ‘장인정신’이라는 전통의 좋은 기법을 계승해 그 가치를 잇는 다는 개념은 확고히 인식하면서 시대흐름에 맞는 청자를 창조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그동안 자존심을 내세우며 등한시 해온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며 객관적 평가를 받기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 시대에는 명장심사에도 공모전 입상 경력이 필요합니다. 전승 작가들의 인식이 속히 탈피돼야하는 상황인 것입니다.”라고 전한다. 이같은 깨달음은 70세까지 무명도공으로 지내오신 선친이 남긴 교훈이었다.
고려청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의 하나로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애호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 선조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청자를 만들었다. 제작 초기에는 중국의 청자생산기술의 영향이 지대했지만 본연의 미적 감각을 토대로 더욱 완숙한 기량과 독특한 유색, 장식기법 등을 통해 중국과 구별되는 높은 수준의 작품을 창조해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 최고의 청자일 뿐이다. 유광열의 청자는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그 시대적 흐름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시대 명품 청자가 지닌 고풍스런 멋과 전통을 계승해 새롭게 해석하고 변용된 이 시대의 멋이 공존하고 있다. 그의 이번 첫 개인전에는 오랜 기간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며 재창조해 온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청자 연작과 그 작업의 모태가 되었던 고려청자 유물이 비교 전시될 예정이다. 단순히 시대 순의 진열된 청자유물전시에서 벗어나 오늘의 시각으로 우리 최고의 문화유산인 청자의 미래를 가늠해 보자.
< 더 많은 자료는 월간도예 2007년 12월호 참조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