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도자 축제에 대한 담론
축제의 콘텐츠 개발과 방향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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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원 한국도자재단 전략사업본부 콘텐츠개발 팀장
시대를 먼저 읽어야 대중의 Needs가 보인다
당장 생계유지가 급급했던 시절, 그 때 알맞은 놀이가 있었다. 주로 돈이 들지 않는 놀이. 그리고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시대가 되면서부터 볼거리, 놀거리를 찾아다니는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즉, 5,000불 시대에 맞는 문화와 놀이가 있고, 20,000불 시대에 맞는 놀이와 문화가 있다. 또한 그 소득수준에 따라 각 공동체의 관심분야와 시대적 트랜드가 그 사회의 놀이 문화에 큰 영향을 준다. 특히, 급속한 정보화 사회 속에서는 그 속도도 매우 빠르게 변하고 옮겨져서 보통 민감한 촉을 세워 놓지 않으면 고객에게 큰 즐거움과 감동을 줄 수 없게 됐다. 취미생활도 마찬가지다. 10,000불 이전에는 등산, 낚시에서 10,000불 이후에는 테니스, 볼링, 여행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20,000불 이후에는 골프, 관광으로 30,000불 이후에는 승마, 요트로 그 양상이 변화해 간다. 아이들의 놀이문화도 흐름이 있다.
한 때 ‘창경궁(1909~1983년)’이 ‘창경원’ 이었던 역사적으로 한심하고 창피한 시절이 있었다. 그 곳에 가면 동물원을 볼 수 있었고, 타고 놀 수 있는 놀이 기구들이 있었다. 당연히 아이들의 단골 소풍장소가 되곤 했다. 그리고 서울 어린이대공원이 있었다. 모두 볼거리와 타고 노는 콘텐츠였다. 그것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바로 ‘에버랜드’다. 에버랜드는 소득수준에 따라 놀이문화도 바뀐다는 예를 잘 보여준다. 바로 ‘축제’라는 컨셉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디즈니랜드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동화 속 인물들이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이것에 아이들은 흥분하고 열광한다. 하지만 재방문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곳의 놀이기구와 콘텐츠의 지속관리가 필요하고 최소 3년에서 5년에 한 번은 기구를 바꿔줘야 한다는 비용문제가 있다. 이것이 그 수많은 관람객이 모여드는데도 불구하고 실제 수익을 내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이젠 고객들이 업그레이드 된 놀이기구와 퍼포먼스 컨셉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흥미로운 아이템과 프로그램을 원한다. 단순 놀이와 흥미로는 더 이상 어필 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도자축제의 탄생과 흐름
이즈음에서 일반인의 갈증을 해소시켜준 것이 바로 지역축제다. 아마도 이전의 도자축제가 시장과 놀이문화를 믹스한 정도의 형태라 한다면, 강진청자축제와 울산 옹기문화축제는 시대가 원하는 축제를 개발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서 만든 지자체 행사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행사들 앞에서 ‘2001세계도자기엑스포’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세계도자기엑스포의 등장은 메머드급 국제문화행사로 전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의 이벤트계를 놀라게 했다. 일단 규모 자체가 도자기축제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힘든 규모였다. 2,000억이라는 돈을 투자해서 이천(23만평), 광주(24만평), 여주(2만평), 3개 행사장과 미술관을 준비하고 2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전시와 수 십 만평을 채우는 공연, 퍼포먼스, 판매장을 60일간 지속했던 행사였다. 과연 그 누가 ‘도자기’라는 콘텐츠 하나로 그 엄청난 규모의 이벤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상상했겠는가? 그 행사를 계기로 말로만 1,000년의 도자 역사를 가진 ‘한국’을 세계에 재인식 시킬 수 있었고 학계나 도예계의 위상은 한 방에 정상을 탈환할 수 있었다.
아직도 세계는 ‘도자기’하면 중국을 먼저 떠올리고, 일본의 도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2년 마다 ‘세계도자기비엔날레’를 치루는 대도 이러한데 그 이전에는 어떠했겠는가? 도자기를 위해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그런데 그들의 가장 자랑스러운 문화가 ‘도자문화’이고, 그것을 활용해서 자국의 고급 생산력을 자랑했던 그들이 밉지만 부럽다. 지도층들의 마인드와 국민성 모두가 그렇다. 최소한 문화의 중요성을 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들도 전쟁이 있었고, 많은 유적의 소실도 있었으며, 제약적 환경과 어려움이 분명 존재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도자기 만드는 기술을 부끄러워하거나 자식들에게 물려주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대째 가업을 계승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있다.
어쨌건 우리는 ‘세계도자기엑스포’와 ‘세계도자비엔날레’를 통해서 많은 관람객들은 ‘도자기’가 단순히 ‘그릇’ 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행사 이후 13년간 도예계에도 많은 변화와 바람이 불었다. 디자인이 변했고, 종류와 스타일들도 다양해 졌다. 그리고 작가와 요장들에서는 판매 트렌드를 이해하면서 보다 새로운 도자기기와 판매방법들을 고안해 내고 있다. 아마도 경제가 계속적으로 침체되지 않았더라면 보다 활발한 변화와 시도, 그리고 발전이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다.’라는 간단한 진리가 있다. 힘든 상황과 어려움을 이 ‘도자기’로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져본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도예인들 중의 대부분은 고개를 가로 저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당연히 작가 혼자만의 힘으로는 달성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프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세계도자비엔날레’의 상황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다. 그렇게 지속적인 경제적 투자를 하는데 왜?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세계경제의 불황과 더불어 국내 경기침체, 그에 따른 경기도의 세수 축소로 인해 점점 투자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절대적이진 않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축제는 본래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둘 째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 셋 째 문화 예술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도자축제인가?
지역축제가 시민을 위하고 국민을 위한 축제라고 말들을 한다. 물론 국민들에게 즐거움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경험하게 해주는 행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초점은 정치적인 것에 맞춰져 있고 지자체가 주도하는 한 과정보다는 결과가, 결과 보다는 절차상의 문제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한계다. 처음 행사를 시작할 때는 온갖 관심과 지원이 따른다. 그러나 정작 행사가 끝이 나면 갑자기 뜨거운 감자가 되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면서 공공기관 통합과 해체를 놓고 고민에 빠진다. 결론은 지속적인 지원을 통한 발전계획 보다는 당장의 홍보 효과가 우선한다는 단적인 예이다. 각 지자체의 주관단체들은 단체장의 임기가 끝날 때 마다 부랴부랴 당대에 단체장의 치적이 될 만한 행사를 기획해 내야 한다. ‘도자기축제’ 라고 그 바람을 피해갈 수 없다. ‘한국도자재단’도 마찬가지 신세다. ‘2001경기도 세계도자기엑스포’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3개 행사장과 차기 비엔날레운영, 그리고 미술관을 운영하기 위한 최소의 인원을 남기고 재단법인 세계도자기엑스포를 조직했다. 이후 13년간 단 한 번도 재단의 위기가 아니었던 해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환경에서 5년 뒤, 10년 뒤, 20년 뒤의 플랜을 어떻게 기획할 수 있겠는가? 당장 사라지거나 다른 조직에 편입될 수 있는 환경에서 말이다. 이것이 시민들을 위한 국민들의 문화정서의 앙양을 위한 것인가? ‘문화재단은 돈 먹는 하마!’란다. 교육과 문화예술은 백년을 바라보고 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한 분야이며, 당장 효과가 보이지 않는 분야이다. 우리나라 같이 교육정책이 쉽고 빠르게 변하는 나라가 전 세계에 또 있을까?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정책이 부재하다는 소리 아닌가? 거기에서 무슨 기초 문화예술 교육이 있을 수 있을까? 앞으로의 시대는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절대 고급 경영과 정치를 할 수 없는 시대가 될 것이다. 교과목에 음악, 미술, 체육이 부재한 나라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음악감상과 전시감상을 하고 문화를 즐기고 이해하겠는가?
이 원고를 청탁 받고 주제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이러한 환경에서 문화재단에 몸을 담고 이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필자 자신이 정말 씁쓸하기 짝이 없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새로 단체장이 부임될 때 마다 주문사항은 넘쳐난다. 설상가상으로 각 동종 이익 단체들의 틈새 공략 방어 또한 너무나 힘든 일이다. 이 분야의 지식과 분위기와 정보를 안다는 이유와 공공기관의 약점을 파악하고, 자신의 명예와 자기단체의 이익을 위해서 접근해 온다. 본인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 안되면 억지루머를 퍼뜨리는 소위 ‘하이에나 리더들’은 소명의식을 갖고 힘들게 자리를 지켜가는 일꾼들에겐 가장 큰 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쩌랴! 이 분야에 몸을 담은 것이 죄라면 죄이고, 그것 또한 당대에 겪어야할 이 울타리 안의 숙명이라면 헤쳐 나가야 하는 수밖에. 나의 밥줄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면 그래도 다음 행사와 사업들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이렇게 글을 쓰는 중간에도 버릇처럼 아이디어 노트에 무엇인가 적고 있다.
일상의 하찮은 모티브가 신선한 컨텐츠를 만든다
축제를 기획하는 아이템에 있어서 ‘도자기’라는 것이 대단하거나 특별한 모티브는 아니다. 하지만 지역의 역사성과 한국의 역사 속에서의 ‘도자기’란 특별 할 수 있다. 그 특별함으로 한 번은 주목시킬 수 있었겠지만 계속해서 관심을 끌기엔 한계가 있다. 즉, 테마는 지속해가되, 그 안의 프로그램은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새로운 아이템을 더해가야 한다. 그것이 지자체 축제의 생명력이다. 자칫 그 지방의 시장 장터 수준에 머문다면 결국 그들만의 잔치였다가 쇠락의 길로 치닫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이탈리아 베니스와 브라질 리오의 ‘카니발 축제’, 스페인 발렌시아 ‘토마토 축제’, 중국 하얼빈 ‘빙등 축제’, 인도 푸시가르의 ‘낙타축제’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특별한 아이템은 아니다. 그들의 환경과 일상을 결국 특별한 아이템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 축제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진정한 ‘축제’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참여하는 사람들이나 주변인들 모두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나면 아쉽고 다음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축제’ 자체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누구의 눈치 볼 일도 없고 결과를 위해 편법이나 관람객 수 부풀리기를 할 필요도 없으며,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치룰 일도 없는 것이다. 서로 즐기자고 마련한 잔치에 무슨 다른 이유들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부르지 않아도 공연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알아서 공연하고 알아서 전시하고 알아서 모여서 즐기는 것이다. 물론, ‘비엔날레’는 다르다. 그것은 현대 예술의 현장을 서로 보여주고 정보를 교환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축제는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하는 부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그 두 마리토끼를 쫒다가 모두 놓치는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진정한 축제도, 제대로 된 예술행사도 하지 못하고, 예산만 들이고, 힘은 힘대로 드는 소모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돈을 갖고 운영을 했으니 감사를 준비하면서 자치단체의 눈치를 보느라 석연찮은 축제 프로그램 만들기 일수 이고, ‘자기들만 이해하는 고상한 예술과 학문만 논하는 것 아니냐?’고 질타해대는 통에 어정쩡한 학술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의 현 주소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내부에 있다. 공공기관의 한계라는 이유를 들고 온갖 규정으로 막아서거나, 소위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경쟁이 시작된다. 자기 것을 빼앗길 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반대이유로 막아선다. 그것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결국 상처를 입거나 떨어져 나간다. 때로는 그것을 타개하겠다는 이유로 내부의 전문가나 경험자들을 모두 배제시키려는 시도가 이뤄지기도 한다. 이 모두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결국 옥석을 가리는 눈이 없거나 자신감 없는 결정이다. 결론은 역시 뻔하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히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서로 똘똘 뭉쳐야하는 것이 우선이다. 동시에 외부의 능력 있는 전문가를 과감하게 등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내부의 자신감이다.
성공적인 축제를 위한 조건과 분명한 방향 설정
축제는 흥겹고 즐거워야 한다. 그리고 비엔날레는 분명한 발전 방향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축제를 만들고 상상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먼저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즐거워야 하고, 먼저 흥분상태에 젖어들어야 한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신바람이 나서 만들지 않은 작품은 보는 사람이 감동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즐거움과 흥분 상태에서는 모든 일상이 일반적이지 않다. 굴러가는 낙엽 하나, TV의 대사 한 마디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남들이 하찮게 여긴다고, 남들이 관심 갖지 않는다고 그것들을 놓친다면 새로운 아이템을 발로 차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부분의 기획자들은 전시와 행사를 기획할 때, 대단한 모티브를 발견해서 기획하지 않고 완벽한 확신을 갖고 시도하지 않으며, 그 결과에 대해서 만족해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고, 주변에서 말류 하는 것에 도전하는 기획이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경우가 많다.
축제를 성공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은 그 성격과 방향의 설정이다. 학술 중심의 도자기 축제라 한다면 도자기와 관련된 그 누구를 막론하고 참여해서 놀이든, 체험이든, 세미나든, 전시든, 워크샵이든 마음껏 한판 벌일 수 있어야 한다. 도자발전을 위한 열띤 경합과 토론의장이 이뤄져서 일반인들에게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하게 해야 하고, 관람객 동원이 아닌 대중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놀이축제’라 하면 일반인들을 위한 공연과 볼거리, 놀거리 등 모든 문화가 모여 한 판 신나게 굿판을 벌이는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들이 혼재하는 탓에 전시장 앞에 시골 장이 서 있는 풍경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만약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면 이렇게 모호한 대규모 행사를 계속 치룰 것인가? 그것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비슷한 형태로 말이다. 전문 행사와 일반 행사는 분명히 구분이 되어야하고, 같은 아이템이라면 확실하게 행사의 성격을 구분해야 한다. 또한 전문 행사는 일반 관람객이 보러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부터 지워야 한다. 지금의 국민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앞서가 있고, 오히려 전문적인 것에 목말라하고 있다. 이 문제가 방문 관람객 수 늘리기로 견줄 일인가? 이 땅의 문화 교육과 국민 마인드가 바로 서는 그 때, 더 이상 지자체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사를 기획하고 함께 즐기는 그 때가 진정한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된 때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 준비가 돼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