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진
단국대학교 강진도예학교 교감
전통과 현대에서 작가로서 균형을 찾는다는 것은 통찰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다. 전통을 이해해야 하며 또 현대도자 뿐만 아니라 세계 미술과 디자인의 흐름도 알아야 하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필자 자신도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작업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전통도자가 현대에도 잘 쓰일 수 있고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현대에 사용되지 않는 전통, 전통을 모르는 현대는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전통에서 길을 찾다
21세기는 융합의 시대라고 한다. 예술 간의 경계가 없어질 뿐 아니라 예술과 산업, 과학이 융합하고 또 다른 나라의 문화와 융합하여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만큼 작가로서의 고민이 많아진다. 그 다양함 속에 무엇이 좋은 길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래서 작가 자신의 세계가 확립되기 전에 다른 문화를 접하게 되면 융합이 아닌 흡수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다민족주의를 기본적인 원리로 삼고 있는 미국에서 조차 모순되게도 점차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다. 아무리 좋은 가치와 이상이라도 자본이 다 삼켜버리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지만 희망은 있다. 그 희망을 전통도자에서 찾을 수 있다.
진실한 도자기로 행복을 나누는 우리
진실이 없는 자리에서 전통 도자는 오래된 지혜이다. 또 기술의 집약체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와 교훈을 들려준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전통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영원히 어린아이와 같은 작업을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우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도자역사를 가지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미술사가이자 전 왕립 빅토리아앤알버트 박물관장 허니W.B.Honey는 “최상급의 한국도자기는 세계 도자기 중에서 가장 우아하고 진실하며 도자기가 가지는 모든 장점을 구비하고 있으니, 그것은 행복한 민족의 유산임을 첫눈에 말해주고 있다”라고 격찬한다. 우리 도자기는 쓰임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쓸데없는 장식은 안한다. 그래서 진실하다. ‘진실’은 작가로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기에 때때로 ‘진실’과 반대된 ‘허영’을 품게 된다. 그래서 숨기고 싶어 하지만 숨길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작업하자. 진실은 전통도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자연과 함께하는 디자인
21세기의 지구는 인간의 욕심으로 병들어 가고 있다. 이상기후가 나타나고 없던 병들이 생겨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자연의 치유가 필요한 시대이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살수 없다는 것은 진리다. 오늘날 각 분야에서 자연과 환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미술이나 디자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근래 미술계에서는 팝 아트, 에코 디자인, 미니멀리즘, 빈티지 등이 유행하였다. 하지만 동떨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원형을 고집해 온 핀란드 디자인은 세계에서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다. 겨울이 길고 추운 기후의 악조건은 오히려 핀란드만의 고유문화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주로 실내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도자기와 가구 등 실내에서 자주 쓰는 제품디자인이 발달했으며, 보다 편리하고 기능적이면서 아름답고, 질리지 않고 오랫동안 만족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본질적인 욕구가 오늘날 핀란드 디자인만의 힘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 그들은 하늘이 내려 준 자연의 조화를 인간의 손으로 훼손하는 것을 지양한다. 헬싱키에 위치한 템펠리아우키오 교회는 바위산 위에 지어졌다. 바위를 최대한 보호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어져 일명 암석교회라고 불린다. 핀란드인들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국토가 공사판이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나라를 볼 때 안타깝고 부럽기만 한 남의 나라이야기 같지만 우리나라의 소쇄원,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본연의 심성이다. 그리고 편리하고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도자기가 우리 전통도자였다. 다만 핀란드는 전통을 이었고 우리는 그러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가 다시 시작한다면 세계가 주목할 것이다.
보석같은 우리의 흙으로부터
21세기는 자원 전쟁의 시대라고 할 만큼 자원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석유 한방울 나오질 않는 나라여서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고 학교와 가정에서 교육하고 정부에선 계몽한다. 아껴 쓰라는 교육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부정적인 의식을 심어준다. 절약보다는 중용을 가르치는 교육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도자의 원료는 풍부한 나라이다. 우리 강산이 이야기 한다. “아끼지 말고 맘껏 써 달라고...” 우리 강산에 좋은 흙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흙을 채취하고 수비하고 토련하는 것은 혼자서는 힘든 일이다. 다행히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강진에 장비들이 구축되고 있어 많은 도예인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것이다.
우리는 오래된 도자역사를 가지고 있다. 강진은 특히 그렇다. 그래서 많은 외국의 도예가들이 다녀간다. 그중 미국에서 도예과 교수, 작가, 지질학자들이 다녀갔다. 이곳의 가마터와 점토, 장석 등의 도자원료를 보여 주었고 그들은 미국에서도 자신만의 흙으로 작업을 하는 작가가 없다고 하며 흙을 캐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명함을 자랑스럽게 내게 주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곧 연락이 왔다. 자신의 학생들을 보내도 되겠느냐고 한다. 한국의 전통도자를 배우러 세계가 오기 시작한다. 우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전통과 도자원료를 가지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하다.
나만의 보물창고
무림 영화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단시간에 노하우를 전수하고 제자는 천하의 고수가 되어 복수를 한다. 바보같고 재주없는 제자지만 막혔던 혈이 뚫리자마자 당할 자 없는 압도적인 고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 비법이 있다. 그 비법은 전통이라는 보물창고 안에 있다. 하지만 그 보물창고를 남의 것이라 여길 만큼 우리는 무관심했다. 전통은 다른 민족이 가질 수 없는 우리의 유산이다. 유산을 물려받은 줄 모른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또한 물려받기만 하고 키우지 못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다. 필자는 그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조금 물려받았다. 언제든지 열어 볼 수 있는 나만의 보물창고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지 원한다면 같이 쓸 수 있다. 나만의 보물창고에서 우리의 보물창고로 만들고 싶다. 그만큼 우리의 전통은 넉넉하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3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