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연리문 작가
마쯔이코세松井康成
| 서국진 도예가
마쯔이코세松井康成는 1927년 나가노현에서 염색 일을 하는 아버지와 기모노를 만드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가노의 풍부한 자연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가나가와현 히라쯔카공업고등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 아버지의 고향인 카사마에서 게쯔쇼지月崇寺월숭사 경내에 있는 오꾸다제도소奧田製陶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이때 우에다류上田勇선생에게 물레를 배웠다. 대학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문학부를 졸업하였는데 대학 재학시절에는 연극과 영화에 흥미를 보이며 각본을 쓰고 싶어 하는가 하면 고 도자에 대한 관심으로 동경국립박물관에도 자주 들렀고 특히 송 시대 자주요의 교태도絞胎陶에 감명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1957년(30세) 게쯔쇼지의 주지인 마쯔이에꼬松井英功의 장녀 히데꼬秀子와 결혼하고 게쯔쇼지의 주지가 되어 3년 후 여기에서 본격적인 도예를 시작하였다.
초기의 마쯔이코세의 작품은 카사마의 산업도자의 영향으로 기제또黃滓戶, 시노志野, 채유彩釉, 철화鐵畵 등 다분히 장식적인 고 도자풍이었다.
당시 일본의 연리문은 도꼬나메常滑, 반고万古, 단바丹波, 시가라끼信樂 등지에서 양산되었는데 중국 당·송시대의 교태絞胎, 한국 고려시대의 연리練理, 일본 에도江戶, 강호. 임진왜란 이후의 일본 정권 시대의 시노志野에서 나타난 연리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근대의 도예가 중에는 교토에 연리문 작업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메이지明治시대의 청자의 명인으로 알려진 스와소잔諏訪蘇山, 추방소산은 연리문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었다.
마쯔이코세의 초기의 연리문 작업(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은 금속산화물인 산화철, 산화코발트, 산화망간을 발색제로하고 사질이 있는 백점토에 이들 산화물을 첨가한 색소지를 활용한 작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사진2)
그러나 물레성형에 의한 마쯔이코세의 독창적인 연리문의 세계가 펼쳐진 것은 1976년 그의 나이 49세 부터였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서 쇼레쯔몽嘯裂紋, 소열문이라 불리우는 기법이 등장하는데 이는 가소성이 적은 색소지로 판을 만들고 원통에 둘러서 기본형을 만든 다음 형틀이었던 원통을 빼내어 물레성형을 하는 기법으로 물레를 천천히 돌리면서 배를 불려주면 가소성이 적은 소지가 트거나 균열이 생기는 것을 이용하는 기법이다.(사진3) 그리고 1980년(53세)에는 어두운 코발트와 갈색 톤이 주를 이루던 그의 작업에 붉은 색이 도입되기 시작하는데 1981년(54세)이 되면서는 붉은 색이 더욱 선명해진다. 이러한 작업을 아까네데, 천수라 한다.
이때의 작품은 장작과 등유를 병용한 가마를 사용하여 요변이 생긴 것도 있지만 정작 마쯔이코세는 연리문에서 의도하지 않은 요변의 효과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는 완벽하게 의도한 색상만을 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물레성형 전 색소지 판을 만들 때 맨 아래의 것은 가소성이 좋은 소지를, 위에는 가소성이 적은 소지를 이중 또는 삼중으로 붙여서 물레성형을 하는데 가소성이 적은 소지가 트거나 벌어지면서 벌어진 틈 사이로 아래층 표면이나 연리문양이 보인다. 이것이 이중구조일 경우 니까이쇼레쯔重層象裂, 중층상열(사진4), 삼중구조일 때는 상까이쇼레쯔三層象裂, 삼층상열(사진5)라 한다.
참고로 ‘嘯裂’(쇼레쯔, 소열)의 ‘嘯’(쇼)와 ‘象裂’(쇼레쯔, 상열)의 ‘象’(쇼)는 일본발음으로 ‘쇼’()라고 동음으로 발음한다..........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