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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월호 | 특집 ]

백자 - 김동준
  • 편집부
  • 등록 2013-03-29 10:14:07
  • 수정 2013-04-01 14: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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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자 - 김동준

김동준 KIM DONG JUN

김준영은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공예디자인과를 졸업하고 2009년 대구 동원화랑에서 도예 3인전, 2011년 분당 가산화랑에서 도예 3인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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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도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인연)에 대해서

군복무 중에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중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 보자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화실을 운영하면서 평면 작업보다는 입체작업이 나에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고 어릴 적부터 조선시대 도자기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전역 후 다니던 국문학과를 자퇴하고 도예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1학년 여름 방학 때 우연한 기회로 현재 경산에서 작업하시는 황승욱 선생님의 공방에서 처음 현장을 경험 했습니다. 당시에 주변 황토와 마사토를 활용하여 분청작업을 하고 계셨는데 흙을 만들어 쓴다는 자체가 학생신분이었던 저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황승욱 선생님의 공방에서 하나의 그릇이 완성되는 전 과정을 경험해 보고 인생을 걸어 볼만한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02 자신의 예술관에 영향을 준 인물

제 스승이신 권대섭 선생님입니다. 선생님께서 제가 대학 3학년 때 대구에서 전시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당시에는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지나가다 들린 전시에서 선생님의 백자를 보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꼭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전문환 선생님의 주선으로 권대섭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뵙는 자리에서 “예술에 네 목숨을 걸 수 있겠느냐.”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했더니 바로 오라고 하시더군요. 졸업 작품을 급히 끝내고 선생님이 계신 경기도 광주로 올라가 5년간의 도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권대섭 선생님의 작업장이 있는 경기도 광주는 300여기의 조선시대 관요백자 가마터가 산재해 있어 백자를 공부하는 저에게 최고의 강의실이었습니다. 평일에는 선생님의 엄한 가르침을 받으며 작가로서 살아갈 정신적, 기술적 토대를 구축하고 주말이면 가마터를 찾아 사금파리를 수집하며 관요 백자를 접했습니다.

 

03 나에게 백자란?

조선시대 도자기에 대한 지극히 “소박하고 서민적이며 투박하다”는 일제식민지미술사관의 외양적 평가는 지금까지도 우리민족이 보유했던 전통적 백자미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커다란 장애로 남아 있습니다. 그릇은 어느 시대에나 실생활에 사용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과 장식을 위한 예술적 욕구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그것은 그 시대를 주도하는 세력의 기호에 의해 주도되어 왔습니다. 조선의 관요백자는 당시 주도세력인 왕실과 사대부들의 사회적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대부들은 조선의 주도 이념인 성리학의 이상에 따라 탈속脫俗의 경지와 검소함, 그리고 무위의 실천을 백자에도 반영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관요백자는 검소함, 무위와는 거리가 먼 국가적 사업으로 각 분야 최고의 스텝들과 고도의 기술이 집대성 되어야만 구현할 수 있는 고급자기입니다.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의 이상적 심미안과 현실적인 귀족적 품질을 대단한 장식 없이 최소한의 기능과 형태로 충족시켜온 관요백자의 모던함은 순수 도예도 현대 회화나 조소에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자신감을 저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04 나의 흙 작업 과정 중 가장 특별한 것

과거에는 질 좋은 백토를 지층 깊은 곳에서 직접 채취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요즘은 도재상과 요업기계의 발달로 손쉽게 백토를 구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탈철과 볼밀에 일괄 분쇄과정을 거친 흰색지향의 공장백토로는 다양한 백색의 구현에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유약과 안료를 개발하여 좋은 백자를 만드는 작가들도 있으나 저는 공장백토가 지니는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원토를 활용한 백자작업을 선택했습니다. 근대이전 요장에서는 가마터 인근 흙만을 써야 했지만 도로와 운송수단이 발달한 현대에는 전국 각지의 흙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저의 작업은 각 지역에 매장되어 있는 흙들의 장점과 단점을 상호 보완하여 조합하고 원토의 특성을 고려한 가장 단순한 디자인으로 흙의 질감과 발색을 전달하는 것이며 수비와 분쇄의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함으로서 입자와 철분을 조절하여 다양한 백색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사실 분청과 황토계열의 작업에 원토를 쓰는 작가들이 많아지면서 요즘은 원토의 활용이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대 백자분야가 흙에 대한 연구보다 유약과 안료의 개발에 치우친 경향이 있어 백자 흙을 굳이 만들어 쓰는 저의 행위가 상대적으로 조금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일 뿐입니다.

 

 

05 작품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은 순간

예전부터 공방을 차리면 장작가마를 지어 공방인근의 흙으로 그릇과 유약을 만들고 공방주변의 나무를 잘라 소성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한지역의 흙과 나무로 그릇을 만들면 구성성분이 비슷하니 뭔가 좋은 도자기가 나오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5년간의 도제생활을 마감하고 처음 충북의 한 산골에 자리를 빌려 가마를 짓고 그 산에서 발견된 적토와 황토 연질백자계열의 표토를 수비하여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가마를 짓기 위해 삽으로 땅을 파다 불에 녹는 흙을 발견하여 주변 초목을 태워 만든 재를 섞어 유약을 재조 하고 공방 주변 나무를 잘라 화목을 비축하였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준비하여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생애 첫 제가 지은 장작가마에 불을 지폈습니다. 간벌한 생나무를 말릴 틈도 없이 재벌소성을 진행 했더니 온도가 잘 오르지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소성시간을 훨씬 초과하고 쪼개 놓았던 장작이 모자라 비몽사몽간에 장작을 패면서 불을 지피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걸어 왔습니다. “여기 땅주인 아버지인데 사정이 바뀌었으니 집을 비워 주어야 겠소.” 불을 계속 지펴야 한다는 생각에 적당히 대답을 하고 나무를 계속 넣었습니다. 소성은 무사히 마쳤으나 정신이 돌아오니 온도를 충분히 올렸는지에 대한 의문과 현실에 대한 걱정이 몰려 왔고 며칠 후 가마를 열었습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첫 가마에서 나온 그릇이란 도예가라면 누구나 특별할 것입니다. 어찌 됐든 유약을 녹였다는 안도감과 그에 따른 작은 성과에 즐거워하는 저를 보면서 “역시 도예가는 어쩔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쓴웃음 짓던 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06 현재의 가장 큰 고민은

좋은 작업을 위해서는 많은 자본과 노동력 그리고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명의 젊은 도예가에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경제적 어려움은 작업의 높은 퀼리티를 유지하는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예술가는 배가 부르면 작업이 안 된다는 말이 있지만 질 좋은 백토와 우수한 화목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자본이 뒷받침 되어 주어야 합니다. 원토를 수작업으로 가공하여 고급백자를 만들고 장작가마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도자기를 빚는 행위 이외에도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다른 요장과의 경쟁적 측면에서 볼 때 효율성도 떨어집니다. 좋은 작업을 위한 자본의 재투자와 효율적인 시간, 노동력의 배치 그리고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과 판매경로확보는 현재의 고민이면서 언젠가는 해결해야할 과제입니다.

 

07 자신이 추구하는 작가로써의 철학이 있다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저의 정체성은 분명 현대작가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백자를 모티브삼아 전통의 미학과 형식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저의 작업이 재현의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작가적 정체성에 전통이 아닌 현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실용품이었던 조선시대 백자가 박물관 유리관에 갇히고 골동품으로 보관되어 대중에게서 멀어져가는 현실에서 전 시대 백자의 아름다움을 현대의 미학으로 되살리고 미래의 후손들이 현재의 도자기를 바라볼 때에 빗살무늬 토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땅의 전통적 도자미학이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로 인한 단절을 경험하면서도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공간에서 작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08 도예계 선배 혹은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저의 달항아리 첫 판매는 서울에서 활동 중인 윤세호 작가의 주선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경제적으로 도움도 되었지만 컬렉터를 소개해준 윤세호 작가의 마음이 저에게는 더 큰 위로였습니다. “같이 잘돼야지.” 윤세호 작가가 저에게 자주하는 말입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방을 운영해 나가다 보면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자주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 시기에는 여러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인 것 같습니다. 논어에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어떤 목적을 이루고 싶으면 남도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기업 간 상생발전과 사회계층간 갈등완화가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 도예계도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작가들이 함께 성장해 나가길 바랍니다.

 

09 다음 세대를 이끌 도예인로써 꿈꾸는 ‘우리 도예계’

대부분의 도예과가 미술대학에 속해있어 높은 등록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졸업 후 학자금대출금을 갚으면서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해나가기에 도예계 전반적으로 임금이 너무 열악합니다. 작가의 관록에서 오는 내공을 중요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젊은 작가로 기존시장에 편입되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좋은 작품이 잘 팔리는 것이 아니고 잘 팔리는 것이 좋은 작품이더라.”라는 일부의 회의론이 존재하는 것도 이 시대 도예계의 한 단면입니다. 도예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개인의 오랜 인내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한국도예계가 “작품이 좋으면 성공한다.”는 최소한의 확신을 심어 줄 수 있다면 초인적 인내심을 소유한 한국의 좋은 작가들에게서 전 시대 보다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제가 꿈꾸는 우리 도예계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비정한 자본주의사회의 많은 직업들 중 도예계만이라도 정직하고 열심히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평범한 상식이 통할 수 있는 곳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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