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끼기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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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미술비평, 가나아트 문화사업부 총괄 팀장
베끼는 것 자체는 무죄
오로지 새로운 것은 없다. 하물며 조물주도 처음 세상을 만들 때 실체로써가 아니라 ‘말씀’
으로 만들었다. 존재하는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거나 만들고 개념화하는 것이 ‘인간이 하는 창조’의 요체이다. 게다가 인류가 삶을 거듭할수록 무엇인가 만드는 일이 최초의 것이거나 새로운 것일 개연성은 점점 낮아진다. 역사라는 것이 사람들의 삶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 지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더욱 그렇다. 예술이 만들어 내는 산물이 꼭 새로운 것일 필요도 없다. 새롭지 않더라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면 된다. 새로이 무엇을 하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것이 예술의 강령이 된 것은 예술이 사회적인 범주에서 특권화한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의 행위들은 애써 예술이라는 범주가 아니어도 사회적 역할을 하고 매우 요긴한 쓰임이 있었다. 새롭다거나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 행위나 산물이 예술이고자 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맥락에서건 전례 없이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것이 예술의 중추이며 역할이다. 예술의 새로움이야말로 인간의 문화를 풍성하게 하고 인간답게 한 유일한 덕목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같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맥락상 창의성과 창조와 관련한다. 이것은 대부분 돈과 관련한 것으로 만든 사람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조유권이나 저자권의 개념이다. 이런 배타적인 권리를 보장하려는 일은 예술이 가진 창의성을 보장한다기보다는 애써서 생각하고 만든 것을 누군가 훔쳐서 ‘돈을 버는 것’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의 특성에 기인한다가 보다는 자본주의의 배타적 소유권과 관련되는 것이다. 표절을 윤리적인 차원에서가 아닌 일종의 특허권의 침해라는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지 않아야 한다’는 차원의 창의성에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모방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모방하거나 표절한 자가 그것을 이용해서 돈을 벌었거나 잠재적으로 돈을 벌 가능성이 있는가의 여부이다. 그래서 이러한 차원의 일은 법이 점점 정교해지는 방식으로 규제된다.
베껴서 만든 문명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자체도 자연의 일부이며 그 질서에 포한되어있다’는 생각과 예술 또한 자연의 모방이라는 생각이 창작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였다. 자연의 질서와 유사해지거나 그것을 추종하는 방식이 진리에 다가서는 것이라는 오래되고 많은 생각들 ‘철학’으로 다양하게 제시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따랐다. 재현representation 또는 모방imitation이라는 뜻의 미메시스mimesis는 고대 그리스 이후에 서양의 문학과 미술의 근간이었으며 동양에서도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그리고 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을 예술의 요체로 삼았다. 문제는,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없으며 예술의 근원이 원래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 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것을 비슷하게 하는 것에 있지 않다. 모방 혹은 베끼기는 학습이라는 차원에서 혹은 문화를 전수한다는 측면에서 인류에게 매우 유용하고 베낄 수 있는 능력이 지금의 인간을 만들기도 했다. 문제는 우리 문화계에서 베끼기가 그 도를 넘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단지 노력 없이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도 훔치는 것을 죄악시하지 않는 다는 것에 있다. 남의 것을 베기고 그것을 통해서 이전 것을 갱신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유용하다. 베끼는 것을 통해서 새로워지는 것이 예술이 가진 근본적인 구조이며 그래야 한다. 그러나 단지(게다가 몰래) 베끼는 것 그리고 단지 베끼는 것을 감추기 위하여 약간의 가공을 한다거나 ‘같은 편’이 되기 위하여 유사성을 획득하려는 등의 베끼기와 그 변형들이 문제이다.
베끼기의 학습
최근에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였던 IOC위원이자 대학교수인 젊은 양반이 국회위원에 당선되었다. 당선된 후에 박사학위 표절문제로 홍역을 치루더니 석사학위논문을 비롯한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이 베끼기에 해당한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아마 관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억울할 수도 있다. 그의 억울함은 ‘운동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좀 봐달라’는 그의 태도와 베낀 건 맞지만 표절이 아니라는 그 ‘창의적인’ 인터뷰들이었다. 태권도 선수였던 대학교수를 보면서 우리의 실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우리나리의 미술대학은 대체로 먼저 산사람들의 생각과 작품을 따라하고 그 안에서 개성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학습이 진행된다. 게다가 도예 등 제작기술이 선행되어야 하는 분야는 기술적인 숙련도를 위해서 좀 더 먼저 배운 사람과 밀착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먼저 배운 사람을 베끼게 된다. 그러면서 독창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몸에 맞는 혹은 창의적인 작업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학교제도이며 그 제도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학위제도가 창작이나 작업을 우선하고 학위가 예술을 증빙하는 방식으로-전혀 그런 준비 없이-만연하면서 작품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논문을 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런데, 논문을 쓰긴 써야하는데 참고로 할 수 있는 논문이 별반 없다. 먼저 배운 사람들도 공부보다는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글을 써 본적이 없고 나중 배운 사람들도 글을 써야하는 근거들이 빈약하다. 따라서 이전 것들을 최대한 이용하거나 여타의 비슷한 분야의 것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쌓이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베낌이 베낌을 낳고 그 낳은 것들이 상호 교배하여 지속적인 교차 베낌이 되었다. 나중에는 논문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논리가 생성되고 논문은 내용보다는 형식을 맞추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발생한다.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 되어있으므로 베끼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없다. 이렇게 베끼고 졸업을 하고 학위를 받으면 그 학위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업을 한다. 당연히 남의 것을 베끼는 것이 죄악시 되지 않는다. 단, 베끼되 피해갈 수 있으면 그만이다. 아시다 시피 법이라는 것이 매우 복잡하고 예술이라는 것이 모호하여 법이 그것을 베꼈다고 판단하기는 매우 쉽지 않다. 공부든 일이든 이런 절차를 통해서 일상화되고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베끼는 것이 그렇게 죄스러운 것도 아니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정신적인 노동력이 소요되는 것도 아니므로 베끼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매우 효율적인 일로 자리잡게 된다.
아마도 작품의 유사성을 근거로 베끼는 것의 정도를 판별하자면 그 용례를 정리하는데도 몇 년은 걸릴 듯싶다.
베끼기의 극복
우선, 자신의 작업을 잘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예술가로써 혹은 도예가로써의 책무가 방기된 채 작업이 다른 어떤 목적의 수단이 되는 한 엄격한 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는다. 작업을 하는 일이 자신이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며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이라면 아무도 베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베껴서 이룰 ‘사회적인 무엇’이 있을 경우 자신을 무능을 숨기기 위하여 혹 은 조급증에 혹은 남을 밟기 위하여 혹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베끼게 된다. 예술가의 목적인 예술작품이다. 도예가의 목적인 도예작품이다. 자식 같진 않겠지만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결과이다. 자식을 낳고 싶은데 선배나 동료의 힘을 빌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업에 대한 진정성이 없을 때, 베낄 수 있다. 당연히 진정성을 가진 작가는 죽어도 베길 수 없다.
베끼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베끼는 것이 최종적인 산물일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표절은 필사보다 못한 일이다. 베껴 쓰기의 목적은 원본을 널리 알리는 것이 목적이고 필사한 글씨체에 필사한 사람의 몸이 반영되고 생각이 조형화되는 반면 베끼기는 단지 남의 생각과 그것의 표현을 온전히 훔치는 것이다. 베끼는 행위는 베낄 수 있는 재료만 찾으면 되므로 매우 손쉬운 일이다. 당연히 너무 손쉬워서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예술적인 가치가 없으므로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그런데 이렇게 베껴 만든 것이 많아지면 제대로 만든 것이 설 땅이 없어진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방법은 어렵지만 한가지이다. 도예계에 좋은 품질의 작품과 나쁜 품질의 작품(표절 작품)이 동시에 존재할 때, 품질이 떨어지는 작품만 남고 좋은 작품이 사라진다는 것이 그레샴의 법칙이다. 그레샴의 법칙은 일반적인 의미로 확대되어,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품질이 좋은 상품은 시장에서 퇴출되고 품질이 낮은 상품만 남게 된다는 의미, 자질이 높은 사람은 조직에서 사라지고 자질이 낮은 사람들만 남게 된다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나쁜 작품을 몰아내면 된다. 그런데 그것이 만만치 않다. 왜냐면, 애초에 베끼는 것이 일상적으로 훈련되고 그것이 크게 죄가 되지 않는 가운데 그것이 거듭되어 그것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돌을 던져야 하는데 그 돌의 모양세가 부메랑이다. 내가 돌을 던지면 그 돌이 나에게 날아온다. 그래서 돌을 던질 수 없다. 그러나 좀 덜 아픔 사람을 중심으로 돌을 던져야 한다. 그 돌에 맞아 사망하더라도 돌을 던져야 하며, 돌 던지는 행위는 시스템이 보호해야 한다. 문제를 야기하는 사람 혹은 내부 고발자가 대우받지 않는 풍토는 일종의 범죄에 대한 침묵의 동의이거나 나아가 적극적 옹호이다.
우선 여전히 학교를 통해서 배출되는 도예가가 다수이므로 학교에서 베끼기에 대한 엄격한 통제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논문의 경우 보다 엄격한, 실제로는 인문학에 준하는 잣대로 베끼기를 바라보고 작업과 관련된 수업도 조금은 더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예술교육의 목적은 역설적이게도 나와 다른 혹은 우리세대와는 다른 창의적인 사람을 배출하는 것이다. 새로운 생각을 새롭게 하고 그것으로 새로운 것을 만 들 수 있는 사람을 기르려고 학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악화를 몰아낼 기초는 만들어 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창의적인 도예가를 시장이 알아주어야 한다. 시장의 무지가 베낀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저렴’하다는 이유로 베끼기를 방조하거나 혹은 시장 자체가 자행한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다. 원작자의 권리는 최소한 일정기간 일정지역에서 보장되어야 한다. 모두가 베낄 권리는 있지만 베껴서 원작을 훼손시킬 권리는 없다. 시스템, 특히 시장이 엄격한 필터링의 의무를 진다. 작품이든 상품이든 그것에 대한 검증이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자발적인 운동의 형태로든 일종의 시장이나 학회의 위원회라는 구조로는) 베끼기에 대해서 도예계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베끼지 않는 작품이 대우받고 독창성 자체가 그 자체로 옹호되는 분위기가 학교-시장에서 조성되어야 한다.
거울 앞에 서서 돌을 던져보자. 그것이 시스템에서 베끼기를 몰아내는 시작이 될 것이다. 그 ‘일’이 목적이 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남의 것을 베껴서 자신의 것인 양 하는 사람의 수는 준다. 남의 것을 자신의 것인 양 하는 일은 어떤 사람의 지적재산을 보호하거나 배타적 권리를 가지는 일보다 좀 더 근본적인 일이다. 그것은 양심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일’을 해서는 안될 만큼 자격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