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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2월호 | 특집 ]

2009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_김주원
  • 편집부
  • 등록 2010-04-07 15:09:57
  • 수정 2010-04-07 15: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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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공예를 위하여 : 2009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 김주원 2009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수석큐레이터

 

‘2009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설정한 출발선
잘 알다시피, 오늘날의 전시는 시대를 해석하고 담론을 생산하며 미래의 비전을 공유하고자 제안한다. 세계화와 자본의 힘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국제’ ‘비엔날레’라면 이러한 기본적인 전시가 지녀야 할 성격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함은 자명하다. 이는 ‘국제성/보편성’과 ‘지역성’이라는 두 가지 국면을 주목해야 하는 시대적 혹은 현실적 아이러니를 지니고 있는 비엔날레의 태생적 한계 때문일까.
1999년 창설되어 올해로 6회를 맞은 2009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2009. 9. 23-11. 1, 청주시 예술의 전당 일대, 이하 ‘2009청주비엔날레’가 40일간의 일정을 마감했다. 예술감독 이인범(상명대 교수)은 2009청주비엔날레를 통해, 세계 각 지역의 공예를 주목하면서도 현대 공예의 동시대적 성격을 드러내고 그것이 반영하는 현실의 역사적 의의를 이슈로서 다루고자 했다. 나아가 예술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공유하고자 했다. 이것이 세계 여타 국제 비엔날레들과 다를 바 없는 기본적인 문제설정임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예컨대, 1955년 독일 카셀에서 조직되어 이후 4-5년마다 열리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전시회인 <도큐멘타 5 Documenta 5>(1972) 이후 유럽 개념미술의 국제적인 위용을 확인하게 하였고 이를 제도 비판적인 전략의 기본 모델로 받아들이면서 미술매체의 위기 타개만이 아니라 사회 내에서의 예술의 역할과 미래 비전 공유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하지 않았던가. 

‘경계’ 그리고 ‘사이’
현대미술의 기수 마르쉘 뒤샹은 1912년 레제와 브랑쿠지와 함께 항공전시회를 관람하면서 “미술은 이제 끝났어. 누가 저 프로펠러보다 더 잘 만들 수 있겠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미술과 산업, 미술과 무엇을 만든다는 행위 간에는 절대적으로 비관계성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비미술’의 문맥없이 ‘미술’의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어쩌면 그것은 ‘비공예’의 맥락 없이 ‘공예’의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이번 2009청주비엔날레를 가르켜 혹자는 “공예의 정체성에 관해 묻는” 전시라고 하기도 하고 “공예와 디자인의 경계가 모호한” 전시, 또는 “순수미술가가 너무 많이 참여한” 전시, “설치미술이 많은” 전시라고도 한다. 조금은 다른 얘기 같긴 하지만 “지역(작가)을 무시한 전시”라고도 한다.
이러한 평가는 ‘만남을 찾아서’ 라는 주제 아래 기획된 3개의 본전시, 즉 <인공의 지평Pressing matter>, <오브제, 그 이후Dissolving views>, <프로젝트, 생활세계 속으로The river whitin us, the sea all around us> 등이 보여주는 국내의 공예인들 관점에서의 탈공예적, 탈제도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본전시 1 <인공의 지평>에서는 각 장르별 운영위원들의 추천작가와 2007년 국제공모전 수상작가, 더불어 비엔날레 10년을 경험한 청주시민들의 애장품 등을 전시하여 청주비엔날레의 현재의 위상과 권위의 내부를 조명한 ‘공예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들’이라는 섹션을 마련하였다. 또한 본전시 2 <오브제, 그 이후>전은 물신숭배 혹은 신성의 대상으로서의 ‘공예’, ‘오브제’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작업들을 대거 주목했다. 그러다보니 부정어법을 통해 반反 공예성 혹은 ‘공예’ 외부에 산재된 삶의 진실과 대면하는 작업들이 자연스럽게 중심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혹자들의 평가에는 어떤 기준이 작동하는 걸까? 내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공예’는 이렇다는 용어 풀이, 개념 설정이 아닌가 싶다. 2007년 탤런트 안재환, 정선희가 하던 홍보대사를 디자이너 이상봉, 시인 도종환이 해야하는 2009청주공예비엔날레에서의 ‘공예’는 여전히 ‘조화의 손’(1999), ‘자연의 숨결’(2001)이며, ‘쓰임’(2003)이자 ‘유혹’(2005), ‘창조적 진화’(2007)이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지난 역사 속에서 미술, 아니 구체적으로 회화, 조각의 진화 방식을 보면, 회화는 회화 아닌 것의, 조각은 조각 아닌 것의 반대항으로 가득찬 조건을 끌어안는 순수 부정적인 형식으로 변모해 왔다. 사진기 발명 후의 추상회화의 발달이나 이브 클라인의 신체를 붓으로 한 회화, 해프닝이 그러했다. 뒤샹의 레디 메이드된 변기가 <샘>이된 국면과 도날드 저드의 정직한 큐브가 가구이자 조각인 자체가 그러했다. 단언컨대, 공예가 순수미술, 설치미술 혹은 디자인과 구분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표면적 현실, 그 서구적 양상을 디스플레이 하고자 기획된 비엔날레 전시는 무의미하다. 서구가 그러하니 세계화에 발맞춰야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현대적 삶의 매체는 그것이 공예이건, 회화, 조각, 테크놀로지이건 어떤 고정된 실체나 영역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사회적 관계항이어야 한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09년 8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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