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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5월호 | 뉴스단신 ]

방창현의 세계도자기행(2)
  • 편집부
  • 등록 2010-06-11 11:46:23
  • 수정 2010-07-05 17: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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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창현의 세계도자기행(2)

Pop Art, 내 안의 낯선 타자他者를 만나다 : 타카쉬 히노다Takashi Hinoda

본 연재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the sublime, 몸body, 미니멀리즘minimalism, 물성materiality, 서사narrative, 개념미술conceptual art, 팝아트pop art를 중심으로 본 현대도예에 관한 글이다.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기행문적 수필의 형식을 빌어 독자들이 현대 도예 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 졌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오랜 동면의 시기를 지나 이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위한 용트림을 하는 이 시기에 한국 현대도예의 미래의 비젼과 현재의 성찰을 제시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여행하면서 나는 줄곧 여행의 목적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여행을 즐기면서 글을 쓴다는 처음의 순수한 의도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단계에 오게 된 것이다. 많은 인위성과 결과에 대한 집착, 그리고 내 안에 은밀히 움트는 정치적 요소들은 나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삶의 진정성을 화두로 시작한 나의 도자 기행은 시작부터 벽에 부딪혔다. 나의 욕망을 알뜰히 파악하지 못하고 시작한 여행은 내 안의 낯선 타자他者와의 조우遭遇에 흠짓 당황하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지식을 축적하고 글을 쓰는 욕망이 타인과의 계급적 차이를 만들어 내고, 그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의지라는 미셜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 푸아티에 출생. 후기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이다의 말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여행을 목적을 가다듬는 동안 뉴욕 SOFAThe International Expositions of Sculpture Objects and Functional Art에서 일본작가 타카쉬 히노다Takashi Hinoda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타카쉬 히노다Takashi Hinoda는 쉬게키 하야쉬Shigeki Hayashi와 함께 일본의 현대도예를 이끄는 대표적인 도예가이다. 일본의 현대도예를 이끄는 이들 신세대 작가들이 팝아트에 큰 영향을 받고,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겸비해서 세계도예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일본의 팝아트는 매우 독특해서 물신주의를 표방한 미국의 팝아트와 정치적이고 체제비판적인 중국의 팝아트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일본의 팝아티스트들은 망가Manga라고 불리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에도 시대부터 시장 경제를 발판삼아 대중 취향의 문화의 시작을 마련한 팝아트적 성향의 우키요에浮世繪, 부세회, Ukiyo-e, 14-19세기에 일본 서민들이 좋아하던 목판의 풍속화 같은 지극히 일본색이 짙은 전통과 문화에 영감을 받아 작품에 반영한다. 그들은 권위적 무거움을 거부하고 질풍노도疾風怒濤, Sturm und Drang의 젊은 층의 기질을 대변해서 그런지 우울하고, 반항적이고, 또한 고독하다.    
팝아트는 오랜 수련기간을 두고 연습과 훈련을 통해 유일성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소위 고급예술의 영역에 반기를 들고, 대량생산된 키치적Kitsch 성향의 차가운 물건을 예술로 인정받은 대중 미술의 아이콘이다. 팝아트 예술가 리차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이 언급한 것처럼 팝아트는 몰개성적 반복성과 익명성, 그리고 싸구려 문화들이 풍기는 속물성을 표현하면서 엄숙한 엘리트 예술을 지양止揚했다. 팝아트는 모더니즘의 엘리트주의에서 생성된 계급간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예술의 본질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자유에 두었다. 소수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향유될 수 있었던 예술은 고고한 미술관에서 나와 민중 속으로 깊이 침투하게 된 것이다. 팝아트 조각가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는 “그렇게도 오랫동안 황금 토굴 속의 유리관 안에서 잠들어 있던 그림이 마침내 바깥으로 나와 수영을 가자고 권유받고, 담배와 맥주를 맛보며,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떠밀려서 넘어지고, 웃는 법을 배우며, 온갖 종류의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라는 말로 위선적이고 권위적인 엘리트 미술에 대한 대중미술의 승리를 자축하게 된다.             
타카쉬 히노다Takashi Hinoda는 세계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낼 수 없는 대중매체와 같은 너무나 많은 알레고리Allegory의 홍수 속에 놓여진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와 대량생산소비에 관한 우리들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무겁고, 전통적인 재료인 도자기와 현대적인 애니메이션은 언뜻 보기에 어울리지 않지만, 타카쉬 히노다Takashi Hinoda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유머러스하고,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그들의 실존에 관한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인간의 몸에서 변종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를 가진 몸 위에 그려진 망가Manga들은 작가가 호흡하고 살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
타카쉬 히노다Takashi Hinoda는 주체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세상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광활해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동시대의 많은 매체媒體, media와 이즘ism들은 세상을 인식하는 도구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감각을 매체로 하는 인간의 몸만이 세상의 울림과 그 소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몸의 형태는 인간의 형상에서 변태되어 나와 원추모양에서부터 막대의 형상을 하고 있는 다양한 유기체들이다. 이 유기체들의 형태는 세상과의 관계망 속에서 배양되어 길러진 생물학적 존재성을 지니고 있다.         
타카쉬 히노다Takashi Hinoda는 전후 일본 현대도예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의 소데이샤Sodeisya 그룹에 영향을 받았지만, 곧 색과 형태에 있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적 문법을 구축하게 된다. 흙의 물성과 유약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한계성을 극복하고, 현대성을 과감히 수용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세계 현대 도예의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도예가로서 도자의 흔적을 철저히 배제시킨 오이디푸스적Oedipus 행위는 지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전통, 권위, 남성, 백인, 이성애자를 해체시킨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프랑스 철학자, 알제리 출생에서 시작된 ‘탈중심화Decentred’와 비견될 수 있는 의미있는 시도였다.
그는 “나의 작업은 항상 3차원의 도자형태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작가의 손이 지나간 흔적이나, 흙 그 자체의 물리적인 느낌을 제거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진심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형태가 아니라 언어이며, 리듬이나 흔적이며, 존재감이다”라고 했다. 급변하는 사회의 환경과 호흡하는 예술가들의 인지능력은 지성과 감각에 의존한다. 지성은 언어적, 논리적, 분석적 성향이 강하지만, 감각은 즉흥적, 무의식적, 초자연적이다. 타카쉬 히노다Takashi Hinoda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언어와 리듬, 존재감은 그의 탁월한 지성과 감각의 소산이다. 
갤러리를 나서며 나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이 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구조화되어가는 내 안의 욕망권력의지을 바라보며 팝아트를 다시 생각해본다. 팝아트가 진정성을 지닌 대중의 민주적인 예술인가를. 모더니즘의 권위와 권력들을 스스럼없이 무너뜨렸던 가장 대중에게 친근한 예술이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부유한 수집가나 현대식 미술관을 위한 가장 권위있는 예술의 상징자본으로 탈바꿈되었다는 사실은 팝아트의 모순을 여실히 드러낸다. “팝아트 작가들이 대중을 팔아 인기있는 부자가 됐다”라고 비판한 미술 비평가들의 말은 차치하더라도, 최근 팝아트의 인기는 상업적인 화랑들의 팝아트의 본질을 벗어난 돈벌이용 도구로 전락한 면을 간과할 수 없다.  
모더니즘이라는 아버지의 권위와 위선에 도전하던 팝아트, 아버지가 물려준 권력을 향한 편집적 욕망을 지닌 ‘타자他者’라는 현상학적 유전자는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가장한 대중예술로 다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독재를 꿈꾸게 했는지 모른다. 도대체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혹은 대중의 예술이란 것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인류에 심어주었던 가장 큰 신화였던 ‘대중을 위한 계급없는 사회’의 구현은 예술에서도 그 구조적 모순을 들어낸다. 그래서 팝아트는 씁쓸하고, 모순되고, 때론 섬뜩하다. 내 안의 낯선 타자他者를 다시 조우하는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저 먼 초원을 달리는 유목민들의 말발굽 소리가 이명耳鳴처럼 들려온다. 내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대륙을 달리는 타자他者들, 잡힐 듯 다시 사라지는 그들의 존재감은 인간이라는 슬픈 종족이 함께 지녀야 할 숙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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