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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7월호 | 특집 ]

한국 도예전공 대학교수의 정체성
  • 편집부
  • 등록 2010-08-10 16:3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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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가 요구하는 대학교수의 존재
  • 시대가 요구하는 대학교수의 존재

| 노경조 국민대학교 도자공예학과 교수

한국의 도자기가 세계인에게 청자, 백자로 각인되어 있는 시각에서, 한국에서 도자를 했다는 것은 행운이며 축복이다. 나는 대학교육자로서의 역할 이전에 한국의 도예가로서, 또한 개인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스스로의 미관을 세우고 작품을 제작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끼친 나의 영향은 배출된 졸업생들의 가치관과 그들의 역량에서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한국미의 원류를 바탕으로 하는 도자조형에 기반을 둔 교육을 해왔으며, 이 철학적 바탕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사회적 사명감과 더불어 그들의 작품활동에 있어서 원동력이 되어 줄 수 있었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글을 쓰면서 도예전공 교수로서의 정체성을 굳이 구체적인 주석을 달아가며 도자론이나 예술가적인 접근으로 나의 견해를 밝히기 보다는 ‘자기고백적인 글‘이라는 부분에 충실해 보고자 한다. 미술을 시작하게 된 나의 어린 시절부터, 공예의 길을 걷기 시작한 대학시절,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최순우 관장님과의 조우遭遇, 그리고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조선도자 가마터가 즐비한 남종면 이석리에 정착했던 시절, 미국 버밍엄 박물관 초대전시, 도자 교육자로서 나의 역할 및 철학, 그리고 예술가로서 자기 정체성의 중요성을 인지하도록 하는 교육의 중요성을 말해 보고자 한다.
일제시대 나의 할머니께서는 우에노 음악학원(현,동경예술대학)에서 피아노전공으로 수석졸업 하셨고, 나에게 피아노 공부를 무척 독려하셨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피아노 건반의 한 옥타브를 한 번에 짚을 수 있을 만큼 큰 손을 가진 나는 할머니의 관심을 사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나 보다. 그렇지만, 우연한 기회에 집 근처의 화실을 다니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미술에 입문하게 되었고, 이후 대학생활의 상당부분을 회화 공부에 할애를 하였다. 대학원 시절에는 유희영 교수님(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께 그림을 자주 보여 드렸던 기억이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화원인 해강 김규진의 아들이자 동양미술사 저자이신 김영기 화백으로부터 논문지도를 받으면서 동양화 공부에도 심취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도자공예 쪽으로 보다 더 큰 관심을 두기시작 한데에는 여러 가지 영향들이 있었겠지만, 그중에서도 “아름다움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도록 생활 속에서 생산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당시 내가 공예적인 아름다움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의 대학시절인 60년대 말~70년대 초, 우리경제는 도약을 맞는 시기가 되었고, 서구적인 새로운 생활 패턴에 맞는 도자공예품이 또한 요구되었다. 이로써 도자는 급증하는 수요시장을 갖게 되고 공예시장의 양적팽창을 가져왔다. 이것은 우리생활에 맞는 도예문화를 찾아가려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도예가 수의 증가와 함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향한 고무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지표가 미흡한 상태에서 서구의 일변도를 따라가려는 경향은 우리의 올바른 전통을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낳았다. 이러한 문제를 풀기위한 노력으로 대학들의 역할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였다. 일시적인 상업적 성장으로 말미암은 왜곡된 현상을 바로 잡고, 예술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옛것에 대한 고루한 답습처럼 보여졌던 우리도자가 서구문화의 일방적인 유입 속에서 전통의 단절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점은 우리 근현대 도자사에서 매우 슬픈 일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한국 도예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고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찾아보기위한 나의 노력과 열망은 어떤 사명감과도 같이 다가왔다. 이러한 노력들 중, 나는 두 번의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고 이 경험들은 아직도 내 작업과 교직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 하나는 1977~79년 일본 가나자와 미술공예대학에서 수학을 하고 한국으로 들어온 후, 1980년부터 2,000년까지 우리도자의 원류를 찾기 위해 조선관요 분원의 터가 있었던 남종면, 이석리 작업실에서 조선도자 파편과 20여 년 간의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 기간은 위축되고 왜곡되어 비쳐졌던 우리 도자문화가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로 다시 서기위한 방편들을 모색해 보았던 시간이었다. 70년대 후반, 일본사람들이 갖고 있던 한국도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내가 직접 체험을 하고서 우리의 도자역사를 근본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일어났다. 도자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우리도자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한 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의 문화적 원류가 한국이라는 것에 대한 관심과 한국 도자기에 대한 선망은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도자기에 대한 그들의 큰 애정은 아직도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은 한국도자에 대한 순수한 동경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차 문화 생활에서 배어나오는 다도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할지라도, 한국도자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자료, 보고서, 그리고 많은 수의 학자들과 연구는 일본사람들의 도예문화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1978년 오사카 동양도자 박물관의 아타카安宅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청자, 분청사기 그리고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으로 그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功德, 1891~1931는 일제시대 조선에 건너와 조선 도자기와 목공예품 등 민예품 속에서, 조선민족문화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일본에 소개했던 인물이다. 다쿠미는 조선의 가마터를 찾아다니며 복원을 호소하기도 하였는데 사후에 유고로 펴낸 책자가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이다. 그는 40세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본인의 뜻에 따라 한국 땅에 안장되었다. 한국의 도자기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이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나에게 시사한 바가 컸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0.07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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