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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0월호 | 특집 ]

해저유적 출토 청자의 현황과 성격
  • 편집부
  • 등록 2012-01-03 11:59:50
  • 수정 2013-03-04 15: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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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욱

민족문화유산연구원장

 

한국에서 해저유적에 대한 관심과 학술적 조사는 1976~1985년 실시된 신안 방축리(신안선) 해저유적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계속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고선박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해저유적은 절대 다수가 고려시대이며 출토 유물은 도자기가 대부분으로 고려청자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도자기가 지닌 재질적 특징이기도 하지만, 고려시대 조운漕運을 이용한 연안항로가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도자는 많은 양이 함께 출토되기 때문에 기종과 기형, 문양, 번법燔法, 유약, 태토 등 제작기법의 연구를 통해 다양한 시대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생산지와 운송로를 밝혀 유통체계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식생활의 변화상을 유추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해저에 매장된 도자기들은 수중에서 오랜 기간 매몰되었으나 고화도로 번조된 재질적 특성으로 인해 조형성과 품질 등이 거의 변화되지 않아 육상에서 출토되는 도자기보다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즉, 가마터나 퇴적층 등에서 출토되는 도자들은 번조과정에 폐기된 것으로 완전한 형태를 갖출 수 없지만, 해저에서 인양되는 도자기들은 완성품으로 운반과정 중에 선박이 난파되거나 좌초되어 매몰된 것으로 기형과 문양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들 해저유적 출토 도자기들은 한정된 시기에 대량으로 생산된 유물들로 장식의장과 제작기법, 기종과 기형의 조합관계, 편년연구 등 도자사 연구에 더없이 중요한 자료이다. 이처럼 해저에서 다량의 청자가 조사되는 것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도자의 유통이 연안항로를 이용한 해로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운송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청자가 발견된 해역의 대부분이 고려시대 조운로에 위치하고 있음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부 해저유적은 선박과 함께 도자의 포장방법과 선적상태, 선상 생활용품 등이 잘 남아 있어 도자사와 생활사 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이들 고려청자는 청자가 제작되던 그 시기의 가장 고품격의 청자들로 행선지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어 청자의 조형성을 비롯하여 생산과 운반, 소비 등 유통구조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글은 해저유적에서 출토된 청자의 현황과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까지 조사된 해저유적 발굴 성과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해저유적 출토 강진 청자
문화재청에 따르면 해저에서 출토되어 신고된 유물의 건수는 고려시대가 50% 정도로 가장 많고 이 가운데 청자의 수량이 가장 많아 고려시대 연근해 해로를 통한 도자 운반이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1) 이들 유적 가운데 발굴 조사가 실시된 곳은 신안 방축리와 완도 어두리, 태안반도, 군산 비안도, 군산 십이동파도, 보령 원산도, 군산 야미도, 태안 죽도(대섬), 태안 마도, 무안 도리포 해저유적 등 이다(표 1). 이들 해저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고려청자로 한국 도자사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앞으로도 그 자료적 가치는 무궁하다고 하 수 있다. 강진에서 생산되어 해로를 통해 운송되는 과정에서 해저에 매몰된 청자는 태안반도와 보령 원산도, 무안 도리포, 태안 죽도, 태안 마도 등에서 조사가 실시되어 고려와 강진 청자의 연구가 진일보하는데 결정적 자료를 제공하였다. 특히, 태안 죽도와 마도에서 출토된 청자는 비교적 정확한 편년과 생산지 등을 알려 줄 수 있는 목간과 죽찰이 함께 출토되어 유물의 제작시기뿐만 아니라 생산 구조와 유통 과정, 소비 성격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한편 이들 청자는 모두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 유물들로 학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미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태안 죽도 해저유적2)
태안 죽도(대섬) 해저유적은 동쪽에 안면도가 있으며, 서쪽은 예로 부터 4대 난행량難行梁으로 불리는 관장목關丈項; 賈誼島와 馬島 사이과 인접하여 있다. 가까운 항구는 북서쪽에 있는 태안군 근흥면 안흥항과 신진도항이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생산과 유통 과정을 알수 있는 목간이 함께 출토되어 죽도 해저유적에서 출토된 청자가 강진의 대구소에서 생산되어 재지세력의 책임으로 선적되었으며, 중심 소비자는 개경에 거주하는 유력자들과 관련되었음이 밝혀져 청자의 생산과 유통 과정을 연구하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죽도 해저유적에서 출토된 청자는 23,000여 점으로 강진에서 생산되어 개경으로 이동하던 도중 풍랑을 만나 침몰한 배에 선적되었던 유물들이다. 이들 청자는 고려 중기의 부족한 자료를 메워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로 그동안 널리 알려진 강진 용운리 10호 가마터 발굴조사 출토품보다 더 확실하게 중기청자의 양상을 보여줄 수 자료들이다. 즉, 가마터 출토품만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고려 중기청자의 전개양상을 유추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죽도 해저유적 출토 청자는 대부분 회백색의 내화토 비짐을 받쳐 만들었으며, 문양은 압출양각과 음각, 철화, 퇴화 등으로 시문하였다. 문양은 비교적 다양하게 확인되며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도 있다. 또한 문양 가운데는 고려적인 요소와 중국적인 요소가복합적으로 시문된 예도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양각으로 시문한 문양은 어떤 시문기법보다 중국 자기의 새로운 경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음각 문양에 보이는 독특한 꽃 모양은 중심 문양을 이루는 모란과 국화의 변형으로 생각되며, 이처럼 여러 모습으로 변형된 꽃의 형태는 고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외에 작은 호에서 확인되는 도기적인 요소는 고려 내적인 요인도 반영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죽도 해저유적 출토 청자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중국과의 영향관계가 강하게 확인되며, 중기 청자의 대표적 유형인 압출양각 모란절지문 대접과 접시, 연판문잔, 뇌문잔, 팽이형잔 등이 확인되지 않아 시기를 추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것은 강진 유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이전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들이 같은 시기의 제작기법과 문양을 보여주는 것만 아니라 현재까지 미흡한 고려 중기청자의 성격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많은 수량의 청자가 선적되어 있고 세부 표현에서 다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강진의 여러 가마에서 함께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 유물의 기형과 문양을 지표 조사품과 비교하였을 때 강진 용운리를 중심으로 사당리 등의 가마에서 생산하여 선적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3)

죽도 해저유적 출토 청자는 목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공적인 성격보다 최대경 등이 수취인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적인 물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선적되었을 수도 있으나 좀더 확대하여 유추한다면 이들을 경유하여 강진 청자가 상품으로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즉, 도자의 유통과 상업 과정을 유추 할 수 있는데 이는 고려 중기 강진에서 직접 물건을 공급받아 판매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태안 마도 1호선 해저유적4)
태안 마도는 원래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에 부속된 섬이었으나 현재 육지와 연륙되어 있다. 마도 앞바다 안흥량 일대는 서해로 돌출되어있는 지형 특성상 파도가 거세고 안개가 심해 통행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해난사고가 빈번하였다. 마도 1호선은 함께 출토된 목간과 죽찰
에 의해 무신정권이 안정화되던 1207(희종 3)~1208년 전라도의 수령현(현재 장흥군 장흥읍)과 안로현(현재 영암군 금정면), 죽산현(현재 해남군 마산면), 회진현(현재 나주시 다시면) 등에서 화물을 싣고 개경으로 향하던 중 1208년 봄 태안 마도 앞바다에서 침몰된 선박이다. 수신인은 별장 권극평과 동정 송수오, 대장군 금순영 등으로 관료들의 이름이 정확히 표기되어 있으며, 발신인은 지방 향리로 ‘송춘’ 등의 이름이 확인되고 있어 이들이 책임지고 선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발굴된 목간과 죽찰에는 정묘(1207년) 10월, 12월 28일과 무진(1208년) 정월, 2월 19일 등의 간지와 날짜가 적혀 있어 화물의 선적시기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마도 1호선은 무진년 2월 19일 이후 출항한 것으로 보인다. 목간과 죽찰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 대장군 김순영과 별장 권극평은5)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인물로 이를 통해 마도 1호선이 1208년 출항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선적 물품과 포장 단위, 발신지와 수신자 등이 기록되어 있어 오늘날의 택배 송장과 유사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마도 1호선이 항해하였던 고려 중기는 청자 발달사에서 매우 역동적인 시기로 전성기로 대변되고 있다. 초기의 다완 중심에서 벗어나 기종이 다양해지며, 문양의 소재와 표현, 시문 기법 등도 풍부해지면서 품질과 수량에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전성기임에도 불구하고 학술적 자료가 많이 축적되지 않아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마도 1호선 출토품은 성격이 미흡한 13세기 초반의 도자 양상과 성격을 밝힐 수 중요한 자료이다. 마도 1호선에서 출토된 청자는 모두 334점으로 기종은 대접과, 접시, 완, 잔, 병, 화분, 항, 반, 정병, 주자, 승반, 기대 등인데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표 3). 이는 생산 시설인 가마터와 소비지인 생활유적에서도 확인되는 통계로 도자가 일상적인 반상 용기를 중심으로 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품질은 상감모란문주자와 양각연판문접시 등 일부를 제외하면 성형과 정형, 문양, 유약, 번법 등에서 양질청자와는 구별되어 우수한 품질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태토는 모래가 많으며 자화 정도가 상이하고 받침도 일부 규석이 있으나 대부분 모래가 섞인 거친 내화토 비짐을 받쳐 번조하였다. 또한 찌그러지거나 기포가 부풀어 있는 것 등도 섞여 있어 그 품질이 높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마도 1호선은 현재의 장흥과 해남, 영암, 나주 등을 경유하여 개경을 향하던 중 태안 마도 앞바다에 침몰하면서 13세기 초반 청자 제작과 유통 과정 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따라서 선적되었던 청자는 이 지역에서 생산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들 청자 가운데 철화 등 일부 해남산을 제외하면 대부분 강진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강진 생산품은 기형과 문양, 시문기법, 번법 등을 살펴보았을 때 강진 용운리 10호 Ⅱ층 ‘나’ ‘다’ 유형과 유사하여 이들의 제작 시기와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도 1호선에서는 벼와 콩, 보리, 메주, 소금, 죽제품, 젓갈, 꿀, 참기름 등 다양한 물품 목록이 적혀 있는 목간과 죽찰은 있으나 도자와 관련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도자의 수량도 많지 않아 이 선박이 도자 수송이 주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보령 원산도 해저유적6)
보령 원산도 해저유적은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에 위치 한다. 이 해역은 충남 태안군 안면도와 원산도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원산도 사창마을 앞 해안에 위치하며, 썰물 때는 해면이 노출되는 지형으로 굴 양식을 하는 곳이다. 원산도 해역에 대한 학술조사는 2004년 10월 문화재청에 청자파편이 신고되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 2004년 11월 국립해양유물전시관(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처음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추가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2005년 11월 추가 조사가 실시되었다.
출토품은 대부분 전성기 비색청자 파편으로 일상 생활용기인 대접과 접시, 잔을 비롯하여 특수용기인 향로와 매병, 의자, 베개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매우 특징적이다. 일상 생활용기의 경우 대접은 양인각보상당초문대접과 양인각운학문대접, 음각앵무문대접, 반양각연판문대접 등이 있으며, 접시는 양인각쌍어문접시과 양인각보상당초문접시, 양인각모란문접시 등이 있다. 이외에 음각모란문잔을 비롯하여 잔받침과 합, 병, 호, 항 등이 있다. 의례용 또는 장엄용으로 사용되었던 특수용기의 경우 향로는 삼족상형향로와 도철문방형향로, 도철문원형향로 등 다양한 유형이 출토되었다. 특히 상형향로에서는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원앙형향로와 유사한 조형이 있으며, 도철문방형향로는 호암미술관 소장의 청자양인각도철문방형향로(보물 제1026호)와 비슷하다. 연적은 간송미술관 소장 청자오리형연적(국보 제74호)과 조형성이 유사한 예가 있다. 매병은 음각연화절지문이 가장 많으며 상감운학문매병과 상감매죽유노수금문매병 등이 일부 확인된다. 음각연화절지문매병은 문양구성이 이헌 소장품(국보 제254호)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청자상감연판문과형병, 음각연화절지문과형주자, 상감모란문사이호, 투각돈, 투각기대, 동자형연적, 약봉, 음각연화절지문침 등 매우 다양한 기종과 문양이 확인된다. 이들은 대부분 최상의 양질청자로 번법은 일부 거친 내화토 받침을 제외하고 규석 받침의 갑번품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상감청자는 매병과 잔 등에서 소량 확인되며 무문과 음양각, 상형 등의 순청자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전성기 청자의 출토 양상과 비슷하다. 이들 출토품의 생산시기는 청자음각연판문접시의 굽 안바닥에 음각 「○」문이 새겨져 있어 1230년대로 판단된다. 음각「○」문은 1232년 하한의 파주 혜음원지와 1237년 축조의 강화 희종 석릉, 1226~1250년 층위를 갖는 일본 겸창의 약궁대로 주변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또한 이들 음각 「○」문청자는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8·23·27요지 등 한정된 가마터에서만 확인되고 있어 제작시기와 제작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표식적 유물이다. 따라서 이들은 1230년대에 강진에서 제작되어 개경 또는 강화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산도 해저유적 출토 청자는 전성기 비색청자의 제작 시기와 용도, 조합상 등을 알려 줄 수 있는 특징적 유물로 도자사뿐만 아니라 경제사와 생활사 등 고려사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청자는 유태와 기형, 문양, 번법 등이 매우 우수한 최상의 양질청자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왕실 등 최상류층을 위해 생산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기존 문화재급 청자들과 품질이 유사하여 상호 비교 연구가 가능하다. 특히 다양한 유물이 일괄 출토되어 기존 전성기 비색청자들에 대한 심층 연구가 추가로 진행될 것으로 예견된다.


태안반도 해저유적
보령 태안반도 해저유적은 「기사」명상감청자가 다량 출토되어 유명한 유적으로 매우 중요한 발굴조사였지만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아 「기사」명과 공반된 유물의 전모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7) 태안반도 해저유적의 발굴조사는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이 보령 납대지도와 장고도를 비롯하여 인근의 마도, 신진도리, 죽도 등의 근해에서 실시하였다. 유물은 고려청자 40여점과 함께 조선백자 등이 인양되었다. 고려청자는 초기의 해무리굽완 1점과 청자상감투각기대 1점이 있으나 대부분 고려후기를 대표하는 간지명 상감청자 가운데 가장 빠른 「기사」명상감청자이다. 또한 청자상감투각기대도 「기사」명상감청자와 동일한 시기의 제품으로 「기사」명 상감청자와 함께 선적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들 출토품은 현재까지 「기사」명상감청자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117번지일대 요지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청자는 사당리에서 생산되어 강진만 일대 포구에서 장흥창의 책임하에 선적되어 조운로를 따라 개경으로 운송하던 도중 태안반도에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생산지(강진 사당리)와 기사년(1329년)이라는 정확한 생산시기를 알 수 있는 자료로 도자사뿐만 아니라 항해사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한편 태안반도 인근해역인 당진과 서산, 보령, 서천 등 여러 해역에서도 고려청자가 발견되고 있어 이 일대에서 많은 조운선이 침몰 또는 조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보령 대천해역에서는 1983년과 1984년 청자대접과 청자연판문대접 등 5점이 발견되었으며, 1985년에는 13점의 상감청자(청자상감유노수금문 「기사」대접 1점, 청자상감유노문 「기사」명접시 1점, 청자상감 「기사」명팔각접시 2점, 청자상감국화문 「기사」명접시 2점, 청자상감국화문대접 1점, 청자상감국화문잔 1점 등)가 발견되었다. 보령시 오천면 불모도, 삽시도, 석대도, 용도, 원산도, 효자도 등 해역에서는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청자대접과 청자접시, 청자잔받침 등 30여점의 청자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보령시 웅천읍 석대도?황죽도 등 해역에서도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청자대접과 청자접시 등 15점의 청자가 발견되었다.
한편 인근의 서산해역에서는 1983년 신진도리 마도 앞 해저에서 청자대접 50여점이 신고되었으며, 1976년과 1977년, 1987년에 청자광구병 등 4점이 신고되었다. 서면 마양리 앞 해저에서는 청자대접 등 8점이 발견되었다. 최근에는 태안 마도와 죽도 인근에서 고려시대 선박과 청자가 다량 인양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충남 서해안에서는 30여점의 청자가 발견된 예가 있다. 이처럼 많은 해저유물이 보령을 중심으로 태안반도를 포함한 인근해역에서 출토되는 것은 이 지역이 개경이나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하는 경유지이며, 또한 매우 위험한 항로로 선박의 침몰과 조난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후 이 해역에 대한 정밀한 조사를 실시한다면 고려 도자사와 선박사, 생활사, 해로사 등을 연구하는데 더 많은 자료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10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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