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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월호 | 뉴스단신 ]

바이올린 제작의 세계적인 거장 진창현 이야기(2)
  • 편집부
  • 등록 2014-10-31 15:5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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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논고

누가 명장을 꿈꾸는가

- 바이올린 제작의 세계적인 거장 진창현 이야기 (2)

문옥배 한국공예산업연구소 전문위원, 전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담장 너머로 훔쳐보며 기술을 배우다

1957년 8월 여름, 창현은 하는 수 없이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으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기소 후쿠시마로 향했다. 이때 창현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런데 기소 후쿠시마에 도착하고 나서도 공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여기가 마지막이라는 느낌 때문에 이번에도 거절을 당한다면 더 이상 두드려 볼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 바이올린의 꿈을 완전히 접는 것을 의미했다.

사흘이나 기차역에서 잠을 자고 방황하며 망설이다가 마침내 공장을 찾아갔다. 시모죠 보우노스케下條 房之助라고 하는 사장에게 스즈키 시로 선생의 소개장과 명함을 내밀었다. 채용 여부는 공장의 간부회의에서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틀 후에 다시 찾아가니 공원들마저도 조선인을 싫어한다고 했다. 이 공장에서도 그는 결국 거부를 당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은 갈 곳이 없어서 기차역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잠을 자며 노숙자 생활을 했다. 다행히 고마운 경찰의 도움으로 공장 근처에 있는 미다께三岳의 임도林道공사 현장에 일자리를 구하고 바이올린 공장 바로 옆에 처소를 마련하였다.

겨울이 되어 공사장이 쉬는 동안에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으로 가서 창가에 붙어 서서 공장 안을 들여다보며 바이올린 제작과정을 눈여겨보았다. 이렇게 눈으로 훔쳐보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가 되었다. 공장에서 누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 잘 봐 두었다가 퇴근할 때 선물을 주며 말을 걸고서 친분을 쌓은 뒤에 그 사람의 집을 방문하여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기술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재료와 도구도 하나씩 마련해 나갔다. 그런데 바이올린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봄이 되자 공사장 근처 산속에 나무기둥을 세워 오두막집을 만들었다. 주로 여름철에는 일을 하며 돈을 모으고 겨울철에만 바이올린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이렇게 만들고 부수기를 수십 번, 각고의 노력 끝에 1958년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첫 번째 바이올린을 탄생시켰다.

댐에서 물을 방류할 때 쏟아지는 자갈을 채취하여 돈을 많이 벌어야 했기 때문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죽어라 일만 했다. 하루에 무려 20입방미터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퍼내기도 했다. 체구가 크지도 않은 그가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옆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그래서 한때 그에게는 ‘100마력’ 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2011년 광주시립미술관에 선보인 진창현 명장의 현악기들

11살 연하의 아내를 맞이하다

창현은 어떻게든 많은 양의 바이올린을 만들려고 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했다. 어떤 때는 2~3일 동안 잠을 안 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늘 고민했다. ‘나는 어째서 이런 세공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생각하고 바이올린 진열장 앞에 주저앉아 수없이 고민했다. 이렇게 훌륭한 바이올린 제작을 꿈꾸던 청년 창현은 좋은 도구를 사기 위해 기소 후쿠시마 이웃에 있는 아게마쓰마치上松町 마을의 골동품 상점에 가게 되었다. 처음엔 쓸 만한 도구를 찾지 못해서 그냥 돌아왔다. 작업을 하다가 대패가 필요해진 창현은 오랜만에 다시 그 가게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날은 상점에 들어가 말을 걸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인가 주인을 부르자 한참 후에 뒷문 쪽에서 20세 정도의 아리따운 처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 골동품 가게 주인(제일교포)의 딸이었다. 이때 그 처녀는 손으로 기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운 옷을 입은 처녀의 모습이 창현의 마음에 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 수줍어하는 그녀가 정말 귀여워 보였다. 창현은 그때가 그녀를 여성으로 의식하게 된 첫 순간이었고, 처음으로 그녀를 보고 가슴이 설레었었다.

창현은 그날 그녀의 아버지가 외출중이라서 덕분에 그녀를 만났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이후 창현은 자주 그 집에 드나들면서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어느 날은 그녀가 창현의 오두막을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후로 무려 32차례나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렇게 오두막을 오가며 정이 쌓이자 창현은 마음씨 고운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그런데 바이올린에 미친 정신병자로 통하고 있던 창현과의 결혼은 그녀 아버지의 반대로 벽에 부딪혔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창현은 32살의 나이에 11살이나 아래인 옥녀(이남이)와 1961년 3월 3일 기소 후쿠시마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오두막으로 시집 온 그의 아내는 ‘미친놈한테 시집온 이상한 여자’라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생활이 나아질 것은 없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수문이 열리면 부부가 함께 댐에 가서 자갈을 퍼 올려야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처음으로 작품 하나에 3,000엔씩을 받다

결혼 후 거의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창현은 그때까지 40개 정도의 바이올린을 완성하였다. 초기의 작품이라 완성도가 떨어져 부셔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때 그의 아내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부수지 말아요. 괜찮은 것만 골라서 도쿄에 가서 팔아 보는 게 어떻겠어요?” 아내의 말에 공감한 그는 괜찮아 보이는 10개 정도를 골라 골판지 상자에 넣어 등에 짊어지고 도쿄 아사쿠사淺草와 간다神田 등의 악기점을 찾아갔다. 하지만 악기점은 모두가 냉정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단 한 개만이라도 팔고 오기를 기다리는 아내 생각에 많은 곳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악기 브로커인 다카기高木 씨를 만나 당시 일본 바이올린계의 거장인 도호가쿠인桐朋學園 대학의 ‘시노자키 히로쓰구篠崎弘嗣’ 선생을 소개받게 되었다.

시노자키 선생을 만난 것은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안고 찾아간 시노자키 선생은 그의 바이올린을 들고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바이올린 열점을 세심하게 살펴본 시노자키 선생의 평가는 간단했다. “소리가 꽤 좋군! 한 대에 3,000엔씩 좋다면 전부 사겠네.”, “이것은 성인용으로는 다소 부족하니 어린이용으로 만들어 가져오면 모두 다 구입해 주겠네.”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낸 바이올린이 상품으로서 인정받았다는 점이 너무 기뻤다. 정말이지 꿈만 같았다. 이제는 바이올린에만 매달려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바이올린 장인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도쿄에서 기소까지는 8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너무나 기뻐서 어떻게 집에 오는 줄도 몰랐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둘이서 껑충껑충 뛰며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서로 얼싸안고 방안을 빙빙 돌며 춤을 추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시노자키 선생은 당시에 일본 바이올린계의 3대 거장 중의 한 분이었다. 시노자키 선생은 우리나라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선생과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洪蘭坡 선생과도 도쿄음악대학 동기생이었다. 특히 홍난파 선생과는 함께 하숙을 하고 아사쿠사淺草에서 바이올린 연주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했다.

시노자키 선생은 약속을 철저히 지켰고, 그리고 만드는 대로 모두 다 구입해 주었다. 창현은 1961년 10월 시노자키 선생의 권유로 도쿄에서 가까운 마치다町田시 가나모리金森로 이사까지 하게 되었다. 거기에서도 밤늦게까지 죽어라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대부분 장인들이 1주일에 한 대 정도 만들었으나 창현은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1주일에 여섯 대까지도 만들어 낼 정도였다. 그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바이올린을 만든 적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없었다. 생활비를 위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수의 바이올린을 만들어 낸 것이었지만, 이 일이 결과적으로 바이올린 제작 실력을 폭발적으로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무수히 들었던 말이 있었다.

“어쨌든 많은 숫자를 소화해라. 그러면 자연히 보이게 된다.”

3천 엔짜리로 동경예대에 합격하다

1965년 3월 어느 날 예상 밖의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그가 제작한 3,000엔짜리 바이올린으로 동경예대東京藝大에 합격한 학생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동경예대는 일본에서 제일가는 명문 예술대학으로, 거기에 시험을 치르려는 학생들은 대개 유명 메이커의 고가 바이올린을 사용한다. 그런 상황에서 진창현의 바이올린으로 시험을 친 학생이 합격했다는 것은, 그의 바이올린의 음질이 유명 메이커 바이올린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한 셈이었다.

좋은 바이올린을 만드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매우 힘들고 어려운 길이요 수많은 난관을 부딪쳐 이겨 내야 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작자들은 이런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역시 바이올린 제작은 어려워.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어.” 그러나 창현은 끈기 있게 이 일에만 매달렸다. 매일매일 화려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색을 만들어내기 위해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바이올린 제작에 몰두했다. 많이 만들다보니 실력이 날로 향상되어 시노자키 선생도 믿기지 않는 듯 이렇게 물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와는 엄청난 차이야.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제작하는 것인가?”

그래도 그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토카와 교수가 말한 “잃어버린 기술Lost Art”은 어둠 속에서 바늘을 찾듯 독자적으로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창현은 어떻게든 한 발짝씩 다가가기 위해서 끝임 없이 기술을 찾아 나섰다.

바이올린의 니스로 이용되는 색소 중에서도 황색과 적색은 특히 중요하다. 그래서 네팔, 베네수엘라, 르완다, 콩고, 에티오피아, 멕시코나 페루의 인디오 마을과 아마존의 정글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색소를 찾아 다녔다. 그리고 오징어 먹물, 어린아이의 변, 지렁이 까지도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좋은 바이올린은 콘서트홀의 맨 뒷줄까지도 소리가 분명하게 전달된다. 어떻게 하면 그런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을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많은 밤을 새웠다. 지금도 베일 속에 감추어진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제작의 비결은 찾을 수가 없다. 그 명기는 스트라디바리가 제자에게도, 친자식에게도 제작기술을 전수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최고를 자랑하며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지도 모른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한·일 간에 국교가 정상화 되고 난 후 1968년 10월에 진창현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25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을 밟을 수 있었다. 열네 살 때 어머니의 품을 떠나 25년 만에 39살의 나이로 어머니 품에 돌아와 안기었다. 어머님을 모시고 한국 땅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지난 세월 창현의 가슴에 사무쳤던 그리움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 일본에 살면서 그는 늘 고향의 어머니천대선, 千大善 생각에 밤마다 울었다. 창현이 고향집을 떠나올 때 먼발치까지 따라오시면서 눈물을 훔치시며 이별을 슬퍼하시던 어머님을 한시도 잊지 못하고 지냈다. 창현에게 어머니는 아주 특별한 분이셨다.

창현의 어머니는 조금 늦은 나이에 창현을 가졌다. 아이를 너무 늦게 가진 까닭에 어머니의 젖이 부족하여 아들을 살리려고 이웃 동네까지 젖동냥을 다녀야했다. 아들이 죽는다면 멸시를 당할 것이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아이를 살려야 했다. 이렇게 창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전부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창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는 분이었다. 창현이 다시 일본에 돌아와서 일에만 매달려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 이상하게 가슴이 무거워 참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다가와서 말했다.

“여보, 마음 단단히 하고 들으세요.”, “아가씨한테서 지금 연락이 왔는데, 어머님이 조금 전에 운명하셨대요.”

창현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 비행기를 타고서 부산으로 갔다. 어머니는 전에 창현이 사드린 수의를 입고 주무시는 듯이 누워 계셨다. 어머니의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 창현은 어릴 때처럼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릴 적에 맡았던 어머니의 향기가 났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논둑길을 달려 소달구지를 쫓아오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뒤로하고 떠나온 그 길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1976년, 향년 77세에 그렇게 돌아가셨다. 이때 창현의 나이 47세였다. 아들을 떠나보내 놓고 평생을 가슴 태우며 고생한 어머니는 정작 아들이 무엇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들어보지도 못하신 채 눈을 감으신 것이다. 그래서 창현은 그것이 한이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3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가지고 어머니 묘를 찾을 수 있었다. 누이동생과 아내와 아이들까지 모두 참석한 그 자리에서 창현은 아들과 함께 바이올린으로 ‘봉선화’를 어머니에게 연주해 드렸다.

“어머니, 들리세요? 어머니께서 늘 좋아하시던 ‘울밑에 선 봉선화야’라는 노래예요. 여기 어머니의 아들과 손자가 연주하고 있어요.”

제작자 콩쿠르에서 5관왕에 오르다

1970년대로 접어들자 그의 바이올린에 대한 평가가 점차 올라가고 그의 나이 45세가 되던 해, 1974년에는 미국에서 발행된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는 제목으로 그의 바이올린 제작 활동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일본판과 한국판으로도 번역되어 나왔다. 이를 계기로 그의 명성이 올라가면서 바이올린의 가격도 점점 올라가 한 대에 50만 엔이라는 가격이 붙게 되었다.

마침내 진창현의 명성이 미국에까지 알려져 1976년에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 최고 행사인 ‘제2회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 대회에까지 초대되었다. 여기에는 세계적인 제작자와 최고의 장인들이 초대되는데, 이 세계 최고의 콩구르 행사에서 그는 6개 부문 중 무려 5개 부분을 석권하여 금메달 5개를 목에 걸었다.

그를 이렇게 세계적인 장인으로 이끌었던 것은 우연히 강연회에서 듣게 된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는 재현이 ‘불가능’하다”라는 그의 도전정신을 일깨운 한마디 말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한 길이 그로서는 가능한 길이 되었던 셈이다.

마침내는 그에게 냉소적이던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세상 사람들이 좀처럼 가지 않는 길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왔지만, 그 통로에 들어선다고 해서 누구나 끝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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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생이 일종의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에만 너무 집착하면, 앞길이 무서워서 아무 것도 손을 못 댄 채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기술자의 길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을 때까지 갈고 닦아야 완성됩니다. 장인이 되느냐, 못 되느냐의 가장 큰 관건은 끝까지 해보겠다는 집념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라도 집념이 없이는 고비를 넘길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장인이 되지 못하고 손재주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념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타고난 직관도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아이디어 같은 것 말입니다.”, “저는 성공을 향해 아직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즐기고 있습니다. 저에게 행복은 제가 고생하여 창출한 기술로 많은 연주자들에게 혜택을 줌으로써 감사와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이후 진창현의 수천만 원짜리 바이올린은 5년 치의 예약분이 밀려 있을 정도로 세계 유명 연주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작품

 

진창현의 유작

세계 최고의 명장인 ‘마스터 메이커’가 되다

1984년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무감사無監査 제작자’(더 이상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하는 최고의 제작자에게 주는 명예)라는 특별인정을 받음으로서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제작자 콩쿠르에서 금메달 3개 이상을 수상한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칭호)라는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전 세계에 5명밖에 안 되는,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후 1998년에는 <일본문화진흥회>로부터 국제예술문화상을 수상하였고, 2000년 12월에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진창현의 일대기가 연재되면서 일본 사회의 화재인물로 등장하였다. 2003년 4월에는 “천상의 현”이란 제목의 만화로 연재되었으며, 2004년 11월에는 진창현의 일대기를 다룬 한 단편 드라마가 후지TV 개국 45주년을 기념해 제작되기도 했다. 3시간짜리 특집극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海峽を渡るバイオリン”으로 방영되었던 것이다. 이 드라마는 한국의 <서울드라마어워즈>에서 3관왕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8년 3월 한국인 최초로 일본 고등학교 2학년 교과서인 ‘COSMOS 영어2’(삼우사三友社)에 진창현 이야기가 한 챕터Chapter에 걸쳐 ‘The Mystery of Violin’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2002년 KBS 1TV 한민족 리포트에서 ‘울밑에 선 봉선화야-바이올린 장인 동경 진창현’으로 방영이 되었고, 2005년 SBS TV에서 광복 60년 특집 다큐드라마에서 ‘천상의 바이올린’으로 소개되었다. 2007년 4월 1일 SBS TV 한수진의 선데이 클릭에서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로 방영되었고, 4월 9일에는 생방송 화재의 인물 : Zoom -人 ‘김미화의 U’에서 ‘천상의 선율 바이올린 명인 진창현’에 출연하였다.

2008년 10월, 마침내 그의 공로를 인정한 우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도 가지 않는 불가능한 길에 도전하여 큰 업적을 이룬 진창현, 그는 2012년 5월 13일 일본 도쿄 조후調布시의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향년 83세를 일기로 천상의 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긴 여행을 떠났다. 그가 떠난 2개월 후에는 그가 처음 바이올린을 만들었던 고장 나가노현 기소군 기소마치의 신스이 공원에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로부터 기념비가 세워졌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국인 진창현은 병상에서도 항상 태극기를 옆에 두는 등 최후의 순간까지도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2007년 3월에 출간한 ‘천상의 바이올린’이란 자서전 말미에 후대 젊은이들에게 그는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아무리 결과가 보이지 않는 희망일지라도 정열을 가지고 진지하게 도전하여 끈기 있게 지속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길이 열린다.”

그는 늘 그렇게 끈기와 열정으로 바이올린만을 쫒아 다녔다.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 천상의 그 소리, 100% 그 신비의 소리에 거의 가깝게 도달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생애의 끝까지 성공을 쫒아가는 즐거움으로 그는 살았다고 한다. 그의 그칠 줄을 모르는 불굴의 집념은 불같은 욕망을 낳았고, 그 불타던 욕망은 마침내 화려한 성공을 낳은 것이다.

연재끝

 

고 진창현 선생의 추모식

 

※ 본고는 진창현의 저서 “세계의 명장 진창현”과 “천상의 바이올린”등에서 발췌하여 엮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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