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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7월호 | 뉴스단신 ]

아사카와 타쿠미淺川巧 탄생 120년 기념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타쿠미淺川巧 형제의 마음과 눈 - 조선시대의 미美 ②
  • 편집부
  • 등록 2011-09-05 11:48:59
  • 수정 2011-09-07 09: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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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9~ 7. 24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특별전 

 

정은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학예원

 

한국 최초의 민간 미술관
조선민족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의 설립-‘民藝’의 원점
일본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박물관·미술관은 1872년에 설립된 문부성박물관文部省博物館으로 이것이 현재의 동경국립박물관이다. 한국에서는 1908년에 설립된 이왕가박물관이 가장 빠르고, 그 후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이 개관하였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1924년에 야나기 무네요시와 아사카와 형제가 중심이 된 조선민족미술관이 설립된다. 1936년 설립된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보다도 12년이나 빠른 개관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민족미술관의 구상을 확실히 서술한 것은 1920년에 조선을 여행했을 때 타쿠미의 집에서 본 청화진사연화문호花辰砂蓮花文壺에 깊게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야나기는 타쿠미와 상의한 후 1921년의 『시라카바白樺』 1월호에 조선민족미술관 설립계획을 발표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조선의 美를 전함’과 동시에 ‘그 지속과 새로운 부활의 계기’가 되고, 또한 조선과 일본 사람들이 ‘친하게 만나서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게다가 야나기는 일본의 동경이 아니라 경성(서울)에 미술관을 개설한 것에 큰 의미를 두었고, ‘그 땅에 태어난 것은 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서술했다.
야나기는 조선민족미술관의 개관을 위해 기부금을 모을려고 공연회와 음악회를 열어 그 수익을 자금으로 충당했다. 이때 아사카와 형제를 비롯하여 한일 양국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야나기를 지지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타쿠미는 수 년 전부터 수집하고 있었던 공예품을 제공하고, 또한 미술관의 준비를 위해서 자신의 급료를 전부 사용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1924년 4월9일 경복궁내의 집경당緝敬堂에 조선민족미술관이 개관한다. 경성 거주의 화가였던 가토 쇼린진加藤松林人에 의하면 그곳에는 ‘조선 사람들의 생활에 따르는 생활 도구였던 것은 무엇이든지 수집되어略, 망가지거나 파손된 것도 많지만略, 그 생활의 때가 얼룩져있다’고 한다.1) 정말 조선민족의 생활에 뿌리를 둔 미술관이었다.

 

아사카와 형제가 사랑한 조선도자의 미
서양과 일본에서도 한국 도자기에 대한 근대적인 흥미와 연구는 고려청자의 재발견과 함께 시작했다고 해도 좋다. 19세기 전반부터 고려시대의 고분이 도굴되기 시작하였고 또한 철도공사에 따라 그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청자가 새롭게 출현한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누가보아도 알기 쉬워 곧바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에 비해 조선백자의 「흐릿하고 두툼함」은 언뜻 보기에는 기술이 퇴화한 것처럼 보인다. 당시 일본과 유럽의 연구자들은 조선의 도자기는 옛날에는 훌륭했지만, 그 후로 쇠퇴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이러한 가치관에 최초로 이의를 주장한 것이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 무네요시이며, 잡지 『시라카바白樺』의 「이조도자기특집호, 1922년」가 그 첫 발언이 되었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7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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