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의 도예교육 현장은 현재 재편되고 있으며 구조조정 중에 있다. 어느 대학에서든 도예 관련 전공은 어려운 상황에 있을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예 관련학과는 학과의 명칭변경과 교과목 개편 등 입시환경에 따라 일부 변화를 시도해왔다.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취업환경의 대응과 도구의 진화에 대한 적극적이고 효율적이기보다는, 대개 학교 본부 등의 타의적 요구에 의해 상황을 주시하며 안이한 대처에 그쳤던 측면도 있었다. 출산율의 저하가 2010년 전후부터 입학자원의 감소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예상되면서, 미술 관련 학과의 관습적 상황은 급격한 변화에 접어들게 되었다. 대학 구조개혁의 일환으로 시작된 학부제 실시 이후, 구조조정 단과대학과 학과의특성화, 경쟁력 강화, 선도학과의 육성이라는 익숙한 명제 속에서 디자인계열 중심의정책 환경은 도예 관련 학과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는 실정이다.
도자공예학과 도예학과의 명칭조차도 개선의 대상이 된지 오래이다. 타전공과의 통합,복수전공제도로의 환원, 평생교육연구원 전환, 폐과 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향후 5년간 지속적으로 정리되며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진행의 로드맵은 일본 대학 도예교육의 현장에서도 동일하게 수순을 밟으며 정리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우선의 문제는 도예의 사회적 인프라가 거의 획일화 되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취업 환경과 수십 년 동안 비슷한 학사구조 속에서 변화하는 취업환경에 대한 적극적인프로그램의 개발이 취약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현재 각 대학에서 학과의 평가요소가취업률이 우선되면서, 순수미술 공예계열, 영화, 영상 계열은 일방적인 저 취업의 구조에서 허덕이며 조정의 당사자로 전락하고 있다. 현 정부에서 미술계열의 학과는 평가에서 취업률을 배제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지만, 대학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평가 요소로작용하고 있다. 학과 전공 간의 상대적 경쟁을 유도하는 대학에서는 4대보험이 가능한집단의 취업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보험 등 조건에 취약한 전문공방의취업은 인정되지 않는 구조의 조건에 있다. 학생들 또한 미술대학에서 상대적으로 낮은입학경쟁의 공예 관련 학과의 지원은 입학 이후 전과와 편입, 휴학으로 이어지며 공동화 현상도 초래해 더욱 도예 관련 학과의 경쟁력을 위축시키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스마트 시스템과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젊은 세대를 설득하지 못했거나 변화없는 안이한
대학 종사자의 안주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교수의 세대 간 교체가 일어난 지난 30년 동안 대학 도예교육의 대·내외적인 변화는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배정된 학생들 중심으로 얼마나 미래를 고민하고 젊은 세대들의 트렌드를 반영한 취업보육 등에 관한 교과목 개발과 교수 그리고 서비스가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자. 시설개선과 공간의 변화를 제외하면 별로변한 것이 없는 교육환경이다.
이제 대학은 더 이상 이상을 꿈꾸는 도예의 공간이 아닌 변화와 개혁의 대상으로 그 위기를 맞고 있다. 해방 후 1950년대 대학에 도예 관련학과가 개설되면서 오늘에 이르고있다. 1세대 교수였던 집단은 이미 은퇴하였으며, 2세대 집단도 거의 은퇴하고 있다. 이제 3세대 베이비 붐 세대들의 집단만이 3년에서 7년의 은퇴시기를 남겨두고 있는 현실이다. 한 때 대학은 도예전공학도들의 이상실현의 현장으로 존재해 왔었다. 그러한 구조는 자생력을 갖추어 가는 전업도예의 환경을 방해하기도 했다. 3세대에 이르는 동안인력의 교체와 시설의 발전 도구의 진화를 이루었으나, 학문의 성격을 고려하더라도 교육방법과 교과목 운영 등 소프트웨어의 환경은 거의 변화 없이 전승되어 왔다.
새로운 세대교체의 시기에서 대학은 공정하고 필요한 미래에 부응할 수 있는 유능한교수 인재를 영입해야 한다. 인적 네트워킹에서 벗어나 학과의 특성과 미래를 지켜나갈수 있는 적합한 인재들이 초빙되어야 한다. 위기극복의 당위성은 교수 중심에서 학생중심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우수한 교수요원은 충분하다. 젊고 유능한 작가로서 작업능력의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객관적 인정치가 적용되는 교육현장의 인력관리가 실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은매 학기마다 교수평가에 훈련되면서 교수의 능력과 가치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철학과 인성이 교육환경에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많은 인원이 필터링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교수집단이 형성되었다. 대학의 구조조정과 함께 시급한 교수인력의구조조정도 병행되어 정리될 것이다.
향후 전문대학과 지방대학은 일정 수준 정리의 수순을 밟을 것이고 수도권과 대도시중심의 사립대학과 국립대학의 일부 학과만이 수요에 부응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이다. “20세기의 교실에서 19세기의 교수들이 21세기의 학생들을 가르친다”라는 농담이 섬뜻하게 다가온다. 이제 뼈를 깎는 정리를 통해 한국대학의 도예교육은 새로운 교과환경의 변화와 융복합의 건전한 수용을 통해 새로운 모색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근대의 준비 학교의 태동
1883년 경기도 분원의 사옹원이 폐지된 이후, 1900년 프랑스 세브르요업소에서 레미옹이란 도예교사가 정부 초청으로 서울에 왔다. 부임한 프랑스 공사가 한국에서 목격한 놀라운 역사의 도예환경을 재건하기 위해서 서울에 공작학교(공예학교)를 설립하고자 함이었다. 당시 유럽은 ‘아트 앤드 크래프트운동’으로 새로운 공예의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의 외세의 각축장이었던 우리의 정치상황과 재정의 빈곤, 그리고 일본의 노골적인 방해로 학교의 설립은 무산되었다. 레미옹은 4년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한국의 백토를 사용해 인물의 부조 등 다양한 작업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당시 프랑스어학교에 다니던 고희동이 그의 영향을 받아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하였다. 이후 일본은1904년 상공학교를 농상공학교로 개편하고 1907년 관립공업전습소로 개편하며 상공미술 기능자를 양성하였다.
당시 황성신문 장지연은 ‘논공예장려지술’ 논설에서 “광주 분원의 자기가 외국에서도 칭찬을 받고 있으나, 서양처럼 공예품을 장려하지 않고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큰 차이가난다. 잔재된 양반사회의 계급적 윤리의식과 탐관오리들이 공예기능인을 침토하고, 조제품을 만들어 공예인들의 이탈을 부채질 했다”라고 쓰고 있다. 이후 농상공부에서 공예장려책을 공고하고 우수한 공예품을 시상하는 제도를 실시한다고 했을 때도 그는 공예의 장려라는 긍정적인 실천을 주도하자고 역설하였다. 그는 우리의 공예 역사의 자긍심을 부흥하고 주체적인 공예의 진흥을 역설하였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노골화되고 한국전쟁으로 거의 파괴된 한국도예의 상황은 공백기로 접어들었으며 자생적 진화는 어려운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산업화 정책은 수공예시스템으로 이어오던공인들이 원망을 품고 떠나고 공예품 제조의 손을 놓는 상황에 이르게 하였다. 늘 발전의 과정과 속도는 그 방법과 규모를 달리 할 뿐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공업전습소는 1916년부터 경성공업전문학교의 부속기관으로 전환되었고, 1922년 일반공업학교로 승격되었다. 1908년에는 왕실의 재정 투자로 전통공예를 진작시키고자 민영 한성미술품제작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1922년 일본인에게 운영권이 넘어갈 때까지 경영과 기술은 모두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지며 보조금이란 명목으로 왕실의재산을 갈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매일신보에는 창덕궁 비원에서 구워내던 ‘비원자기’가 과거의 전통을 잘 재현하고 있다고 기사를 썼다. 한일합방이후 민족의 자각 정신으로 도자기전통을 산업화하기 위한움직임이 전개되었다.
처음으로 공업전습소 졸업생 한태익이 일본 아이치 현립도기학교로 유학을 떠났다.1920년대 이후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시장산업 중심의 기업화 현상이었고, 또 한 축은 공예미술적 접근이었다. 1920년대 한국도예는 문화의 주체적 정리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세키노테이나 야나기무네요시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은 감상주의적 미의식과 민예중심의 사고에 의해 찬미되고 지배되었다. 일본인 특유의 골동 취향과 식민의식은 재현과 복제의 대상으로 사육되며 전통도예란 이름으로 부정적 풍토를 조성하게 되었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7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