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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월호 | 특집 ]

창간 15주년 기념특집 Ⅱ
  • 편집부
  • 등록 2011-06-20 17: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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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작업, 우리 도예계

창간 15주년을 맞아 우리 도예계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전업작가와 교육자 중 세대구분 없이 9인(가나다순)을 선정했다. 그들에게 던져진 10개의 질문과 그 답을 통해 각자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도예계 선배로써 전하는 애정어린 조언과 후배 도예인으로써 갖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다짐을 들어보자.

 

 

공윤정 도예가

 

Q1. 도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인연)에 대해서
시작 무렵 나에게는 도예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디자이너가 꿈이었던 뜻에는 초반부터 차이가 좀 있었지만 흙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에 흥미를 많이 느꼈었고 재료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흙 작업을 포기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어려운 도전을 하고나서 결과가 좋을 때 도예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즐거움은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많은 도예가들이 공감할 것으로 생각된다.

 

Q2. 자신의 예술관에 영향을 준 인물
나에게는 훌륭한 스승들이 많이 계시지만 로마에서 공부하던 때만큼 예술에 대해 깊이 생각할 만한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아쉽게도 돌아가셨지만 주조를 가르치시던 멜리 교수님이 지금도 생각날 때가 많다. 지도교수님은 아니었지만 예술가로서 장인으로서 또한 교육자로서의 그의 방식을 지금도 존경하고 있다.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니노 카루소가 로마에서 작업을 하던 시절의 동료이기도 했으며, 학생들에게 따뜻하고 엄격한 교수님이셨다. 아직도 머릿속에 남는 그의 말은 어려울 때일수록 힘이 되는 것 같다. ‘예술가는 결코 부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순수하게 꿈을 양육하듯이 예술작품을 만들어야하며 그것에 만족해야한다.’라는 말을 항상 수업시간에 가끔 하시곤 했다. 언제나 생각해봐도 결코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말이다.

 

Q3. 자신의 흙작업에 대한 의미 부여
제작방식에 있어 여러 가지 지식을 수용하고 새로운 표현에 도전하는 것은 21세기에 살고 있는 도예가의 한 사람으로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의미에서, 개방적인 사고로 작품을 대하고 싶다.

 

Q4. 초기부터 현재까지 작품의 변화
작품은 캐스팅기법과 스테인레스 스틸을 적용하는 방식 두 가지를 수용하지만 초기에는 스틸의 적용비율이 높은 편이었고 5회 개인전에서는 스틸과 유약을 사용하지 않고 점토와 대리석 발수제만을 사용하였다. 세밀한 면을 강조하고 형태의 외곽선을 뚜렷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색은 배제하였다. 전시마다 컨셉이 다르기 때문일 뿐 제한을 두지는 않는다.

 

Q5. 작품 제작 과정 중 특별한 점
구상을 화면상에서 조정하고 예상치를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outline을 정하고 3D성형을 한다. 모델링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결과물이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표현되는 장점이 있다. 디자인이 대부분 실제 제작되는 것은 아니며 샘플링의 결과에 따라 조정된다. 석고틀이 제작되면 파인소지슬립으로 캐스팅을 하고 투명유와 반무광매트유로 완성한다. 나무, 스틸 등의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 대부분은 직접 제작한다.

 

Q6. 도자예술의 재료적 한계성에 대해
두 가지의 경우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번조 중 변형이다. 정성을 들여 제작한 작품이 소성을 거치면서 예상과는 다르게 완성되어 나오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며 화도를 낮추는 것은 그만큼 강도를 약하게 하기 때문에 현명한 선택이 되지 못한다. 전통작업의 경우라면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타 재료에 비한다면 최대의 단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점은 번조의 방법적인 측면이나 기술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캐스팅의 경우 Sector를 사용하여 보완하기도 하며 길고 가는 형태를 번조하기위해 천정에 매달아 소성하는 작가도 있다. 소성 후 치수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건식제작의 경우는 정도가 거의 미미하지만 습식제작의 경우, ㎜까지 정확하게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른 하나는 강도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도자는 대체적으로 타 재료에 비해 고가의 재료로 대접받는 한편 환경조형물에서는 파손의 우려로 인해 재료의 채택빈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적은 편이다. 대중적 인식의 변화를 이끄는 힘이 필요한 부분이다.

 

Q7. 도예가의 삶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개인전 때마다 좋은 일, 혹은 좋은 인연은 항상 있었다.
 
Q8. 전업 도예가의 태도와 철학
1회 개인전에서 한 교수님께서 욕심이 너무 많다면서 ‘과유불급’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기억해보면 그때는 열정은 있었으나 참으로 욕심이 많은 시절이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는 법을 터득한 건 그 한참 뒤였다. 전업도예가로 살기 위해서는 그것의 완급조절이 필요한 것 같다. 모든 것에 여유가 필요하다.

 

Q9. 도자예술의 대중화에 대한 생각
주변에 재능이 있고 훌륭한 도예가들은 많다. 그러나 작가를 마케팅을 해주는 곳은 없다. 그렇다고 본래 작품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내성적인 예술가들이 스스로 광고를 하고 다니는 것도 좀 이상해 보인다. 아마도 소수를 제외하면 다른 공예분야도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작가가 아닌 제삼자에 의한 작가마케팅이 앞으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럽의 경우, 예술에 대한 대중의 의식수준이 높고 거리감이 적기 때문에 작가들이 기업이나 개인의 후원을 받는 경우는 많다. 또한 작가를 소개할 수 있는 시스템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작가에게 작품을 사는 것 말고도 사무실이나 상점 내외부의 인테리어 및 엑스테리어를 디자인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대중화는 그런 측면에 도달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기’를 제외한 도자가 그만큼 대중에게 거리가 먼 것 일 수도 있다. 다가가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대중과의 소통을 끌어낼 열쇠는 아마도 우리의 생활터전 주변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Q10. 다음 세대를 이끌 도예인으로써 꿈꾸는 우리 도예계
도예계는 앞으로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좋은 전시와 연구개발을 통해 업그레이드된 도예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미래의 도예가들에게 미안해지지 않을 것 같다.

 

곽태영

건국대학교 디자인조형대학 공예학과 교수

 

Q1. 도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인연)에 대해서
응용미술학과에 입학해 3학년에 진입, 5개의 전공 중에서 거의 그래픽디자인을 선택하는 것이 당시의 대세였다. 공업디자인은 학과로 설치되었었다. 당시 나는 치열한 경쟁을 부축이는 취업위주의 제 분야에 매력을 갖지 않았다. 다행히 집안의 어려움이 덜했기에 평생 할 수 있는 전공분야를 생각했었고, 도예는 자연히 전공으로 다가왔다.

 

Q2. 자신의 예술관에 영향을 준 인물
대학에 입학해서 영향을 주신 분은 응용미술학과에서 처음 강의를 시작하셨던 이두식 교수이다. 늘 열정을 갖고, 대단한 테크닉을 실연하면서 생각과 손의 자유로운 시도와 어울림에 대해 큰 영향을 주었다. 전공시절에는 故 원대정 교수와 강의를 하셨던 한길홍 교수이다. 원 교수님은 늘 변함없는 작업에의 자세를 몸으로 보여주셨고, 말보다는 몰두를 통한 열정의 가치를 일깨워 주셨다. 한 교수님은 디자인적 사고와 도자의 표현에 대해 정보를 주셨고, 많은 대화를 통해 젊은시절 도예가의 긍지와 직업을 갖는데 가이드의 역할을 해주셨다. 또 최건 선배는 오늘까지 인생의 멘토로서 나의 성숙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외서와 작품을 통해 많은 분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Paul Wunderich와 Antoni Tapies는 지금도 작품과 자료를 통해 교유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Q3. 자신의 흙작업에 대한 의미 부여
도벽을 테마로 학위를 받았고 지금껏 조형적 작업을 해왔다.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유행을 좆아 작업의 화려한 변신을 시도할 때도 그들을 읽으며, 내 길을 왔다. 내 장르에서 내 스타일을 지키며 한껏 작업해 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Q4. 초기부터 현재까지 작품의 변화
스탬핑 기법의 혼용은 줄곧 사용하고 있고, 평면에서 입체로 변화해 왔다. 입체작품의 주제를 한국적 소재에서 찾아 작업해 왔으나, 현재는 단순한 입체적 본질에 타 재료의 도형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Q5. 작품 제작 과정 중 특별한 점
흙에 나타나는 직설적 형의 구성이다. 그리고 도자의 공예적 본질인 소성을 통한 유약의 중첩성과 그 깊이를 위해 여러 번 소성을 하고 있다.

 

Q6. 도예가의 삶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첫 도벽을 완성 후 느낀 뿌듯함과 자신감이었다. 그 일은 훗날 나에겐 나름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해 주었으며,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하였다.
 
Q7. 도예가란 모름지기
도예란 충분히 즐거운 놀이이며 평생을 투자할만한 가치 있는 일이다. 난 평생 할 수 있는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다. 지금도 또 내일도 내 일을 갖고 평생의 업으로 살아갈 것이다.

 

Q.8 한국 대학교육의 문제점
변하는 환경에 대처하고 연대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미온적인 부분이 있었다. 19세기의 강의실에서 20세기의 교수들이 21세기의 학생들을 지도했던 구태를 과감히 개선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에게 도예의 진정한 가치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강의실의 분위기와 환경을 바꿔야 한다. 실기실의 모습이 너무 지루할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또한 커리큘럼과 연계과목 그리고 취업 관련 스터디가 활발하게 진전되고 있지만 담당교수들의 생각보다는 두세배 변화해야 속도감을 겨우 맞춰갈 수 있을 것이다. 전수의 카리스마 보다는 함께 호흡하는 모습의 강의의 전략 연구와 개발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수업을 만들어 가는 젊은 강사들이 늘어가는 것은 희망수업의 비전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너무 도예전공학과가 과다할 정도로 개설되었다. 수요를 따르고도 남을 과포화의 상태는 예고된 문제의 출발이었다. 따라서 도예계에서 업으로 종사하는 교수의 수가 많았고 그에 따른 쏠림의 현상은 건전하고 다양하며 튼실한 직업군의 형성에 정체의 시기를 제공했었다. 그 나름의 정리가 필요한 시기이다. 요즘 도예전공의 경우 전과나 편입의 입시수단으로 전락하고도 있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입학 후 변해가는 친구들이 늘어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 도예의 역사에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고난의 시기는 여러 번 있었다. 대학에서 얼마나 변화를 모색하고 진취적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해 왔었는지 반문해 본다. 세대교체의 집중시기에 또다시 화석처럼 굳어지지는 않았는지 교수의 직업을 가진 나는 늘 반성하며 일어나고 있다.

 

Q9. 기술 교육과 예술개념 교육에 대해
이분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예의 본질은 기술과 미 즉 과학과 예술과의 결합이다. 양 분야의 교육은 공히 이수해야하며, 어느 쪽으로 종사하든 충분히 자양분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기술이 따르지 않으면 실현의지가 감소될 것이고, 예술적 사고가 부족하면 생명력이 감소될 수밖에 없다. 기술은 늘 진화하고 변한다. 재료의 발전 도구의 개발 등이 능률을 더하고 시간활용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따라서 기술교육은 철저히 전문화 시켜 기술적 연구 인프라를 조성해야 한다. 어느 것도 서로의 부속체 정도의 방법론적 도구로 전락해서는 도예의 올바른 교육은 어렵다고 본다. 이론과 재료 역사에 대한 컬리큘럼은 요즘의 도예교육에서 어떤 현실일까? 반문해본다.

 

 Q10. 한국 현대도자예술이 추구해야할 방향
각 개인의 창의성이 독창성으로 구현되어야할 것이다. 국내, 혹은 국외 어디에서 공부했든 튼실한 자신의 조형언어를 소유해야 한다. 배운 방법에서 자신의 것을 찾아나가는데 조바심을 가진 후배, 조금 스타일을 바꾸고 자신의 위로와 착각에 빠진 후배들을 발견할 때마다 너무 쉽게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건전한 젊은 도예가들의 신선함이 지치지 않도록 적극적인 발표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

 

김세용

대한민국 명장(02-22호)

 

Q1. 도예를 시작 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고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도자기를 보고나서부터이다. 진열해 놓은 유물 중에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도자기였고 그 중에서도 고려청자가 내뿜는 영롱한 비색에 매료되면서 도예가의 길을 꿈꾸게 되었다.

 

Q2. 자신의 예술에 영향을 준 인물
일찍이 도예에 관심이 많은 아들을 위해 작고하신 선친께서 홍익대 도예과 신상호 교수님으로부터 도자기의 장식기법과 기초를 전수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이후 남곡 고승술 선생님의 요장에서 번조기술과 유약 등 도예의 기본적인 공정을 배웠다. 1978년 작은 도예연구소를 설립하고 나름대로 연구 개발을 하다가 1998년 명지대 산업대학원 도자기 기술학과 이병하 교수님의 지도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

 

Q3. 자신의 흙 작업에 대한 의미
사람은 타고난 업보대로 사는 업생業生과 원을 세워 만들어가는 원생願生으로 사는 두 가지의 삶을 산다고 한다. 나는 도자기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네 가지 원을 세워 원력願力으로 살고자 했다. 첫 번째 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의 청자였고, 두 번째 원은 세상에서 가장 큰 청자, 세 번째 원은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청자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 하고 진화 시키는 수행을 하자는 것이다. 이런 원력으로 40여년을 한 길로 살다 보니 어느새 내가 만든 도자기들이 나의 분신이며 거울이고 종교가 되었다.

 

Q4. 초기부터 현재까지 작품의 변화
초기에는 대부분 고려청자 모조품 만드는 일들을 했는데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항상 네 가지 원을 실현하고 싶어 전통의 맥을 이으면서도 어떻게 이 시대의 문화를 담아 낼 수 있는 21세기형 청자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군자, 산수화 등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의 모든 소재를 장식 기법에 응용하기 시작 했다. 이렇게 시작된 연구가 수 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정교하고 섬세한 작품 들을 탄생 시켰다.

 

Q5. 작품제작 과정 중 특별한 점
도자기의 기본이 흙과 유약과 불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지금은 흙을 만드는 공장이나 유약을 만들어 파는 곳이 있어 누구나 사서 쓸 수가 있다. 하지만 예전엔 이 모든 것을 본인이 만들어서 사용했다. 그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흙과 유약을 직접 만들어서 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색청자를 만들겠다는 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나만의 비색 청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만의 흙과 유약이 필수적이다. 그 다음이 새로운 형태의 성형과 그에 맞는 옷을 입히는 장식연구다. 특히 이중투각기법은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이중투각의 새로운 기법과 문양 등을 연구 하였고 무엇이든지 빨리 쉽게 대량을 추구하는 시대에 느림과 비움의 미학으로 수행을 삼았다.

 

Q6. 도예가의 삶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역시 최고의 기술을 인정을 받아서 2002년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 되었을 때이다. 그 밖에도 치열하게 흙과 불과 씨름을 하며 수없이 실패를 거듭 하고나서 흙의 속성과 불을 깨닫고 이해했을 때이다. 특히 대작을 만들기 위해 10년 동안 실패를 거듭하며 10전 11기로 1m가 넘는 금강산 매병과 주병을 완성 했을 때의 희열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Q7. 오늘날 전통도자기의 위상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려청자를 일컬어 달나라에 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만큼이나 위대한 업적 이라고 말한다. 그런 자랑스러운 고려청자를 전승 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이를 계승 발전시킬 책임 또한 막중함을 알고 있다. 현재 전통도자기는 다양한 도자기들의 출현으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찾는 아주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 그렇다고 손쉽고 공정을 무시한 허술한 도자기를 대량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도모陶母로서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고난은 참고 견디기가 어렵지만 우리의 얼을 갈고 닦아 향상시켜주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누가 알아주든지 말든지 한 길로 가다보면 훗날 내가 만든 도자기가 한줄기 빛이 되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

 

Q8. 전업도예가의 태도와 철학
도예가란 모름지기 자기 철학이 분명해야한다. 도자기가 주는 느낌은 만드는 사람의 성품과 일치한다. 만든 사람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자기는 무한대의 생명력을 가진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고 본다. 우주의 생성 원리가 地, 水, 火, 風, 空이라면 도자기도 똑같은 원리로 만들어지는데 空이라는것은 만든 사람의 노력과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작품을 만들어 마치 자식을 탄생시키듯 최선을 다 해야 하며 그 작품을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마음수행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9. 후배 전통도예가를 위한 제언
지금은 조금 힘들더라도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전통 도자기를 계승 발전시키는 일을 소홀이 하지 않기를 바란다. 꾸준히 자기연마를 하고 한 길로 가다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도자기는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에 만든 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들어난다는 점을 꼭 명심 해주길 바란다. 전통을 지키고 계승 발전시키면서도 이 시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일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Q10. 한국 전통 도자예술이 추구해야할 방향 
다른 나라의 도자기들을 많이 보았지만 우리의 전통 도자기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몇 년 전  스위스 제네바 박물관에서 유럽의 원로도예가 몇 명과 초대전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스위스 작가가 출품 했던 청자는 안료로 색을 낸 것 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작품을 보고 깜짝 놀라며 자기 공방에 초대를 해서 가보니 연구 했던 시편을 보여 주는데 그 양이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그들이 만들었던 청자는 불투명 유약 이였다. 그래서인지 우리청자의 상감이나 투각을 배우고 싶어 하며 부러워했다. 후에 우리 공방까지 찾아와서 견학을 하는 열정을 보면서 새삼 우리의 전통 도자기가 세계인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부터라도 전통 도자기를 더욱 계승 발전시켜서 세계로 향해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 한다. 문화가 그 나라의 선진척도를 알려 준다고 하니 전통도자기를 하는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이지만 우리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합해야 될 때이다. 사람들이 나무에 물과 거름을 주어 키우듯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사람들에게도 거름을 주어 세계로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원경환

홍익대학교 도예유리과 교수

 

Q1. 도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필자가 입학했던 당시의 홍익대학교 응용미술과는 3학년 때 부터 전공을 선택하게 되어있었다. 지금은 모두 학부, 또는 학과로 독립한 디자인, 공예계열의 5개 전공이었다.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그래픽 디자인’을 선호하였고, 나 또한 그렇게 할 생각이었으나 전공을 선택하기 전에 실기실을 돌아보던 중, 도예실기실의 선반에 놓여있던 초벌 된 항아리의 색깔을 보고는 아주 간단히 생각을 바꾸었다. 군 입대전인 1974년이었다.

 

Q2. 자신의 예술관에 영향을 준 인물
스즈키 오사무(鈴木 治 1926-2001). 현대도예의 선구자로 미국을 포함하여 유럽 등 세계 현대도예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작가이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중심이 된 민예운동이 한참이던 근대도예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순수미술로서의 도예를 지향하고자 한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흙으로 가능한, 물레로는 불가능한-” 이라는 그의 말은 흙의 구축이라는 프로세스에 맞추어 가면서 실용성을 배제한 작품의 추구를 말한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군더더기가 없는 간단명료한 포름으로 시점이 정면으로 고정화되어 있다. 아무리 간결한 형태를 채택하고 있다 해도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추상적인 구상이 아니며 보는 이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하는 시적(詩的)인 환기력(喚起力)이 있다.

 

Q.3 자신의 흙작업에 대한 의미부여
현대도예, 즉 오브제를 제작하는 작가들에게는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도예’와 ‘쓰임새를 의식한 도예’의 두 영역을 모두 갖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고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어떤 형태로 이끌어가는 가는 결국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만들고 싶은 것과 만들 것을 생각하는 일 일 것이다. 손에 의한 자유로운 가소성, 불과의 만남이 있기 때문에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Q4. 초기부터 현재까지 작품의 변화
조형성이 강조된 기하학적 형태를 추구하다가 이를 확대한 설치작업을 하였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는 타재료의 사용(주로 철, 나무)과 함께 생점토에 의한 설치작업과 병행하여 흑도번조 작품을 주로 제작하였다. 최근에는 found object의 사용이 많아지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아크릴 칼라를 사용하기도 한다.
점토는 매우 민감한 재료이다. 재료의 특질에 따라 제작해야 하는 만큼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재료(점토)와 수단(소성)에서 오는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한다.

 

Q5. 작품 제작 과정 중 특별한 점
흑도(黑陶)는 토기질로서 회도(灰陶), 홍도(紅陶)등과 같이 원시적인 번조방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흑도 목 긴 항아리」(黑陶長頸壺)는 대전지방에서 출토되었는데 B.C 4~3세기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일반가정에서 보기 힘든 떡시루와 점도제 기와(韓瓦)의 소성방법과 흡사한 것으로 태토 그 자체는 보이지 않으나 그렇다고 태토(胎土)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흑도는, 유약으로 태토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심한 환원번조로 인한 매연(煤煙)으로 태토를 검은색으로 흡착시키면서 흙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교묘한 수단의 번조방법이다.

 

Q6. 도예가의 삶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어느 ‘지명공모전’에 출품한 적이 있다. 지명하는 만큼 출품자가 누구인지 심사 위원들이 모두 아는 형식의 공모전인데 심사에 참가했던 한 분으로부터 나중에 황당한(?) 말을 전해 들었다. 심사위원 중에서도 영향력이 큰 다른 한 분께서 나의 작품들 가리키며 “저 작품은 일본작품이야” 하셨단다. 귀국 후에도 일본에서 개인전 등 전시가 가끔 있었던 편이다. 일본의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일본 작품’을 보여 달라고 한국작가 전시를 만들어 줄까? 태극문양에 학이 날고 구름이 떠다니고 한옥의 처마선이 연상되어야 ‘한국작품’ 일까?

 

Q7. 도예가의 태도, 철학
같은 입체를 다루는 조각의 경우 최대한의 표현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재료의 사용으로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도예는 흙에 얽매일 수 밖에 없다. 흙이라고 하는 전제아래 흙을 어떻게 다루어서 그 표현을 얼마만큼이나 넓힐 수 있는가가 도예가에게 주어진 명제일 것이다.

 

Q8. 한국 대학교육의 문제점
전국에 많은 도예 관련 학과가 있고 학교마다 교육목표가 다른 만큼 본질에 접근하기가 어려운 질문 이라고 생각한다. 지엽적인 문제를 언급한다면, 필자를 포함한 실기관련 교수들의 작품 활동이 미약하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지도 교수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활발한 작품 발표는 실기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또 다른 교육이기도 하다. 교수이기 전에 작가임을 반성한다.

 

Q9. 기술 교육과 예술개념 교육에 대해
교육방침에 따라 어느 한 쪽에 비중을 크게 둘 수 있겠으나 가능하면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흙이 갖고 있는 가능성이 크고 무한한 만큼 학생들이 갖고 있는 가능성도 크고 무한하다. 기본기만 갖춘다면 이후의 것들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Q10. 한국 현대도자예술이 추구해야할 방향
도예를 포함하여 도예라는 장르는 미술계에서 ‘minor art´ 또는 ’소예술‘(小藝術) 로 취급받고 있다. 적자(嫡子)가 아닌 서자(庶子)인 것이다. 이러한 대접을 받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도예는 도예스러워야 한다’는 기존의 도예개념에서 작가들 스스로가 벗어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새로운 도예의 방향을 탐구하는 모색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방향으로 진행하는 자체가 전위적이 자세이다. 따라서 도예의 새로운 가능성 추구의 지평에 있어서는 미술의 다른 장르와 같은 시발점에 서야 할 것이다.

 

 

이하 유상덕, 이복규, 이학수, 임영주, 한길홍 님의 이야기는 월간도예 2011.04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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