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떠오르게 한다. 그의 시처럼 창조의 길은 어쩌면 숲 속 두 갈래의 길 중에 사람들이 적게 간길을 가는 것과 같은 기분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아 간다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이 길은 특별한 천재들이 가는 길이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선뜻 나서기에는 어려운 창조의 길. 시대를 앞선 천재적 예술가들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것들을 창조해내기 위해 걸어야 했던 험난한 길. 그들은 누구나 가지않은 이 고독한 길을 그렇게 홀로 묵묵하게 걸었다. 그들이 죽고 여러세대를 거쳐 하나의 이야기로 남겨진 지금… 제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삶은 참 매력적이고 멋지게 보여 진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그 당사자들이 되어 그 길을 걷는다면 결코 매력적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가지 않은 길을 홀로 걸었던, 시대를 앞선 천재 예술가들의 수는 지극히 적다. 그렇기 때문에 통계상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그들과 같은 천재가 된다는 확률은 아주 적다고 봐도 무방하다. 천재가 아닌 우리가 처음부터 이 특별한 ‘가지 않은 길’을 욕심내고 걷는다면 부담스러운 일인 동시에 위험한 모험이 된다. 허나 프로스트의 시처럼 운이 좋게도 이 길을 걷고 훗날 성공하여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었다며 회고할 수 있는 보장만 되면 멋진 일이겠지만, 그 시작점에 지금 막 서있는 이들에게 이 알 수 없는 창조의 길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이렇듯 독창적인 예술을 위한 창조의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비록 지금이 ‘창조’가 난무하는 시대라고는 해도 매순간 새롭게 예술적인 창조를 시도해야하는 당사자들에게 이일은 실로 고통스러운 과정이 동반된다. 그 창조의 길은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들로 걷는 내내 어떠한 보호도 없으며 위기의 순간마다 안정적인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위험한 길이다. 오랜 시간 축적되고 쌓여진 경험이라는 실질적인 기반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실패의 확률이 높은 불안함과 위험성이 가득한 길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사회가 너무나 ‘창조’를 강조하다보니 이 위험한 길을 가는 것이 옳은 것이라며 암묵적으로 강요하기도 한다. 그래서 숲 속 두 갈래의 길 중에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창조적이지 못하다며, 또 따라 하기에 급급하다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래서 억지로 등 떠밀리듯 그 고난의 길로 향해야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공예의 길은 이런 순수미술의 길과는 다르다. 공예의 길은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고통스럽게 홀로 가는 길이 아니다. 또 창조를 위해 이 힘든 길을 굳이 선택하여 가지 않아도 창조적일 수 있는 길이 바로 공예의 길이다. 공예의 길은 앞서간 이들을 따라가는 안정적인 여정이 보장된다.
공예 역시 그 ‘길’이 있다. 공예만의 길이 있는 것이다. 공예만의 길을 따라 갈 때 공예적인 창조성이 드러날 수 있다. 창조를 위해 꼭 어렵고 험난한 길을 자의반타의반으로 떠밀려 갈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공예의 목적이 생활에서의 쓰임에 있기 때문이다. 천재적 예술가들이 홀로 고독을 씹으며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 만들었던 특별하고 희소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예술작품들과는 달리 공예는 생활에 반드시 사용되어 질 수 있는 실용성을 필요로 한다. 이 실용성을 위해서 공예의 길은 가지 않는 길이 아니라 앞서 간 이들의 길을 따라가는 길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맞춰 창조적인 공예를 한다고 과거의 것을 도외시하고 버린 채,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는 이들에게 창조를 외치며 새로운 것만을 강조하고 순수 예술가들과 같이 새로운 길을 갈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공예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순수미술과 마찬가지로 공예 또한 ‘미’를 추구한다. 하지만 순수미술상의 미적 범주만으로 공예의 미를 구분할 수는 없다. 절대미, 숭고미, 추미등과 같은 것에 종속되는 미를 공예는 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사실 ‘미’란 사람들 각자의 구미에 맞게 취해지는 선택들이다. 이것을 가능토록 하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이성이아닌 인간의 특별한 감성이다. 미는 결국에는 인간을 만족시키는가, 그렇지 못하는가에 따라 갈리는 문제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삶의 행복과 직결된다. 우리가 잘생긴, 또는 아름다운, 개성 있는 이성들에 집착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각자의 감성이 이끄는 취향에 따른 선택이며, 이 선택을 통한 만족감이 삶의 행복을 주는 것이다. 어쩌면 순수미술이 추구하는 절대미, 숭고미, 추와 같은 미적 범주들은 실질적인 삶의 행복을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오늘 날 유명 미술관들은 이 기준에 입각해 앞을 다투어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하고 미술 작품들을 구입하여 수장고에 쌓아둔다. 그래서인지 현대미술은 쉽게 우리의 감성을 매료시키는 아름다움이 없다. 때로는 고개를 돌릴 정도로 잔인하고 기괴하며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 미적 추구가 우리의 실제적인 삶과는 다른 길로 향하고 있어 괴리감을 갖게 한다.공예의 미는 이런 순수미술과는 분명 다른 성질을 갖는다. 공예 역시 각자 감성이 끌리는 미를 근거로 그것을 취한다. 공예의 미도 일종에 취향이다. 하지만 미술관에 차고 넘치는 무거운 주제의 미술작품들과 달리 궁극적인 삶의 행복과 직결된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선택된 공예품들은 생활에서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쓰일 때 행복을 만든다. 대량 생산된 디자인 제품들에 의해 억지로 강요되는 소비와는 달리 비록 같은 용도지만 서로 다른 공예가들의 개성이 만들어내는 무궁무진한 다양함이 공예의 미로서 삶의 만족과 행복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공예의 미는 실생활과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른 선택으로 생활 속에서 사용되어 질 때 얻는 만족감이 동반된 아름다움들 말이다. 공예의 미에 실제적인 완성은 반드시 삶의 행복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미’란 감성이 이끄는 선택에서 오는 만족이며 우리 삶의 행복과 연결될 때만이 진정한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래서 공예의 길이 순수예술의 길처럼 늘 창조를 위한 새로운 길을 가야만 하는 것과 다른이유는 바로 이런 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이 순수미술의 ‘창조’와는 다른 공예의 ‘창조’를 가능도록 한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1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