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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월호 | 뉴스단신 ]

각刻과 화畵, 분청사기의 진면목
  • 편집부
  • 등록 2018-02-04 23: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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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얄(붓)기법 백토분장

 

 

우리나라의 도자문화는 10세기 전반에 처음 자기磁器가 제작된 이래 고려시대에는 비색翡色과 상감象嵌청자에서, 조선시대에는 분청사기와 백자에서 다양한 면모를 보이며 전개되었다. 이중 조선시대 전반기에 일어난 가장획기적인 사건은 분청사기의 소멸과 왕실용王室用과 국용國用 백자의 생산을전담한 관요官窯의 설치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에 국가를 운영하는데 소용된 대표적인 공용公用자기였던 분청사기는 전국에 산재한 여러 곳의 자기소磁器所에서 제작되었으며 그 양식적인특징은 그릇 전체를 빼곡하게 채운 인화문印花紋에 있다. 그러나 1430년대에 세종世宗이 상식용常食用의 어기御器로 금은기金銀器 대신 백자를 사용하고1440년대에는 분청사기 외에 공납용 백자의 제작이 본격화되면서 인화문으로 대표되는 분청사기의 양식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즉 정밀하게 시문된 인화문 분청사기의 절제된 미감과는 다른 철화기법과 조화기법 분청사기가 지역을 달리하여 제작되었다. 이후 1469년에 완료된 관요의 설치는1) 전국에 산재한 많은 분청사기 가마가 백자를 제작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분청사기는 16세기 초반에 이르러서 마침내 그 제작이 중단되었다.
본 글은 15세기 중엽에 전개된 분청사기의 양식변화를 고찰하고 1450년대에서 1470년대 사이에 동일한 소재의 문양을 충청도에서는 철화기법으로, 전라도에서는 조화기법으로 제작한 분청사기의 지역적 특색이 나타난 배경을 살펴보았다.
분청사기의 양식변화
‘하얗게 분장을 한 회청색의 사기’인 분청사기粉靑沙器는 태토위에 백토白土를 바르는 과정에서 다양한 장식기법이 발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분청사기를 ‘미시마데三島手’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우현 고유섭又玄高裕燮선생은 분장수법粉粧手法이 그 특색임을 들어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砂器’라고 명명하였다.2)<도1> 고려시대 말기와 조선시대 전기의 문헌에는 분청사기라는 용어가 기록된 것이 없으며, 당시 사람들은 “자기”와 “사기”瓷器·磁器·沙器·砂器라는 명칭으로 사용하였다.3)
경기도 광주廣州에 관요가 설치되기 이전에 공적인 용도의 자기는 대부분전국에 흩어져 있는 자기소磁器所에서 현물의 세금인 공물貢物로 제작된 분청사기였다. 공납용貢納用 분청사기는 기종별 형태, 장식기법, 문양의 종류와 구도 등이 규격화되었으며4) 그 특징은 그릇의 안팎을 빈틈없이 채운집단연권형集團連圈形 인화문에서 가장 뚜렷하다.5) 인화문 분청사기는 세종의 재위기간(1418-1450년)인 1420년대에서 1450년대에 절정에 달하였다.이러한 분청사기의 양식은 1440년대에 공납용 백자가 본격적으로 제작되면서 급격하게 변화하였다.6)
분청사기의 양식변화는 제작시기에 따라 뚜렷한 차이가 있는 장식기법에잘 나타나 있다. 고려 말 상감청자의 장식에 대등하게 사용된 상감기법과인화기법은 조선시대 초기인 15세기 1/4분기에는 주문양대의 장식기법이인화기법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인 1380-1420년 경 사이의 청자靑磁와 분청사기粉靑沙器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의 자기는 제작시기가 비슷할지라도 그릇의 형태, 태토, 문양의 종류와 시문기법 등 양식樣式에 따라 청자와 분청사기로 구분할 수 있으며 그 실례에문양종류와 시문기법이 다른 두 계통의 공안부명자기가 있다.<도2>7)

‘청자상감모란(연화)당초문공안명대접靑磁象嵌牧丹(蓮)唐草紋恭安銘大’과 ‘분청사기인화국화문공안부명대접粉靑沙器印花菊花紋恭安府銘大’에8) 표기된 공안부恭安府는 태종太宗이 직위한 직후 상왕上王이 된 정종定宗을 공상供上하기 위해 설치되고 세종世宗 2년에 폐지되기 때문에 이들 대접은 그 제작시기가 1400-1420년이다.9) ‘상감공안명대접’의 모란당초문은 고려 말 간지명상감청자문양의 한 종류로 상감기법으로 시문된 정형화된 모란당초문이 정릉正陵명상감청자(1365-1374년) 단계와 사선司膳명청자(1389년경 이후-1410년대) 단계를 거쳐 양식적으로 변화하여 조선 초까지 이어진 예이다.10) 또‘인화공안부명대접’은 13세기 상감청자에서부터 14세기 간지명상감청자와 정릉명청자 단계에 걸쳐서 대접과 접시에 지속적으로 사용된 인화상감기법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러한 전개과정을 거친 인화국화문은 1400년에서 1420년 경 사이에 대접과 접시 내외면 전체에 주문양으로 시문되었다.11)
인화문은 공납제貢納制의 체제에 따라 각 도道의 자기소磁器所에서 사기장인호沙器匠人戶가 제작하여 해당 지방관守令의 책임아래 궁궐안팎의 여러 관사에 상납上納한 공납용 분청사기의 가장 큰 특징이다.12) 공납용 분청사기는태종 14년(1414)에 자기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공물方物을 제작할 때에 중앙정부가 제시한 견양見樣에 의거하도록 조치한 이후 제작지역에 상관없이 형태, 문양구도 및 종류, 시문기법 등이 규격화되었다.13) 이와 함께 인화문印花紋은 시문양상과 방식에 큰 변화가 나타났는데 하나의 도장으로찍는 단독인화기법單獨印花技法 외에 가늘고 긴 장방형의 구획 안에 동일한문양 여러 개를 새겨 한꺼번에 찍는 집단연권인화기법集團連圈印花技法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특히 꽃 또는 점點 형태의 문양 3-5개를 하나의 구획 안에 새겨서 찍는 집단연권형 인화기법은 세부 문양의 형태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전국에서 제작된 공납용 분청사기에 동일하게 사용된 장식기법이다. 집단연권인화문이 시문된 가장 이른 시기의 자기는 경승부敬承府,1402-1418년명 분청사기이다. 공납용 분청사기에 나타난 인화기법의 종류 및실례는 <도3>과 같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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