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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월호 | 특집 ]

건강한 참살이를 선도하는 우리 도자산업
  • 편집부
  • 등록 2017-04-13 10:33:33
  • 수정 2017-04-13 10: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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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남자기의 도자식기 역사와 식문화
  • 정호정 ㈜모디 기술연구소 소장

건강한 참살이를 선도하는 우리 도자산업

행남자기의 도자식기 역사와 식문화
정호정 ㈜모디 기술연구소 소장

복福자字와 수壽자字가 새겨진 사발과 대접     / 1980년대 본차이나, 스프링 커피세트

1970년대 국내 최초로 개발한 Ivory china, 인테리아 커피세트

웰빙이 우리 식문화를 바꾸고 있다. 2000년대 초 웰빙 바람에 맞춰 우리 도자식기산업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웰빙은 건강한 식탁에서 시작된다는 인식하에 다양한 기능성 및 디자인의 도자식기를 선호하고 있다. 인류 식생활은 생활양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자리해 왔다. 어떤 음식을 어떤 그릇에 담아 먹을 것인가에 대하여 민족에 따라 여러 형태로 발전해 왔다. 식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접하는 생활 문화 요소이지만 오랫동안 그저 음식을 담는 그릇 또는 용기로만 간주돼왔다. 그러나 현대인은 활발한 경제활동과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으로 참살이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도자식기는 점차 중요한 생활문화의 한 분야로 주목받게 되며 식생활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식기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도자기 산업은 세계 장기 경기 침체, 핵가족 및 외식문화 변화로 국내소비 감소, 인건비 상승으로 생산성 악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본고에서는 근대 도자식기 산업의 발달 과정과 식기문화 변화 및 앞으로의 발전 방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도자기산업의 발달과정
일제하 당시 전국에 산재한 도자기 제조업체는 땔감을 연료로 사용하여 수동식 물레성형의 재래식 방법으로 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제조설비를 제대로 갖춘 회사는 부산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한도자기와 여주의 조선도자기 뿐이었다. 일제가 전쟁 준비를 위해 놋그릇까지 공출해가는 통에 식기의 품귀현상이 심화됐고, 대한도자기와 조선도자기의 횡포가 심했던 1942년, “우리 민족의 식기는 우리 손으로 만들자” 며 순수 우리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도자기 공장인 행남사가 설립됐고 지금의 (주)행남자기가 되었다. 그 이후 밀양제도소, 중앙도자기, 계림요업 등 근대 도자기 회사가 설립되었다. 지금의 한국도자기의 전신인 충북제도사도 이때 출범했다. 해방 이후 환원자기인 막사발, 대접, 밥공기 등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사기 밥그릇 하나가 쌀 두 되와 교환됐던 시절이었다.
근대 우리나라의 도자기 산업의 발달과정은 행남자기의 역사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행남자기는 1942년 백자(환원자기1))제품을 시작으로, 1974년 국내 최초로 Stone Ware를 개발할 때까지 약 30년간 백자기를 생산하였다.

당시 Stone Ware는 전량 미국에 수출하였으며, 1977년 국내 최초로 뉴본차이나Ivory china를 개발, 국내 최초의 고급 산화자기2)를 시장에 내놓게 되었다. 이 제품은 국내에서 채광한 원료로만 사용한 제품으로 제품의 고급스러움으로 국내 시장을 석권했다. 후발업체들은 산화자기인 아이보리 차이나 개발을 하려고 해당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하는 등 진풍경이 벌어졌다.
1981년 행남자기는 아이보리 차이나보다 백색도가 훨씬 뛰어나고 투광성이 좋은 Snow Bone china와 Bone china를 차례로 개발하였다. 아이보리 차이나는 국내원료로만 만들어졌지만 Snow Bone china와 Bone china는 국내 원료와 수입 원료를 함께 사용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당시 Bone china는 색감이 너무 좋고, 투광성이 좋아서 아이보리 차이나와 현격히 구별되므로 Snow Bone china를 먼저 출시키로 하였다.

1980년대 초정자기 울트라파인Ultra Fine, 홈세트 킹

Bone Ash를 이용한 Snow Bone china는 출시되자마자 영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상인들이 서로 먼저 가져가려고 차를 대기시키고 기다리는 호황까지 누렸을 정도였다. 1957년 국내 최초로 본차이나를 개발, 제품을 전라남도 물산공진회에 출품해 특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본차이나를 1984년부터 본격 생산, 판매하게 되었다. 행남자기는 도자기 중의 최고급인 Bone china까지 자체 기술로 개발, 출시하여 명실상부한 고급 도자기제품생산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행남자기의 역사가 도자산업의 역사와 같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모든 신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생산했기 때문이다. 또한 1984년도에는 옛 선조들이 생산했던 자기(환원 분위기에서 번조한 제품 : 백자)를 획기적으로 격상시킨 최고급 초정자기를 개발하였다. 이 제품은 초정밀 가공된 원료를 사용하고, 1340℃의 초고온에서 구워냈다. 1280℃에서 화공 번조한 화공기법Inglaze :안료를 사용, 무늬를 만드는데, 고온에서 안료를 유약과 완전히 반응시켜, 안료에서 나올 수 있는 유해물질에 안전하게 함을 사용해, 세계 최고급 환원자기이자 초정자기인 울트라 파인Ultra Fine을 신제품으로 출시하였고, 유럽 왕실에만 납품하는 에밀 베어나드 유약 위에 조각해 그곳에 금이나 백금을 입힌 최고급 도자기 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생산 판매하였다.
이 제품들은 지금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최고급으로 인정받는 최고의 산업자기제품이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저임금에 싼 원료 가격으로 인해 노동집약 업종인 도자기산업은 고용 증대 및 수출 효자 품목이 되었다. 경쟁력이 생기자 정부에서는 도자기를 우리나라 10대 수출 전략 품목으로 지정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아 곳곳에 도자기 공장이 설립됐다. 500명 이상 종업원을 가진 큰 공장만 해도 10곳이 넘었다. 그 영향으로 도자기 생산 기계공장과 소지공장이 생기나 기자재와 재료를 직접 만들지 않고 구입해 쓸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소규모 도자기 공장들도 급격히 늘어났다. 행남자기만 해도 1공장부터 5공장까지 있었고 공예공장, 특수인쇄공장, 함평의 행천자기공장, 인도네시아 공장 등으로 확충하고 생산량도 지속적으로 늘려갔다.
우리나라 도자기 식기 산업의 위기의 요인
유류파동과 대용식기의 출현
동남아 국가들의 임금이 동결되어 있을 때 우리나라는 8~90년대 노동조합의 임금 투쟁 등으로 인한 급격한 임금인상이 있었다. 이로 인해 노동 집약산업은 국내에서 버티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임금이 동남아 국가보다 10배가 높았다. 따라서 생산단가 상승으로 가격 경쟁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유류를 많이 사용하는 도자 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고, 70년대 말 OPEC 총회에서 기준 유가 59%를 인상 했을 때는 도자산업의 연료비 비중이 30%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 일부 내용과 이미지는 생략되었습니다.
전체 내용은 월간도예 본지를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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