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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월호 | 특집 ]

아리타有田 도자산업의 현황과 미래
  • 편집부
  • 등록 2013-03-07 17: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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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리타有田 도자산업의 현황과 미래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도자기

아리타有田 도자산업의 현황과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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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성 성신여자대학교 공예과 교수

 

 

일본의 도자기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오랜 영향을 받아 왔으며 여기에 일본인의 미의식과 각 지역의 문화적 특색을 더하여 다양하고 특색 있는 도자기로 발전하여 왔다. 이러한 일본의 도자산업은 16세기 대항해시대와 조선침략을 계기로 수동적 입장에서 능동적인 입장으로 일대전환기를 맞이하게 되며 이 후 약400년 간 일본의 도자산업은 세계도자시장에서 주역 또는 보조자로서 오늘날 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일본도자기의 세계시장진출은 중국, 조선, 일본이라는 도자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대의 큰 사건이었으며 여기에는 아리타有田라는 강력한 원동력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아리타는 큐슈九州의 북서쪽에 위치한 내륙산간지역으로서 1615년경 조선도공 이삼평에 의해 일본 최초의 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한 이후 일본 국내의 도자산업을 주도하며 독특한 생산 환경을 발전시켜왔다. 아리타의 성공요인으로서는 민,관의 협업과 분업생산시스템, 그리고 시장중심의 생산시스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아리타의 도자산업은 400년간 수많은 부침을 겪어왔기에 단순한 통계로 이와 같이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생산시스템을 구축하였음은 틀림이 없다. 따라서 아리타 도자산업의 현황과 미래를 논하려면 먼저 아리타가 걸어온 과거의 산업화과정과 유지를 위한 노력에 대한 언급이 필수적이라 생각되며, 도예가 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기술적 관점을 중심으로 17세기와 20세기로 크게 나누어 논하고자한다.

 

17세기 아리타의 도자산업, 도자산업의 시작

앞서 언급하였듯이 아리타의 도자산업은 조선도공들에 의해 시작되지만 그것이 도공들의 이주에 의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아리타가 위치하고 있는 큐슈지역은 예로부터 중국, 조선과의 왕래가 빈번하였고, 특히 아리타의 북쪽에 위치한 가라츠唐津는 무역항으로서 오래전부터 조선과의 무역이 왕성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조선의 영향으로 분청사기를 중심으로 하는 도기陶器의 제작이 활발하였으며 지금도 분청사기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지역에서의 백자제작은 15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아직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대략 조선에서 백자토와 유약을 가져와 번조한 것이라고 추론되고 있다. 이는 당시 일본이 얼마나 백자를 원했는지를 잘 말해주는 예일 것이다. 이러한 아리타가 백자의 생산지로 급부상한 것은 역시 조선도공 이삼평에 의한 이즈미야마泉山의 대규모 도석陶石광상 발견(1615년)이 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리타는 분지형의 지역으로서 산 안쪽을 내산이라 하고 바깥쪽을 외산이라고 하는데 이즈미야마는 아리타의 내산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온천지역이어서 지하에 열수熱水가 지나가고 있어 이로 인해 유황과 철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저 품위의 도석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만 할 것은 이 광상의 발견을 위해 이삼평만이 아닌 여러 조선의 도공 집단들이 경쟁하며 이즈미야마로 찾아 들어왔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심해종전深海宗傳과 백파선百婆仙등을 들 수 있다. 당시의 조선도공들은 지역정부인 번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안정적인 재료의 확보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당시 조선도공 집단의 구성원은 대략 천여 명 정도로 구성되었으며 생산지를 이동해 가며 아리타 쪽으로 몰려들었다. 1615년 대규모 광상의 발견과 더불어 각지에서 일본 도공들이 몰려들었으며 백자제작의 성공 이후 많은 스파이들도 함께 유입이 되어 도석을 비롯한 산림자원의 보호와 기술의 보안유지가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나베시마번鍋島藩은 1636년 856명의 일본도공을 추방하고 아리타, 이마리伊万里를 포함해 11개소의 가마를 폐쇄한 후, 모두 13개의 가마로 통합, 관리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조선계의 가마들이었다. 이 정책은 두 가지 관점에서 큰 의미를 두고 있는데 하나는 조선도공들의 보호라는 명분을 넘어 신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 의지이며, 또 하나는 도자기가 근대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최초의 정부정책이었다는 점이다. 참고로 일본의 근대적인 산림보호정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리타는 이와 같은 보호정책 아래 1640년대까지 조선풍의 백자를 생산해가며 기술의 근간을 마련하였고 이 시기의 백자를 초기이마리양식初期伊万里樣式이라고 일컫는다. 초기이마리양식은 청화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조선의 백자와는 달리 청화를 짙게 사용하여 문양을 많이 그려진 점을 빼고는 기술적 요소는 동일하다. 초기이마리양식의 도자기는 대부분 이즈미야마의 도석을 사용하였고 이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황 성분으로 인해 대형 또는 고급도자기를 제작하기에는 부적합하였기에 일본국내용의 잡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번주(藩主)로 하여금 신기술 도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으며 나베시마번은 1640년경부터 새로운 기술도입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를 위해 번은 주도면밀하게 정책을 준비하게 되는데 이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중국의 백자번조기술과 상회기법의 채색자기 도입 그리고 새로운 도석의 개발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유일한 무역항이었던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중국의 기술자를 초청 가마 제조 기술을 익히고 일본도공 이었던 사카이다카키에몽酒井田柿右衛門에게 상회안료제조기술 개발을 맡겨 중국채색자기와 같은 고부가가치의 제품으로의 일대 전환을 모색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즈미야마 도석을 대신해 나가사키 근방의 아마쿠사도석天草陶石 광상을 개발해 수운으로 아리타에 공급하게 하였다. 참고로 아마쿠사 도석은 세계최대의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으며 그 품질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나 지금도 일본 도자산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아리타는 1645년 카키에몽柿右衛門에 의해 일본 최초의 채색자기기술을 개발하게 되며 중국의 번조기술과 아마쿠사 도석의 도입으로 인해 고급도자기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게 된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당시 나베시마번은 세계도자 시장의 흐름을 간파한 후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였다는 점이다. 당시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어수선한 틈을 타 중국자기를 대신해 유럽으로의 수출을 추진한 점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1660년경부터 시작된 유럽으로의 수출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바타비야(자카르타)상관을 통해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랍, 아프리카, 유럽까지 일본의 도자기가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18세기초두에는 필리핀을 거쳐 쿠바까지 도달하게 된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19세기에 이르면 조선은 물론 극동의 캄챠카반도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점은 우리가 흔히 일본풍의 도자기라고 말하는 요소가 실은 철저하게 주문자의 입장에서 제작된 결과 탄생되었다는 점이다. 아리타에서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유형을 분류해 보면 크게 네가지 양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1615년에서 45년경에 이르기까지 조선풍의 초기이마리양식初期伊万里樣式, 1660년경 채색자기의 시작으로 제작된 고구다니양식古久谷樣式, 유럽수출자기의 전성기를 구가한 1680년대의 카키에몽양식柿右衛門樣式, 그리고 유럽수출이 막을 내리고 국내용으로의 전환을 모색한 1800년대의 고이마리양식古伊万里樣式으로 나눌 수 있다. 카키에몽양식의 경우 유럽인들의 기호를 최대한 반영하였고 당시 주변의 가마들은 유럽에서 주문한 문양과 그림으로 소비자들의 만족에 최선을 다하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풍의 초기이마리와 중국풍의 고구다니 양식 또한 철저한 카피를 통하여 당시의 소비자들에게 짝퉁의 고급도자기를 공급하였으며 이는 순 일본적 채색자기의 기술적, 예술적 근간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카피를 위한 노력은 눈물이 날 지경으로 혹독했으며 소비자의 취향을 배려해 철저하게 제작자의 의도를 제한하여 제작하였던 것이다.

 

재료적인 측면의 기술개발 또한 적극적이어서 초창기의 수입재료를 국산화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러 재료 중 특히 상회안료의 자립화 과정은 매우 재미있는 점이 많으며 시사 하는바가 크다. 중국 정크선의 출입항 기록에 의하면 상회안료는 1650년경 약10톤이 수입되고 이 후 수입량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주목할 점은 위에서 언급한 도자기의 양식이 이동하는 시기에 수입량도 늘어난다는 점이다. 아리타의 백자가 네 번의 양식의 변화를 거침에 있어 안료의 변화 또한 소비자의 트렌드에 맞게 새로운 안료를 도입하고 이를 자립화하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아리타만의 색채를 보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재료의 개발에 있어서는 아리타에만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 일본전역으로 확대하여 최고의 재료를 확보하였으며 그중 산화철의 확보를 위한 노력은 그 스토리에 있어 드라마적이다. 아리타의 상회기법 자기를 일본어로 아카에赤繪라고 하며 이는 빨간 그림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만큼 색채에 있어 빨간색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다양한 영역의 빨간색 중 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영역을 찾기 위한 노력은 중국이나 일본, 유럽에 있어 별 차이가 없다. 가장 최고로 여기는 빨간색은 감의 홍시에서 나타나는 색이며 일본 채색자기를 창조한 카키에몽의 이름인 카키도 감을 뜻하는 말이며 이를 작위 명으로 하사받은 것이다. 이와 같은 빨간색을 만들기 위해서는 산화철인 벵가라를 만들어야 하는데 기존의 벵가라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1702년에 오카야마岡山에서 일본최초의 산업벵가라가 대량생산에 성공하면서 일본 채색안료산업은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안료를 도자기 표면에 융착 시켜 주는 프릿트가 개발되어 인체에 유해한 성분을 제거한 보다 안전한 안료의 공급이 가능해지게 된다. 프릿트는 아리타와 가까운 나가사키에서 공급되었다고 추정되며 이 지역은 예전부터 램프와 비다마(구슬) 등이 생산되었기에 프릿트 제조능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아리타의 생산시스템을 보면 매우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분업생산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매우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다. 먼저 제작 면에 있어서는 크게 도자기의 기형제작과 채색작업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기형제작은 대부분 내산지역의 산중에서 초벌과 재벌을 가마별로 분업화해서 담당하였고 여기서 생산된 기물은 아리타 내산의 평야지역에 위치한 아카에마치赤繪町로 보내져 상인들에 의해 채색이 되어 시장으로 반출되게 된다. 언뜻 보면 단순한 구조이기는 하나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매우 복잡하였다고 하며 큰 화재로 인한 자료소실로 추론에 그치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장식의 중요성을 당시의 상인들은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상인들은 최종적으로 재벌소성이 된 순백의 기물을 구입해 계절별, 의식, 제례, 생활 등에 맞는 문양을 융통성 있게 선정해 판매효율을 극대화 시켰던 것이다. 한편 수직계열의 분업을 살펴보면 먼저 조선시대의 관요에 해당하는 나베시마가마가 있었고 바로 밑에는 씨족의 종가에 해당하는 카키에몽가마, 이마에몽今右衛門가마 등이 있으며 이 밑에는 이들의 친족들이 운영하는 소수의 가마들이 복잡한 분업의 형태로 생산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업시스템은 대량의 주문에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으며 겐로쿠元祿1688-1707의 버블시기에도 위기를 넘기는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아리타는 시장을 제대로 예측하고 능동적인 자세를 취한 강력한 리더쉽과 바른 정책 그리고 타 문화에 대한 수용 자세를 바탕으로 17세기 세계최대의 도자기 산지로 자리매김 하였던 것이다. 물론 타 문화 수용에 있어 그들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후 현명한 대처를 통하여 아리타도자기의 세계화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20세기 아리타의 도자산업, 조선도자기시장의 장악과 재도약

아리타의 도자기산업은 18세기 이후 중국이 강력한 공급자로 부활하고 유럽의 자기국산화가 이어짐으로 인해 그 영역은 좁아지게 되며 국내시장의 여러 부침을 겪은 후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침체기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1870년경 독일의 기술자 와그너Gottfried Wagener를 초빙하여 독일의 선진도자기술을 습득하며 특히 대량생산의 기초인 석고기술을 이시기에 도입하게 된다. 당시 아리타는 전근대적인 생산시설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후 석탄을 연료로 하는 독일식 가마와 서양 식기에 적합한 유약 등을 도입하면서 재도약의 기회를 맞게 된다. 이시기에 현 아리타를 대표하는 대형의 도자기제조회사가 탄생하는데 후카가와세이지深川製磁와 코랸샤香蘭社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도자기 회사는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일본 국내는 물론 당시 조선의 식민지정책에 따른 새로운 조선이라는 시장을 향해 발 빠르게 대처하였다. 물론 19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아리타의 도자기는 소량이기는 하나 쓰시마를 거쳐 조선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들어온 아리타도자기에 대한 연구는 정식으로 보고 된 적은 없으나 춘천 등지에서 발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행히 현 동대문시장의 재개발에 따른 발굴조사에서 중국의 청화백자와 아리타 및 세토의 일본도자기가 다량으로 발굴되어 그 실체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2012년 인쇄물로 보고되었으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발굴된 제품에서 당시 조선의 소비자를 의식한 기형과 문양 등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소비자에 대한 의식은 이처럼 유전인자와 같이 아리타의 도자기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조선이라는 행운의 시장을 얻은 아리타는 이 후 2차대전을 겪으며 다시 침체기를 맞이하게 되나 당시의 풍부한 도석과 유능한 장인들을 기반으로 일시 군수산업기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도 한다. 이시기에는 도자기로 수류탄과 수통, 고폭탄 등을 제조하는 집요함을 볼 수 있다.

 

2차대전 이후 70년대 일본의 고도 성장기에 아리타는 다시 한 번 최대의 호황을 맞게 되며 온천 여행 붐과 식생활의 저변확대에 힘이어 다양한 식기들을 생산하는 공급지로서 재부상하게 된다. 일본인 특유의 요리에 대한 관심은 다채로운 형식의 식기를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아리타의 도자기는 소량 다품종형식을 취하게 되었으며 이는 공급단가를 끌어올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90년대 일본경제의 버블이 몰고 온 결과는 아리타에 있어서 겐로쿠의 버블 이후 최대의 위기였으며 그 여파는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다. 단 이러한 불황은 타 지역의 도자산업에 비해 매우 늦게 찾아왔으며 현 세계의 경제위기에도 아리타의 건재함은 그 저력이 만만치 않음을 말 해 주고 있다. 지금의 불경기를 계기로 일부에서는 과소평가하는 소리가 있으나 그렇지 않음은 일본 통산성統産省의 통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현 아리타의 도자산업생산 현황을 보자면 91년을 정점으로 매출의 급격한 감소가 보여 지고 있으나 2009년 한국의 전체 도자시장이 3천억 원 정도였음을 감안하였을 때 호황기였던 91년도의 4천5백억 원의 매출은 한국전체도자시장을 훨씬 상회하고 있으며 불경기의 정점이었던 2002년도조차도 2천억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업체수의 변동이 그다지 없으며 전체생산인구가 1100여명정도로서 1인당 생산력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이는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생산합리화와 생산비절감을 위한 피나는 노력, 그리고 아리타 내부의 협동과 양보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하겠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현재 한국의 대형마트 또는 다이소등과 같은 저가형 매장에서 아리타도자기를 흔히 접하게 되는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심한 경우는 중국의 저가형 도자기 보다 더욱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가 될 정도로 그 경쟁력은 점차 회복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은 단지 생산현장에서만이 아닌 아리타 전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그들이 추구하는 경쟁력강화의 전략을 간단히 요약하면 역사에서 성공과 실패를 배우기 위한 아카이브연구 시스템구축과 세계와의 네트워크 구성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는 아리타가 세계와의 끊임없는 소통 속에 발전해 왔다는 인식하에 유럽과 아시아의 대표적 박물관 및 유수의 연구기관과 협업으로 아리타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원류를 찾아 역사와 경제, 기법과 재료의 재현, 디자인 등을 국내외에 걸쳐 수집, 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이다. 필자도 이러한 연구에 2004년부터 동참하여 그들의 생존방식과 도자기와 함께하는 삶에 방식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필자가 보는 아리타의 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의식은 항시 살아있으며 400년간의 성공과 실패의 요인을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어린 시절 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아리타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배경과 원인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교육받고 있으며 어릴 적부터 도자기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실제로 도자기를 놀이도구로 또는 삶의 도구로 함께 성장해 도자기를 제작하는 장인이 되기까지 그들이 접한 도자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소양은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흙을 접하고 졸업 후 생산현장에 나가는 우리와 비교했을 때 그 출발점의 차이는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그들 특유의 섬세한 도자기에 반영되고 있으며 특히 소비자에 대한 배려는 또 다른 시장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예를 들면 노약자 및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경량소재 및 기능성 식기의 개발이 아리타도자기의 새로운 아이템으로 등장했으며 틈새시장 개발의 예로서 학교급식용 식기를 프라스틱에서 도자기로 전환하여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것도 좋은 예 일 것이다. 이러한 예를 언급 할 때면 가끔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아리타가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이후 늘 있어왔던 상식적인 얘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우리의 입장으로 돌아와 아리타를 볼 때면 마음은 항상 복잡해지는데 그들이 이삼평에 대한 감사로 매년 도조제를 지내며 한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함은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세와 아쉬움에 안타까울 때가 많다. 임진왜란과 조선의 식민지 정책으로 아리타는 현재의 아이폰에 버금가는 신제품의 창조와 19세기 후반의 위기극복을 조선의 백자를 통해 이루어냈으며 이를 통해 일본 근대산업의 근간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집어보고자 하는 점은 아리타에 대한 우리의 역사연구는 얼마나 이루어져 있는 건지, 이의 필요성을 다시 말하면 우리의 문화가 타국의 문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그 문화가 세계에 전파되어 현재의 고급명품도자로 나타나 우리식탁에 올라와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떠하였는가 라는 점이다.

필자가 이즈미야마광산을 처음 눈으로 접 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으며 이 후 더 놀라웠던 것은 이즈미야마 도석광산의 소유주가 5대 이삼평까지 이어졌다는 점이다. 조선의 백자를 도입하는 과정은 몇 번을 강조해도 결코 올바르지 못하지만 이 후 그들이 취한 철저한 시장주의의 원칙 속에 글로벌화된 도자상품을 400년간 지속적으로 생산하여 왔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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