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가 스스로를 돕는단 말인가. 그래도 무언가 가이드라인이 될만한 어떤 방법이 제시되어질 때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을지. 그래야만 ‘나’와 같이 지혜가 부족한 이들을, 그리고 ‘나’와 같이 가난한 이들을, 또 ‘나’와 같이 불쌍한 이들을 스스로 도울 힘을 갖게 해주지 않을까. 하늘이 무엇이건데 이토록 쉽게,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며 스스로 해결해 볼 것을 완곡하게 강요하는지… 지금 창조의 길앞에 선 사람들에게 이 말은 일종에 계시처럼 들리며 때로는 힘든 고통의 순간을 넘겨주는 진통제 같은 역할을 해준다. 하지만 스스로도 스스로 나름이거늘 ‘나’와 같이 아무것도 없는 이가 감히…
이 힘들고도 힘든 세상, 어렵디 어려운 공예의 영역 안에서 좋은 공예가가 되기 위한 방법을 어찌 스스로에게만 의지해 찾을 수 있다는 말인지. 그러나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인간의 역사와 함께 오랜 시간을 이어 온 우리의 공예가 과연 스스로에게만 의지해 그 찬란한 공예의 모든 것을 이룩했던가. 그것이 아니었다면 공예는 무엇에 의지해 그 오랜 시간을 꿋꿋이 버텼으며 어떠한 힘이 첨단의 시대도 아닌 천 년 전 과거에 고려청자만의 독특한 비색을 만들어냈고, 또 그 비색을 비가 온 뒤 맑게 갠하늘이라 여겼으며, 그 안에 상상을 더하여 학과 구름이 마치 맑은 하늘을 나는 듯 표현할 수 있게 했을까. 어쩌면 지혜가 부족했을, 가난했을, 또 불쌍했을 지금의 나와 같았던 직인들을 그토록 창조로울 수 있게 도와주었을까. 그래서 역사 속 찬란했던 공예들은 하나, 하나가 사실 기적의 산물들이다.
기적을 믿어야 하고, 기적이 반드시 존재해야하는 곳은 바로 종교의 영역이다. 그 안에서는 실제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돕는 것도 역시 종교적인 의미에서 기적이라 볼 수 있다.대표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천주교와 기독교는 성경을 교리로 믿는다.
성경의 신약은 많은 부분이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 졌다. 널리 알려졌듯이 예수한테는 12명의 제자가 있었고 그들의 면면을 따져본다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도울 수조차 없는 이들이었다. 신약에 마태, 마가,요한, 누가복음을 쓴 이 예수의 제자들은 글을 쓰기 위한 펜 잡는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에 공동저자들이다. 이건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런데 그들을 그렇게 이끈 종교의 힘과 과거 찬란한 공예품을 만들었던 직인들을 이끈 힘은 어딘가 닮아 있다.
종교적 기적의 시작은 종교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예수를 믿을 때, 석가모니를 믿을 때 기적도 함께 시작된다. 믿음이 종교의 힘을 만들고 그 힘이 다시 기적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종교는 믿음, 믿음은 기적, 다시 기적은 곧 종교에서라는 순환의 고리로 서로가 묶여 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공예 역시 직인들은 기독교의 예수와 불교의 석가모니를 믿듯 그 무언가를 믿었다. 그랬기에 고려청자와 같은 기적을 이루어 낸 것이다. 공예에 있어 기적을 가능케 한 종교와 같은 커다란 힘을 갖는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그토록 외면하던 ‘전통’이었다. 그들은 전통에 의지해 그 가르침을 믿고 따랐고 그것이 과거 직인들을 스스로 돕도록 도와준 종교의 신과같은 역할을 했었다.
종교의 믿음은 기적을 만들지만 종교를 갖는 삶은 자유가 아닌 곧 신에게 구속되는 삶이다. 자신의 마음에 주인자리를 ‘나’ 아닌 신에게 내주고 신에게 복종할 때 종교적 삶이 시작된다. 그래서 구속은 달콤하지않고 쓰기만 하다. 중세가 자신을 버리고 신에 대해 복종하는 쓰디 쓴시대였다면 근대는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는 달콤한 시대였다. 과거에 직인들 역시 공예를 위해 전통을 신처럼 믿고 복종했다. 좋은 공예품을 제작하기 위해 직인들은 그 마음의 주인을 자신이 아닌 전통에게 맡겼다. 12제자가 자신을 버리고 따라간 신앙의 길이 놀라운 종교적 기적을 일으켰듯 자신을 버리고 전통을 따라간 직인들의 길 역시찬란한 공예의 창조적 기적을 일으켰다. 공예에 있어 전통은 큰 배에서항로를 유도하는 나침반처럼 직공들을 올바른 방향을 따라 안전하게항구에 도달할 수 있도록도왔다.
“그러므로 전통에 의지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해방이요, 구제였다. 법칙이 그들을 제약하는 일이 없었다면, 그들은 쉽게 해방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부질없이 방황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종교의 깊은 이치를 알기 쉽게 간추려서엮은 교의와 같다. 이 교의에 의지하면 학식이 모자라는 사람도 깊은이치에 접근할 수 있다.”1)
전통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데에는 그것이 무수한 개개인의 지식이 축적된 시간의 퇴적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을 신처럼 믿고 따른다는 것은 한 세대, 한 세대를 차례차례 거치며 습득되고 전수된 기술을 배우고 그 안에 무한한 시간의 흔적들을 더듬어가는 것이기도 하다.그래서 오늘과 같이 첨단 과학이 발전하지도 않은 시대에 전통은 직인들을 시행착오 없이 언제나 안전한 길로 유도해주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전통을 따른다는 것을 속박 또는 구속이라고 생각한다. 그이유는 달콤한 자유를 추구했던 근대적 사고가 전통의 복종은 곧 개성의 상실과 자유를 구속하고 창조적 사고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실 전통은 자칫하면 생명을 잃는 형식으로 고정되는 경우도 많이 있어 왔다. 실제로 우리는 전통이 퇴색하여 더 이상 창조적 공예를 위해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종교적 믿음과 같은 역할이 되어주지 못하고, 이제 그것을 이어받는 태도가 침체된 습관으로 변해 버려 도리어 공예가들에게 구속이 되는 것을 보아 왔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시작된 전통의 퇴색과그로 인한 비판의식이 꼭 전통자체에 문제가 있어서였는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전통을 구속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반대로전통이 좋은 것이라는 점 역시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전통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전통 자체에서 찾기보다는 그동안 우리가 전통을 어떻게 운용해왔는가에 대해서도 반성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2)
“전통이란 민족이 그 선조로부터 이어받는 커다란 자산이다. 사람들은 흔히 창조는 전통과 반대의 것처럼 말을 하지만,전통이야말로 민족의 역사가 창조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 착실한 발전의 기초가 아닌가. 참다운 창조는 전통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전통을 긍정하고서 그 위에 건실한 발전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전통의 정수를 더욱더 활용하고 심화하는 것이, 전통을 이어받는 우리들의 사명이다.”3)
올바른 전통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구속이 아니라 12제자의 삶을 변화시켰던 것과 같은 종교적 구제가 되어 준다. 공예는 특히 전통이 바르게 구심점을 잡아줄 때 비로소 진정한 창조의 길로 우리를 이끌고 구제하는 힘을 갖는다. 이 종교와 같은 전통의 힘은 분명 순수예술의 창조와는 다른 공예적인 창조를 가능케 한다. 전통은 지난호에 언급했던 새롭지 않은 나뭇가지이다. 하지만 이 새롭지 않은 전통이라는 나뭇가지에서 해마다 봄이 되면 새로운 꽃이 피듯 창조적인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안전한 길을 제시한다. 그것도 ‘나’와 같이지혜가 부족한 이들에게서, 그리고 ‘나’와 같이 가난한 이들에게서, 또‘나’와 같이 불쌍한 이들에게서 말이다. 그러니 전통이 공예에 있어서기적인 것이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