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예술을 알고 예술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 생활 속에 예술을 끌어들이고, 예술 속에 생활을 담아내는 것은 현대생활 속 문화향유에 중요한 방식이다. 그 중심에 도자예술 분야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며 그 가치를 뽐내고 있다.
이번호 특집에서는 예술시대 속 도자예술이 쓰임이라는 영역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3가지 주제로 나눠 소개한다.
Paola Paronetto
「조명」paper clay, 2013
소통의 매개체로 인식되는 현대도자
어느 시대이든 예술의 근본개념 자체는 변화하지 않지만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사회의 형태에 따라 수용과 소통의 방식이 달라져 새로운 예술의 모습으로 거듭난다. 즉, 예술은 그 시대 사회변화의 맥락에 따라 새로운 미학적 개념을 진화시키며 전개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적 현상과 그에 따라 변화하는 현대인의 미의식에 대한 고찰은 작가로서 작품에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작품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행위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도자공예 역시 산업화 시대를 맞아 생활에 밀접하게 연결된 도구로서의 미적 가치에 대한 확립이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현상을 인식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바 있다. 이에 현대도예는 변화된 시대와 기술의 혁신을 확장의 도구로 삼아 다양한 시도와 흙의 본성에 대한 개념적 탐구의 표현 등으로 그 영역을 확장시켰다. 진보하는 예술의 창조적 행위를 위해서 시대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본고는 21세기 생활예술, 생활미술로서 도자공예의 확장된 역할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21세기는 미디어에 의한 네트워크가 중심이 되는 ‘디지털 융합’의 시대로 불린다. 이는 확대된 ‘소통’의 도구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인간의 생활양식과 개인의 행동양식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현대인들의 감각과 태도 등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는 인간과 사회, 인간과 사물 간의 ‘소통’에 대한 개념을 주목하여 인간의 생활양식과 개인의 행동양식에 대한 변화, 그리고 더 나아가 현대인들의 미의식에 대한 감각, 태도 등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예술의 영역에서도 ‘참여’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작품과 관람자와의 소통의 방식에 중점을 두는 작품의 사례가 많아지고 있음을 알수 있다. 대중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고 상호간의 소통을 중심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가는 것이다. 이는 현대미술에서의 다중감각에 대한 이해가 기반이 된다. 감각에 대한 관점을 확대해 시각을 절대 우위에 두었던 전통적 이해로부터 확장된 감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양한 형식의 공간 안에 존재하게 되는 조형작품의 영역에서도 감각의 확대와 지각적 경험은 주목되고 있다. 공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시각, 촉각, 후각 등의 감각들은 인간의 정서적인 면에 영향을 주고 사유하게 만든다. 즉, 공감각으로 형성되는 시각, 촉각, 후각 등의 관계는 감상자의 경험에 근거가 되고 개인의 감성적 지각에 의해 활성화 된다. 따라서 감각은 촉각이나 후각으로 인지되는 공간과 시각에 의한 공간 사이에서 오브제라는 매개체를 통해 상호 관계가 형성되고 소통으로 연계되어 새로운 가치 창조로 이어지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현대사회에서 예술의 감상자가 누리는 것은 작가의 감성, 개념에 대한 시각적 감상을 넘어 스스로의 주관적 감각을 발휘하는 창조적 체험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감상자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대해 행위 주체자로서 참여하여 일상에서 만들 수 있는 즐거운 체험을 원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의 이와 같은 변화는 미적인 것이 높아진 현대인의 미의식과 변화하는 생활양식에 따라 예술을 넘어 일상으로 확장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예술의 일상성은 생활미술로서의 공예에 대한 가치와 연계할 수 있다. 예술의 영역 안에서 공예는 유일하게 생활세계에 안에서 미적인 특질을 가진다. 미적인 질을 포함한 사물이 생활세계의 어떠한 영역을 제안하고 그것이 어떻게 수행되어 가치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에 필자는 현대 도자공예에 있어 ‘쓰임’의 개념을 21세기 예술시대 속에서 감상자와의 상호소통의 확대된 매개체로 해석하고자 한다. 공예의 기본 조건이 되는 생활 속 쓰임의 영역을 주목하는 것이다. 생활과 예술에 있어, 감성과 감각의 통섭적 접근은 융합시대의 새로운 미학의 개념이 될 수 있다. 작품에 내제된 심미적 요소와 개념이 감상자에 의한 ‘쓰임’이라는 경로를 통해 실제적 상호관계가 생성되어 새로운 창작의 발현을 시키고자 함이 초점이 된다. 물론 이미 많은 공예작품들은 우리의 생활 안에 존재하고 사용된다. 하지만 필자는 필요에 의한 쓰임의 개념을 넘어 일상의 시학이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이는 작품에 대해 감상자의 개입을 의도하고 감상자 스스로의 창작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어 생활 안에서 이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방향성을 갖는 것이다. 확장된 쓰임의 원리로 소통되는 작품은 단지 소통적 차원의 도구로서만이 아닌 인간의 의식과 행동에 미적 경험으로서의 개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적 경험은 생활 안에서 직접적 체험을 전제로 하고 일상적 경험에서 발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심리적 요소들을 포함한다. 따라서 생활 미학으로서의 도자공예는 삶의 체험과 표현, 해석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감성시대와 감성 매체로서의 도예
예술 재료로서의 흙의 감성
모든 표현 재료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강력한 내재성을 가진 재료는 흙이다. 그것은 재료 이상의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 돌이나 나무, 금속 같은 재료들보다도 훨씬 강한 내재성을 가지고 있는 순수한 재료이다. 흙은 조절되고 정제되어 있는 2차적 재료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비 규정적인 재료이다.
다른 재료들은 작가의 최종적인 행위에 의해 완성되지만 흙은 한 번의 조작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작가의 손을 떠난 후에도 스스로 변화하고 자연의 원리에 의해 새로운 상태로 진행된다. 그것은 창조행위에 대한 저항이 되기도 한다. 도예가는 흙의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저항이 큰 만큼 결과물의 매력도 크다. 붓의 성질을 장악하지 못하곤 훌륭한 글씨를 쓸 수 없듯이 도예가는 오랜 경험 속에서 흙과 불의 성질을 파악하고 재료와 과정을 장악해야만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흙을 다루어본 사람이라면 재료의 힘이 너무나 강해서 자기도 모르게 재료에 빠져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에 의해 작품의 내용과 성격이 결정되겠지만, 작가의 손이 아닌 자연의 원리에 의한 변화들도 예측하고 조정해야 한다. 불과 물, 각종 광물질들의 변화를 조절한다는 것은 일차적인 작업일 뿐, 불 속에서 최종적인 결과물이 결정된다. 바로 그러한 점이 도자예술의 특성이며 타 재료에 의한 예술과의 차이점이다.
도자의 매력은 바로 흙의 감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감성이 풍부한 만큼 그것을 다루는 방식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재료의 힘이 너무 강하다 보니 도예가들은 재료에 저항에 대응할 수 있는 관습적인 방법들에 익숙해 있다. 즉 재료에 대한 관습적인 집착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새로운 고객들의 감성에 맞는 새로운 창작을 위해 그러한 관습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필자는 오랫동안 도자분야의 전시와 학술 워크샵 등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많은 도예가들의 작품을 보았고, 많은 저명한 세계도예가들의 작업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것들을 볼 때마다 도자라는 매체의 매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손으로 빚어내는 그 광경 자체가 경이로웠다. 물레나 핀칭 이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흙을 다루고 형태를 만드는 과정들이 과학과 기술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예를 과정의 예술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습화된 방식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도예가들이 많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의도적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방식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에 비해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스타일의 창조는 새로운 방식과 만났을 때 더욱 빛난다.
수많은 세월 동안 도자를 만드는 다양한 기법들이 개발되었지만, 흙의 감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아직도 수없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미 개발된 방식 안에서의 스타일 변화가 어렵다면 방식 자체를 바꾸거나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수십 년 동안 도예가로 활동해온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의 재료공학자 수준에 버금가는 흙과 불, 재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은 매우 중요하지만, 본인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발견을 위한 노력이 줄어들게 된다. 예술은 지식에 의해 완성되지는 않는다.
감성시대와 디지털
어쨌든 흙의 내재적 특성은 도자예술이 매우 풍부한 감성을 포함하도록 만들었다. 작가의 감성과 솜씨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물론, 자연 물질에 의한 화학적 변화들이 아름다운 색과 질감을 만들어준다는 점이 도자예술의 특징이다. 즉 도자는 가장 뛰어난 감성매체로서의 조건들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셈이다.
21세기는 감성의 시대라고 한다. 사회 문화 각 분야를 감성이라는 키워드가 지배하고 있다. IQ가 아닌 EQ가 중시되고 감성경영, 감성마케팅, 감성디자인 등 가히 감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감성은 이성의 반대말은 아니지만 대비되는 말이다. 서양의 예술사학자들은 예술의 발전이 감성의 시대와 이성의 시대가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반복되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고 해석한다. 20세기가 기술과 정보가 중요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기술이나 논리보다도 감성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수년간 지속됐고 앞으로도 끝날 것 같지 않다.
21세기 초의 키워드들은 이 밖에도 여럿이 있다. 웰빙, 힐링, 퓨전(융합), 에코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키워드들을 통해 이 시대의 의미와 변화를 읽어낼 수가 있다. 또한 21세기 사회문화적 변화의 배경에는 디지털이 있다. 디지털 시대는 세계를 하나로묶어 소통을 가능케 하고 모든 정보를 손쉽게 제공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정보가 공유됨으로써 융합이 이루어지고 변화가 빨라졌다.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내야 하며, 빠르게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관심을 받기 위해선 새로운 버전을 내놓아야 하고, 감성을 자극해야만 한다.
감성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을 터치하라”는 표현을 본적이 있다. 이제 기술과 품질, 논리적 설명이 아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감성을 자극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감성은 가격을 가치로 바꾼다. 고객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공감과 교감이 중요하다.”
기술과 감성, 예술과 쓰임이 합쳐진 분야가 바로 도예가 아닌가. 쓰임에 감성을 부여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매체가 도예란 생각이 든다. 도자의 진정한 매력은 생활 속의 예술이란 점이다. 그 속성이 매우 감성적인 도예는 21세기 시대적 감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매체이다.
김대웅「자연유 손결문 다관」
도자예술의 영성靈性과 내 삶의 질
지난 설 연휴 끝날, 작은 일에도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는 둘째 여동생과 큰집 조카 형제가 내방來訪하였다. 8남매 중 일곱째인 여동생은 들고 온 상자를 풀어 놓으며, 삼척 도계에서 온 과질이라고 하였다. 태백산맥의 고지高地 도계가 고향인 청년을 3년 전 사위로 맞은 여동생 덕에, 우리도 더불어 과질을 맛보게 되었다. 요즘은 보통 한과라고 하지만, 지방에 따라 모양새와 그 이름이 다르기도 하다. 내 고향 경상도에서는 유과라 하고, 또 어디서는 도계에서처럼 과질이라고도 한다. 경상도에서도 ‘과질’이라는 말은 하였는데, 좀더 폭넓은 개념으로 썼던 것 같다.
도계의 과질은 경상도의 유과처럼 손바닥보다 넓은 직사각형의 모양이었다. 짙은 갈색 바탕에 가장자리를 남겨 두고 조청을 발라 쌀 튀밥을 묻힌 것이, 노르스름한 바탕의 전체에 튀밥을 묻히는 경상도식 유과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특색이었다. 어쨌건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몇 년 전에 구입해 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사각형의 큼직한 다과 접시 하나를 꺼내어서 그 유과를 담았다. 아끼느라 함부로 꺼내 쓰지 않은 탓도 있지만, 핵가족 시대에 큰 접시가 흔히 쓰일 일이 없어서이기도 한 것이다.
진한 흑회색에 네 모서리가 부드럽게 손질되어 있고, 면이 서로 다르게 약간 휘어진 네 면의 가장자리가 솜씨 좋은 도공의 손길로 한 겹 안으로 돌려져 넉넉한 테두리를 이룬데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기울기가 완만하여 평평해 보이는 듯하며, 뒷 밑바닥 가운데에는 넓고 둥근 굽이 받치고 있는 당당한 형태의 접시다. 무시유無施釉의 자연유가 자연스럽게 발생한 위에 더러는 녹유綠釉가 엷게 흘러내린 자국하며, 가운데를 중심으로 불길이 만들어 낸, 둥근 고목나무 가지 같은 기하학적 문양이 힘 있는 유리질로 도드라져 있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금가루 색이 비치는 걸 보면 접시의 중앙 부분의 태토를 달리 한 것 같다.
감주[단술/식혜]와 유과 접시를 놓고 모처럼 모여 둘러앉은 우리들은 평소에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접시의 특별함에 눈이 꽂혔다. 오늘의 유과 접시로 적격인 듯이 보이는, 평소 상상키 어려운 접시의 형태와 색깔에 감탄하는 눈치들이었다. 게다가 장조카는 미대美大를 나왔으니 보는 눈이 남다를 터였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70년대 중반 무렵부터 그 전과는 달리 도자기 예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신문지상에 나오는 유명 작가의 이력과 작품의 특질에 대한 기사가 나면 스크랩을 하고, 유명 작가의 전시회를 찾아가 보기 시작했다. 인사동의 도자기 점포와 장한평의 골동품 가게들도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수석인壽石人 직장 선배를 따라 돌밭에 발을 들여 놓고 대학원 과정을 밟게 된데다, 1980년대 초반 시와 문학비평으로 동시에 등단하게 되면서 한동안 도자기를 만나는 기회가 뜸해졌었다.
1990년대 말이던가, 당시 안성에서 작업하고 있던 심우방 작가의 도자기를 애호하는 송영희 시인과 그분의 전시회에 가 보고, 안성 보개면에 있는 작가의 작업장에도 찾아가게 되면서, 정통正統 도자기 ‘구입’이라는 실제와 맞부딪쳤다. 그러나 도자기(특히 찻그릇)에 대한 집중적 관심과 구입(수집)은 2004년부터였다. 일반인들이 대개 그렇듯, 전에는 정통 도자작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정통 도자기는 고가高價라는 두려움 속에, 이른바 조선시대 다완 하나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찻그릇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하며 거듭거듭 뇌리를 스치곤 했다. 관련 책을 사서 읽어 본 것은 물론, 천한봉 선생의 대구 전시회를 시작으로 주요 도예 전시회는 빠짐없이 다니다시피 했고, 문경 찻사발 축제, 이천 국제도자비엔날레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김정옥, 천한봉, 신정희 등 거장과 유수한 작가들에 대해 점차 널리 알게 되었다.
그런 중에 내가 특히 주목하게 된 것은 새로운 도전의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었다. 통가마의 무유 작업을 하고 있던 박순관, 양승호, 김대웅 등의 작품과, 전통적 방법의 작업을 하되 새로운 도자미학의 창출에 힘쓰고 있는 서영기, 이강효, 김시영, 유태근, 김문호 등의 작업에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의전시회나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작품을 유심히 살피고, 대화하고, 더러는 같이 불을 때고, 꺼 낸 작품을 손질하기도 했다. 나는 이들의 작품을 형편과 애호의 정도에 따라 구입해 나갔다.
‘기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라는,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의 사발 생각에 처음에는 찻사발다완 관찰과 구입에 열을 올렸다. 우연히 전시회에서 만난, 동지同誌 출신의 백이운 시인과 함께 사발을 보는 눈은 이미 다락같이 높아져 있었다. 장작불로 구워 낸 찻사발의 형태와 발색, 손길로 나타난 작가의 혼을 고스란히 감지할 수 있었다. 찻잔 하나가 온 우주의 축약이라는 말을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잘 빚어지고, 상상 못할 요변窯變의 발색을 보인 찻사발과 찻잔의 미적 감동은 그 어떤 공예품과도 견줄 수 없이 큰 것으로 다가왔다.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의 쓸 만한 도공은 다 끌고 가 버리고, 좋은 다완 하나는 성城과도 바꾸지 않는다거나, 국보로 정한 조선의 다완을 ‘천하 대물’이니 ‘신물神物’이니 하며 숭배하는 까닭을 알 만은 했다.
찻사발을 구입하기 시작하면 차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형편의 제약을 받으며 내가 선호하는 작가들의 다관과 숙우, 잔과 접시, 화병 등으로 수집의 영역을 넓혀 갔다. 마침 찻그릇 전시와 수집이 흥행했던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이따금 도예계의 크고 작은 문제점들이 드러나자, 호황을 누렸던 도예전 갤러리에는 애호가들의 이반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서생인지라 직격탄을 맞은 나와 같은 처지의 애호가들은 이제 새로운 구입보다는, 한동안 수집해 놓은 다기와 항아리, 화병 등으로 삶의 질을 바꾸어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
2
정통 도자기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도자기는 생활용기로 발명된 것이니까, 원시시대에는 용도가 단순했을 것이고, 그에 알맞다고 생각되는 모양을 빚어냈을 터이다. 그러다가 인간의 생활이 진보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생활용기로서 도자기도 여러 용도에 맞는 형태로 분화分化, 발전되어 왔겠고,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용기가 아니라 미학적 가치로서의 도자기가 제작되기도 했을 것이다.
심미적 대상으로서 제작된 도자기는 물론, 생활용기[*정통 도자기]로 제작된 도자기도 세월의 더께와 함께 심미적 대상으로 변용되고, 찻그릇 같은 용기는 요즘 만들어도 관록 있는 명인들의 것은 심미적 예술작품으로 높이 대접받기도 한다.
용기로 만들어졌건 심미적 대상으로 만들어졌건 도자기그릇는 전통적 쓰임새와, 도예가의 제작 의도에 따라 일차적으로쓰이겠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쓰이지는 않는 것 같다. 문필생활을 하는 나는 수집한 도자기를 1차적 용도에 따라 쓰기도 하지만, 필요에 따라 달리 쓰기도 한다. 무유 작가들의 필통을 가지고 싶으나 따로 만들지 않으니, 그들의 컵[물/커피/전통차]을 골라 필통으로 쓰고, 꽃 모양에 네 발 달린 수레질 잔은 클립통으로 사용하고 있다. 작은 접시 중에 적당한 것을 골라서는 몽당연필, 지우개, 당장 쓸 펜을 놓아 두는 그릇으로, 큼직한 푼주나 수반水盤은 관리가 번거로운 가습기 대용으로 이용하고, 부모님 기일忌日에는 다관茶罐을 주전자酒煎子로 쓴다. TV의 <진품명품> 프로그램을 보면, 옛 선비들의 연적이나 필통 같은 도자 문방구가 엄청난 가격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을 보니, 물컵을 필통으로 쓰고, 조선시대 이전 옛적에는 제사를 차례茶禮/지금은 명절 제사만을 일컬음라 하여 술이 아닌 차를 올렸으니, 다관을 제사용 주전자로 쓰는 게 조상께나 작가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 가치를 격상시켜 쓰는 터이니 핀잔을 들을 일은 아닐 성 싶다.
어느 도예작가는, 주요 고객들의 집을 방문하다 보면 때로 깜짝깜짝 놀랄 경우가 있다고 한다. 자신이 의도하여 만든 용도나 짐작 가능한 용도와는 전혀 다른 용도로, 그것도 아주 놀라운 가치의 미학적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작가는 때로 딱히 무엇에 쓰라는 의도적 형태의 그릇이 아닌, 열린 의식의 그릇을 만들기도 한다. 문학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에 있어서 도예작품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수용자인 애호가의 몫인 셈이다.
나는 서재의 책장들의 칸을 더러 비워 항아리와 사발, 잔, 다관, 숙우 등을 진열하고, 책이 꽂힌 앞쪽의 여지에도 사발이나 잔, 화병들을 놓아 두었다. 작은방과 주방 사이의 폭 1미터 정도의 벽은, 입주 당시 옵션으로 더러 진열장을 만들었는데, 어느 이웃은 양줏병으로 가득 채워 장식한 반면, 우리 집은 다기 종류를 진열해 놓아 흥미로운 대조를 보이고 있다. 거실에 장식했던 정통 항아리를 아직 원위치시키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가 돌봐 주고 있는, 엄청난 연년생 꼬마 외손녀 자매의 손길을 염려해서이다.
나는 서재와 장식장에 진열해 놓은 도자기 작품을 보면서 해당 도예작가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대화를 한다. 흙의 시인인 도예가의 예술사상과 기법의 철학에서 자극받아 문학적 상상력을 확장시켜 나가기도 한다. 도예가나 도예작품을 주제로 글을 쓰고, 시를 몇 편 쓴 것도 그런 생활현상의 결과인 것이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3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