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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월호 | 뉴스단신 ]

조선을 노래한 일본인 야나기 가네코
  • 편집부
  • 등록 2018-02-08 14: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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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야나기 집안의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야나기 무네요시,어머니 가쓰코, 아내 가네코. 앞줄 왼쪽부터 장남 무네미치, 막내 무네타미, 차남 무네모토

 

조선이 일본에 병탄 되어 조선 사람이 심한 핍박을 받고 살던 그때. 남편 야나기 무네요시가 사랑한 조선의 도자기와 예술을 함께 사랑하며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에 건너와 조선을 노래한 일본여류 성악계의 거장 야나기 가네코. 광복 70년 주년과 한일수교 50년을 맞으며 그녀의 환상적인 성악 무대를 회상해 본다.

 

문옥배 한국공예산업연구소 전문위원

삶에 대한 희망을 솟아오르게 하는 음악을 괴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 사람들에게 노래로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 야나기 가네코柳兼子:1892.5-1984.6는 조선에서의 음악회 개최를 계획한다. 가네코는 일본에서 공예의 아버지라 불리는 공예 이론의 대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97-1961의 아내이며, 도쿄 음악학교 예과와 본과 그리고 연구과를 거친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그녀는 훗날 일본여류 음악계를 이끈 최고의 음악가가 되었고, 세계적으로도 여성성악가로 명성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조선의 아름다운 예술에 빠져 공예의 길을 걷게 된 야나기 무네요시가 「요미우리」 신문에 발표한 ‘조선인을 생각함’이라는 글을읽고 1914년 9월 초순 도쿄의 아비코에 있는 야나기씨 집을 찾아간 남궁벽南宮壁1894-1921과 그의 동지인 「폐허廢墟」의 동인들이 야나기부부와 교류하며 늘 그들의 조선 활동을 도왔다. 가네코의 조선음악회를 처음 구상한 것은 남편 무네요시이었으나 “가네코씨 당신의 노래를 우리 조국에서도 들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는 남궁벽의 간청도 한몫을 했다.
조선에서의 음악회는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첫 번째 주최하는 문화사업으로 한 달 뒤에 개최하기로 논의되고 있었다. 이 음악회는 조선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서양음악회가 될 터였다. 때를 같이하여 조선의 문학동인지 ‘폐허’가 김억, 황석우,염상섭, 남궁벽, 변영로, 오상순 등이 주축이 되어 막 태동하고있었다. 이들 ‘폐허’ 동인들이 중심이 되어 가네코의 음악회를 준비하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경성(서울)에서는 동아일보 정치부기자인 염상섭廉尙燮1897~1963이 주동하여 폐허 동인들과 함께 준비를 도왔고, 일본에서는 무네요시가 남궁벽과 함께 계획을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따뜻한 봄날 봄꽃이 한창일 때, 드디어 음악회를 위한 조선행이시작되었다. 가네코가 아비코 자택을 출발하여 5일째인 1920년5월 3일 영등포역에 닿았을 때 낯익은 얼굴들이 기차에 올라왔다. 남궁벽과 염상섭 변영로, 그리고 조선의 민예를 사랑하며 조선에 살고 있던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1884-1964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형제였다. 남대문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조선의 엘리트 신여성으로 대표되는 화가 나혜석과 의사 허영숙도 마중을 나와 있었다. 기차역 밖에서는 무네요시와 가네코를 연호하는 군중들의 함성 소리가 역사 광장에 울려 퍼졌다.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가네코는 너무도 뜻밖의 환영에 감개무량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그날 저녁, 폐허 동인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무네요시는 “예술의 동산에서라면 우리는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내도 그런 믿음으로 해협을 건너왔습니다.”라고 인사말을 끝내자 가네코에게도 한마디를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가네코는 내일 제가 부를 곡 중에 ‘베버’의 가극 「자유의 사수」 속아리아가 있습니다. 그 곡은 이런 가사로 시작됩니다. “비록 구름에 싸일지라도 태양은 여전히 천국의 막에서 빛나네. 거기서는 성스러운 의지가 모든 것을 통솔하지, 저의 노래가 여러분의 마음에 태양 빛을 비추기를 바랍니다. 노래를 통해서 성스러운 의지가 여러분의 가슴에 가 닿기를…,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노래하겠습니다.”라고 인사를 마치자 따뜻한 박수 소리가 가네코를 감쌌다. 다음날 동아일보에는 “淸楚청초한 柳兼子류겸자(야나기 가네코)부인 今夜금야의 大獨唱會대독창회”라는 타이틀과 함께 가네코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드디어 1920년 5월 4일 저녁 8시 염상섭의 사회와 통역으로 음악회의 막이 올랐다. 음악회 장소는 종로대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관’이었다. 1,300석의 좌석이 차고 넘쳐 말 그대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음악회의 시작을 알리는 곡으로는 가극 「미뇽」 중 “그대는 아는 가 저 남쪽 나라를”이라는 아리아 곡이 첫 번째로 무대에 올려졌다. 첫 번째 곡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지하에 갇혀 있었던 활화산의 마그마가 뿜어져 나오는 것과 같은 뜨거운 감정의분출을 억누를 수가 없었던 듯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계속해서 두 번째 곡 “불쌍한 아이가 먼 데서 왔다”는 아리아 곡이 이어졌다. 관객들은 더욱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기까지는 시작에 불과했다.
마침내 본격적으로 1부가 시작되고, 첫 번째 곡인 슈베르트의“저녁노을 속에서”가 흘러나오자 관객은 천천히 황혼의 정적 속으로 녹아들었다. 두 번째 곡 “죽음과 소녀”, 세 번째 곡 “봄의 신앙”이 끝나자 모두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더러는 눈시울이 젖어 반짝였으며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1부의 마지막 곡은 ‘마이어베어’의 가극 「예언자」 중에서 “아아, 내 아이야”와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아리아 두 곡이이어졌다. 곡이 끝나자 관객들의 흥분과 감동으로 회장은 들떠있었고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1부가 끝나고, 2부의 서두 음악으로 “자유의 사수”의 여주인공아가테의 아리아 “비록 구름에 싸일지라도”가 올려졌다. 두 번째곡은 베르디의 가극 「일트로바토레」의 아리아 곡인 “불길이 번쩍인다”가 이어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슈만의 “달밤”이 불리고 차이콥스키의 “어찌 장미는 이같이 야위었나”가 이어졌으며, 연이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무”가 올려졌다. 마지막 피날레 곡으로 가네코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비제가 작곡한 가극 ‘자유의 대명사’라는 「카르멘」 중에서 “하바네”와 “세기디야”로 마무리를 장식했다.
그 밤의 마지막 곡인 “세기디야”는 사람들을 흥분의 절정으로 끌어 올린 뒤 끝을 맺었다. 회장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어 들끓었다.가네코의 열정적인 노래가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고, 가네코 역시관중의 환호에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관객들은 마침내 “류겸자”를 부르며 열렬한 함성을 지르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음악회는 기대 이상의 대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가네코에게이번 음악회는 예전의 공연과는 전혀 다른 매우 큰 감동을 주었다. 마음에 가두었던 벽을 허물고 자유의 바람을 불러오는 환희의 아침 같은 공연이었다.
다음날 동아일보에는 “聲如玉성여옥, 客如醉객여취(구슬 같은 목소리, 취한 듯한 관객)”라는 큰 제목을 붙였다. 그 밑에 “대성황을이룬 류겸자 부인의 독창회, 만장을 느끼게 한 천재의 묘음”이라는 소제목을 부쳐 대서특필로 자세하게 보도했다. 이후 가네코는 십여 일을 경성에 머물면서 숙명여학교를 비롯하여 일곱 차례나 더 음악회를 가졌다. 가네코의 음악회는 말 그대로 조선 사람들에게 마음의 정으로 바치는 노래였다. 이번의 여행 경비는 전부 자비로 부담하고, 음악회 수익금도 전액 조선문화진흥사업을위해 기부하였다.
한편, 음악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일본에 돌아온 가네코 남편무네요시는 마침 집으로 찾아온 아사카와 다쿠미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근무/ 조선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조선의 흙이 되고자 하여 망우리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음를 만나 조선의 예술과 민예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선의미술품이 자꾸 사라져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데 의기투합한다. 그리하여 한 나라의 미술은 그 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사랑을 받고 보존돼야 한다는 확실한 목적의식 아래 조선에다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기로 계획한다. 설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무네요시는 아내 가네코의 음악회 수익금을 모아서 보탤 작정이었다. 이때 이들의 조선미술관 건립에 동의한 가네코는 자금을마련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또다시 음악회를 갖기로 마음을 먹는다. 가네코도 남편 무네요시가 사랑한 조선의 도자기와 예술을무척이나 좋아했었다. 특히 아사카와 노리다카다쿠미의 형/조선 도자기의 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졌음가 무네요시에게 선물한 조선백자「청화백자추초문각호」 일본민예관 소장의 아름다움에 크게 공감한 가네코는 그전보다 더 조선에서 노래를 하고 싶어 했다.
결국, 음악회는 1년 전의 음악회 때보다 한 달쯤 늦은 시기에 다시 조선에서 갖기로 하였다. 이번엔 지방을 순회하면서 가네코는음악회를, 무네요시는 강연회를 개최키로 계획하였다. 남궁벽이행사장소 확보에서부터 각지의 명사들과 다리를 놓는 일 등 여러일을 맡기로 함에 따라 사실상 매니저 역할을 하였다. 이번에도동아일보사가 후원하기로 하여 1921년 6월 4일에 개최될 음악회에 대한 안내가 1주일 전부터 동아일보에 게재되고 있었다. 음악회는 천도교 중앙회당에서 저녁 8시부터 개최되었는데, 일찍부터 1,000명도 넘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뤘다. 가네코의 이번 음악회는 특별히 조선민족미술관 건립 후원이라는 명분이 뚜렷함으로 ‘사랑의 노래로 시작해서 기도로 승화시켜 가겠다.’라는 다짐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음악회는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장인 이상협이 사회를 맡고 동아일보사를 대표하여 주간인 장덕수가 개회인사를 했다. 가네코가소개되고 조용히 멜로디가 흘렀다. 조르다니의 “카로 미오 벤나의다정한 연인”으로 시작하여 슈베르트의 가곡 “거문고에게”와 “소야곡”이 소개됐다. 다음 고르다의 폴란드 무곡으로, 로시니의 가극 「세비야의 이발사」중 아리아 “방금 들린 음성은”이라는 곡으로 1부를 마쳤다. 2부는 생상스의 가극 「삼손과 델릴라」의 아리아 “오오. 사랑이여! 나의 마음에 힘을 주오”로 시작하여 차이콥스키의“나의 근심을 아는 자만”과 글루크의 “꽃 피는 5월이 왔도다”가올려졌고, 다음은 슈베르트의 가곡 중 “실비아에게”와 “환영” 이이어졌다. 그리고 케루비니의 “아베마리아”를 부른 다음 바그너의 가극 「탄호이저」 중에서 “엘리자베트의 기도”로 막을 내렸다.기도의 노래는 이런 내용이었다. “슬픔이 치유되기를, 순수한 영혼이 좌절을 맛보지 않기를, 쓸쓸한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나의 노래를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기원의 노래가끝나자 청중들은 감격의 눈물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노래를 마친 가네코가 청중을 바라보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던 객석에서 천둥 같은 박수와 환성이 터져 나왔다. 대지를 뒤흔들어 놓은 듯 흥분의 소용돌이가 회당 가득 퍼져 나갔다. 다시 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에서 음악회는 이렇게 또 한 번의 성공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4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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