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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월호 | 특집 ]

아리타의 400년 도자역사를 개괄하다
  • 편집부
  • 등록 2013-03-07 17: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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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의 400년 도자역사를 개괄하다

아리타 자기의 태동과 이후 산업, 문화 변천사의 시사점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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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숙 한국도자문화협회 이사, 공학박사

 

 

자기의 발달사

도자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폭넓고 오랜 동안 인류의 문명사를 함께 해온 공예산업의 소산이다. 이 도자기의 변천사를 개괄하면 기술의 진보에 따라 토기-도기-자기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비약적인 기술발달로 도자 분야에도 원료의 정제뿐만 아니라 합성에 의해 새로운 특성을 가진 인공의 재료가 끊임없이 개발되어 상품화가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도자기´라고 하면 말 그대로 흙을 모태로 한 도기와 자기가 여전히 주류를 이룬다.

공예품이라고 할 때 먼저 떠올릴 만큼 우리에게 친밀한 도자기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첨단 산업의 기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정점이 자기였다. 자기의 일반적인 특성은 소지가 정제되어 불순물이 적으며 보다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어 치밀하다는 데에 있다.

자기는 중국에서 개발되었다. 그 시원은 은·주대의 원시자기 혹은 원시청자라고 불리는 시유도기이지만 본격적인 청자는 1세기 전반의 한대에 출현하여 9세기 당대 월주요에서 완성된다. 백자의 경우 은대의 무시유 유물이 있으나 시유 백자는 수대 이후에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된다. 당대에는 남부 월주요의 청자와 북부 형요의 백자가 ´남청북백´이라 불리며 활발하게 생산된다.

중국의 자기는 송대에 전국 규모의 산업 생산 체제가 확립되고 이를 바탕으로 원대에는 청화백자의 개발과 육상·해상 무역로의 확립에 따른 자기의 해외 수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당시 세계에서 자기를 생산할 수 있었던 나라는 중국을 제외하면 고려가 유일하다.

명대에는 경덕진에 관요가 설치되어 도자 기술이 이곳에 집중된다. 여기서 유리홍, 오채 등이 개발되고 명말에는 부를 과시하기 위해 자기 수집에 열광하는 유럽 귀족들의 수요가 동인도회사의 무역을 통해 충족되어간다.

 

자기 제조기술과 채식 기술의 아리타 전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일명 ´도자기 전쟁´이라 일컬어진다. 그 배경에는 일본의 다도문화가 깊이 관여되어 있다. 송에 파견된 일본의 유학승이 선종과 더불어 당시 유행하던 차문화와 차를 모국에 전래한 것은 8세기경이었다. 이후 사찰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즐기던 일본의 말차 문화는 15세기에 큰 전기를 맞이한다. 새로이 대두한 무사집단이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변혁을 차문화에서도 이루고자 한다. 당시의 상류사회가 즐기던 중국의 청자나 천목 다완과는 취향이 전혀 다른 소박한 조선의 사발로 기득권 문화와 대적하고 사발 하나로 목숨을 건질 정도로 사발은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된다. 이러한 배경 위에 조선 침략은 동시에 조선의 장인, 특히 도공의 물색을 동반하고 있었다.

조선에 출병한 규슈의 나베시마 영주가 퇴각할 때 대동한 도공이 이삼평이다. 그는 1616년 아리타 이즈미 산에서 도석을 발견하여 도자기를 제조함으로써 일본 자기 제작의 선구자가 된다. 이로써 아리타는 당시 중국과 조선이 보유하던 자기 제작이란 최점단 산업기술을 획득하게 되고 이 해를 일본 자기 제작의 원년으로 삼는다. 따라서 2016년은 자기 생산 400주년의 해로 아리타에서는 이미 이 기념적인 400주년의 도자축제 준비에 돌입하고 있다.

기존의 도기와 달리 치밀한 백자는 그 바탕이 희다는 점에서 채식에 알맞다. 원대에는 코발트를 이용한 청화백자가 비단만큼이나 중요한 무역 상품이었고 명대에는 오늘날 볼 수 있는 다양한 색상으로 상회한 오채 등의 채식자기가 유럽으로 대량 수출되었다.

아리타에서는 제작에 성공한 백자에 초기에는 청화가 채식되었으나 1644년 가키에몽이 당시 일본의 쇄국정책 속에 유일한 개항지였던 나가사키에서 중국인으로부터 적회赤繪 안료의 제법을 습득하여 청화백자에 적색이 가식된다. 수입에 의존하던 고가의 자기 제작이 지역 경제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으로 나베시마 번은 이들 장인을 우대하는 한편 자기의 기술 유출을 엄금하였다.

 

 

 

아리타 자기산업의 변천사

17세기 초엽에 자기가 성공하고 중엽에는 상회가 성공하여, 때마침 명청 교대기의 혼란 속에 쇠퇴하던 경덕진 도자 산업의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이후 경덕진요가 부흥할 때까지의 약 반 세기동안 동인도회사를 통해 아리타의 인근항 이마리에서 수출되었으며 아리타 자기는 이 항구의 이름을 따서 이마리 자기로 불리게 된다. 당시의 대유럽 자기 수출양은 수십만 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최성기에는 무역선 한 척에 5~8만 개의 제품이 선적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아리타 자기의 양식 중 특히 가키에몽 양식은 오늘날에도 마이센 등 유럽 유수의 자기 산지에서 모방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의 경덕진 재건과 마이센에서 자기 제작이 성공함에 따라 아리타의 자기 수출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한편 일본 국내 각지에 자기 생산 기술의 전파되어 도기 생산량보다 자기 생산량의 비중이 커졌다. 비록 아리타는 국내에서 여전히 선두지위를 유지하였으나 자기 생산에 있어서의 독점적 지위는 약화되어 갔다. 오늘날 아리타는 주요 제조 품목인 식기류에서 일본 중부의 미노와 경쟁하고 있다.

아리타의 자기는 19세기 중반까지는 식기 위주의 일용품과 고급미술품이 중심이었으며 이들 제품의 판로는 지역 혹은 국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관요가 폐지된 1883년 경까지도 아리타에서는 저가의 일반 식기를 청나라에 수출하고 있었으며 당시 이 품목은 아리타 자기 수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은 과세장벽으로 내국세를 부과하여 아리타 요업은 다시 위기를 맞았다. 이렇듯 아리타 요업은 그 시작 단계로부터 근대화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이고 거대한 산업적 구도 속에서 성쇠를 거듭하였다.

따라서 나베시마 번은 조세확보를 위해서도 아리타 요업의 발전을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1971년의 폐번 조치는 관이 주도하던 요업 개혁을 민간 스스로가 해내야 할 과제로 남겼다. 이에 아리타의 요업자들은 1877년에 도업맹약을 체결하였으며 1890년에는 도업조합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아리타저축은행과 협립은행을 설립하여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고, 1896년에는 아리타도제학교를 설립하여 후계자 양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세기 말의 아리타 요업에서 특기할 점은 기계화의 진전과 독일인 화학자 바그너를 초빙하여 도자기 제작의 화학적 원리를 강구하게 된 점, 그리고 석탄 가마를 도입하여 제작공정이 획기적으로 근대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신속한 시대 대응은 종래의 일용품, 미술품에 국한되지 않고 공업용품이나 타일과 같은 건축재로 생산 제품의 다양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세계대전, 대공황 등의 국제정세가 세계 시장을 상대로 하는 아리타 요업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으나 이전의 신속한 시대 대응의 효과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한 예로 전기 수요가 늘어가던 1910년 이후의 국내 수요 및 1차 세계 대전 직후 유럽의 부흥에 따라 증가한 전력용 애자 생산은 침체기의 돌파구가 되어 아리타의 전통적 요업의 붕괴를 회피할 수 있게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리타 요업의 주된 상품은 시대적ㆍ경제적 변화에 따른 부흥과 침체가 심한 일용기와 미술품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극복하고 오늘날에도 일반인에게 익숙한 그 아리타 자기의 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새로운 기술 개발에 따른 새 분야의 도자기가 아리타 경제를 지탱하였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는 아리타 자기와 쌍벽을 이루던 일본 중부 지역 세토의 자기 산업이 쇠퇴한 것과 비교된다.

 

요업의 마을 아리타가 시사하는 점

예로부터 지방분권형이던 일본에서는 지방 각 영주가 고유의 공예품 생산을 장려해왔다. 따라서 도자기의 경우에도 지역마다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어 일본의 도자기는 주로 지역별 이름으로 불린다. 그 중에서 아리타는 자기의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일본의 도자기를 공예품으로서 생각할 때 크게 식기를 위주로 하는 실용품과 장식품 그리고 다도에서 사용되는 도자기로 대별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자기의 주력 분야는 특히 실용품과 장식품이다. 일본 다도구의 주력이 도기라고 하면 자기는 실용이나 장식적 변화에서 도기보다 자유롭다. 이 점이 자기 시장 규모의 확대에도 일익을 담당한다.

아리타의 자기는 18세기를 전후한 유럽의 동양도자 컬렉션이나 일본 음식점 특히 여관에서 사용하는 일본식 식기 등에서 그 예를 흔히 볼 수 있어 일본 도자기의 이미지 형성에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 특징은 다양한 기형과 다양하고 다색의 문양에 있으며 이는 자기가 갖는 소재적 특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도자기 생산으로 자립하던 아리타도 최근의 불황에 따라 디자인을 포함한 도자기 기술의 개발과 더불어 오래된 경관을 살려 관광 산업을 개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광객이 아리타를 찾는 때는 매년 골든위크라고 불리는 일본의 연휴기간에 열리는 도자기축제 기간에 몰려 있으며 이 기간을 제외하면 아직도 아리타는 고즈녁한 작은 산골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이곳의 도자기축제는 1차 세계대전 발발에 따른 대유럽 자기 수출의 부진과 내수 소비 부진에 의한 재고 정리에서 시작되며 도조제의 실시를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계승되고 있지만 도자기축제의 한정판으로 새 상품을 기획하여 선보이기도 한다. 또한 동시에 열리는 규슈야마구치 도자전을 통해 미술공예품으로서의 작품과 산업생산품으로서의 상품을 구별하여 선보임으로써 새로운 미술적 가치와 상품적 가치 창조를 꾀하고 있다.

외국인은 한국의 도자기가 오브제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인상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도제제도를 대신하는 대학교육이 개성을 중시하는 스튜디오 작가적 작업에 무게를 두는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아리타의 도자기축제장에서도 개인작가의 출점이 눈에 띠게 되었다. 그러나 축제의 주역이 실용품이며 공예품의 주된 시장이 거기에 있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아마도 실용품이 미술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서라는 이유보다는 소비자가 기본적으로 원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타의 도자기축제에 참가하는 관광객의 대부분은 일상에서 자신들이 사용하고자 하는 일상용기를 이 기회에 구입하고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아리타를 찾는다. 그리고 해마다 되풀이 찾아오는 이가 많다는 점에서 일본의 일상에서 차지하는 도자기의 수요가 여전히 일본 요업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고 있음을 가늠해본다.

아리타에는 예전부터 일본 전국을 돌며 마케팅을 전담하는 대상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쌓아온 노력의 결실이 도자기축제 성공의 기반이기도 한 것이다. 합병 이전의 옛아리타는 산업적으로 대규모 요장업자, 마케팅을 전담하는 대상인, 자기에 채식 특히 철적유상채식赤繪사가 주류를 이루고 이에 부수하는 각종 도재상이 주민의 대부분을 구성하였다. 현재 채식사의 수도 도재상의 수도 줄어드는 경향이지만 기본적인 구성은 여전하다. 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아리타자기 발전이란 한 목표를 향해 합심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도자기축제를 주관하는 아리타상공회의소 이외 대아리타자기진흥협동조합, 사가현립요업기술센터, 사가현립규슈도자문화관, 요업 인재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사가현립아리타요업대학 등이 연계하여 도자기의 소재, 디자인 등을 연구·개발하고 있으며, 아리타역사민속자료관이 아리타와 관련된 인문학적 연구로, 아리타 지방자치단체는 아낌없는 행정적 지원으로 아리타 요업의 발전을 뒷받침하고 있다. 개인의 오브제적 작업은 만족감이 클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의 쓰임새가 공예품이 지닌 속성의 중요한 측면이라면 도자기의 질적· 양적 발전의 근본에는 여러 분야의 협업을 통한 지속적 연대라는 큰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작지만 큰 아리타는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글을 맺으며

2006년 요업 위주의 옛아리타정은 농업 위주인 옛서아리타정과 합병되어 새로운 아리타정으로서 오늘에 이른다. 요업과 농업의 상생을 지향하는 새 아리타에서 요업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갈 지를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수요가 급감한 도자기 시장에서도 올해로 109회 째인 도자기축제는 7일간의 기간 중에 예상한 관광객 연인원 100만 명의 목표를 초과한 131만 명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후쿠오카 이외에는 주변에 대규모 소비지가 없고 호텔 하나 없는 인구 2만 천 명 남짓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 도자기축제 개최 100회 이후 100만 명의 관광객 참가를 꾸준히 달성한다는 점은 아리타 요업의 저력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끝으로 각국 각 지역의 문화·산업의 전통성과 미래 발전을 위한 교류의 중요성은 이미 역사가 증명한 바이며, 아리타정은 ´자기´를 중심으로 중국의 경덕진, 독일의 마이센과 한국의 한국도자문화협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1992년의 아리타도자기축제 기간에 이들 대표가 도자기의 국제교류를 위해 낸 공동성명을 부기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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