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로드②
외고산 옹기마을의 파수꾼
“물건에 따라서는 언제까지라도 현재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싶은 것이 있는 법이지. 그런 건 큰 유리 상자에 넣어서라도
가만히 놔둬야한다고 생각해. 그게 불가능한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불가능이 너무나 안타깝거든.”
-홀든 콜필드,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중
외고산옹기마을
1957년, 경상북도 영덕에서 옹기공장을 운영하던 허덕만 옹기장이 부산과 가까운 울주군 온양읍 고산리에 옹기가마를 축조하고 옹기를 굽기 시작했을 때부터 외고산옹기마을은 시작됐다. 한국전쟁 후 피란민이 모인 부산은 생활에 필요한 옹기의 수요가 높았다. 따뜻한 기후로 인해 일 년 내내 옹기를 구울 수 있고1) 또, 지역의 흙인 미사토를 이용해 축조한 옹기가마는 4~50년은 거뜬히 사용할 수 있어 전국 각지의 옹기장들과 보릿고개로 생계가 어려운 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자연스레 옹기산업은 발전했고 마을도 번성했다. (당시 남창역을 통해 기차로 서울 등 내륙지역에 옹기를 공급했고 부산항을 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로 수출하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 말,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옹기가마를 가지고 있는 옹기점만 20여개, 근무자들은 400여명이었던데 반해, 지금은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현재 이곳에는 신라가야토기의 장성우 옹기장(62), 경남요업의 서종태 옹기장(62), 금천토기의 진삼용 옹기장(76), 성창요업의 조희만 옹기장(69), 영화요업의 배영화 옹기장(75), 옹기골도예의 허진규 옹기장(51), 일성토기의 신일성 옹기장(73)이 운영하는 7개의 옹기점과 종사자 2~30여명이 옹기마을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옹기를 제작하진 않지만 옹기전문판매상도 18곳 있다.)
경상도의 옹기
서울에서 온 이방인들을 위해 배영화 옹기장이 옹기제작시연을 보여주기로 했다. 17살 때 처음 옹기를 시작해 58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기술을 짧은 시간 편히 보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경상도옹기의 제작과정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그의 공방으로 향했다.
옹기장은 차분하게 물레 앞에 앉아 6각형의 흙타래를 어깨에 척-하니 올리고 쌓아 나간다. 그 후 도개와 수레를 이용해 쌓은 흙을 쳐댄다. 경상도지역 특유의 ‘배기태림’기법2)이다. 이게 수레질이다.(배영화 옹기장은 수래가 꼭 부채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채질”이라고도 한다). 옹기장들은 자신의 손에 맞게 직접 나무를 깎아 도구를 제작하는데 이번엔 나무버전의 반달무늬돌칼 같은 도구가 나타난다. 이건 근개다. 근개로 수레질이 끝난 표면을 정리한다. 몇 마디 나누는 새 그가 전을 정리한다. 이 과정을 전잡기라 부른다. 40리터짜리 커다란 쌀독을 손수 만드는 데 고작 삼십여분이 걸렸다. 이번 시연에서 당연히 배가 부른 경상도 옹기를 제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성된 결과물은 일자형의 쌀독이었다. 현대인의 주거문화가 마당에서 베란다문화로 변하면서 배 불룩한 형태보다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날렵한 일자형 옹기를 제작한다고 한다.(최근에는 귀농인구도 늘어나 전통적인 옹기형태를 찾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또 다산을 상징하던 게 문양의 그림도 현대에 들어 많이 생략됐다. 언제까지나 전통의 범주에 머무를 것만 같던 옹기도 천천히 21세기의 옷을 입고 있었다.
# 일부 내용과 이미지는 생략되었습니다.
전체 내용은 월간도예 본지를 참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