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서해안은 보물창고
+ 서해 해저에서 발굴된 도자기 _ 김영원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
+ 해상실크로드와 동북아시아 해로 _ 곽유석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연구과장 +
+ 해저유물 발굴 현장 들여다보기 _ 자료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정리 : 본지 편집부 +
서해안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잇달아 고려청자가 발견돼 새로운 보물 창고로 관심이 쏠리고 있다. 1976년 처음 발견돼 1984년까지 8년간 10차에 걸쳐 발굴 작업된 전남 신안 방축리 해저의 총 22,007점의 유물을 실은 난파선을 비롯해 1983년 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해저의 녹청자 3만여점, 1995년 전남 무안 도리포 해저의 상감청자 639점, 2002년 전북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해저유물 총 3천여점, 군산 야미도 해저의 토기·고려청자·조선백자 70여점, 올해 충남 태안 해역에서 발견된 난파선과 수 천점의 고려청자까지 엄청난 양의 보물들이 발견돼 서해안은 그야말로 보물창고다. 이번 호에서는 서해 해저유물 발굴 현황과 의미, 동아시아 해상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집어보고자 한다. 또한 해저유물의 발굴 현장의 이미지를 통해 유물발굴과정을 소개한다.
서해 해저에서 발굴된 도자기
글+사진 김영원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한반도 서해안은 고대로부터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사이의 무역품을 선적한 배가 오가고 국내에서도 지역 간에 물품을 운반하는 뱃길이었다. 하지만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으로 인해 무역선이 침몰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목포 앞 신안 해저에서 발굴되어 흔히 ‘신안 도자기’라고 부르는 수 만점의 중국 도자기이다. 국내에서도 가마터에서 소비지로 운반할 때 육로보다는 해로가 더욱 활용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에 질 좋은 청자, 백자를 대량 생산한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서 수요자에게 운반할 때도 서해안을 지났다. 이를 증명하듯 서해안 해저에서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서해안을 통해 운반된 무역 도자기의 실체도 확연히 드러났다. 무역 도자기의 종류와 품질 등을 보면 수요자들이 어떤 도자기를 선호했는지 그들의 취향과 당시의 유행이나 생활 습관 등도 파악된다.
서해 해저에서는 한국의 고려 청자와 중국 송·원대 도자기의 발굴 사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각 도에 속한 해역 별로 해저에서 발굴된 도자기를 소개하며 그 의의를 짚어 나가기로 한다.
충청도 해저의 도자기
우선 보령 태안반도 해저 발굴을 들 수 있다. 이곳에서는 1983년경부터 불법 인양된 고려청자들이 알려졌으므로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그 앞바다의 죽도·마도·신진도 등 섬 주변 해역을 조사하여 1987년 사적 321호로 지정하였다. 이 조사에서 주로 고려 후기 청자와 조선 초 백자가 발굴되었는데 9·10세기 경초기 청자의 전형적인 특징인 해무리굽 완을 비롯하여 상감청자, 화형접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발굴된 도자기의 연대는 9세기 말에서 14세기에 속하는 것들로서 100여 점에 이른다.
상감청자는 30여 점으로 「기사己巳」명 등의 간지干支명 대접도 있다. 간지명 청자대접은 주로 전남 강진에서 제작되었으며 「기사」년은 1269년 혹은 1329년이다. 청자투각초화문받침도 발굴되었는데 투각, 인각, 음각 등 다양한 기법으로 문양이 장식되고 다리에는 풍혈이 장식되어 매우 화려하다.[사진 1] 최근에도 다량의 청자가 발굴되어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 외에도 보령 황죽도 해저에서 백자 소호가 인양되었다. 이 백자는 도기질로 단단하지 않고 표면에 균열과 빙렬이 있으며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전라도 해저의 도자기
전라도 해역은 중국한국, 중국일본으로 이어지는 항해가 활발했던 곳이다. 그래서 오늘날 해저 여러 곳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중 하나가 전북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해저이다. 이곳에서는 2002년 8월부터 11월까지 3차에 걸쳐 총 3,019점의 유물이 발굴되었고 2003년 4, 5월에도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제4차 조사를 실시하였다. 선박과 관련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세련된 청자가 발굴되었다.
발굴품은 「청자음각앵무문대접」 「청자양인각모란문접시」 「청자양각연판문통형잔」 「청자상감국화문잔」 「청자상감모란문합 등 각 시기를 대표하는 순청자와 상감청자가 대부분이다. 청자양인각모란문접시는 틀로 찍어 문양과 형태를 나타내어 내면 전체에 양인각 모란문이 장식되었는데 11세기를 대표하는 세련된 양식을 보인다.
발굴된 청자 중에는 유약의 광택이 좋고 음양각 문양이 아름다워 갓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있다. 이는 10세기 경에서 13세기 초에 전남 강진이나 전북 부안에서 제작된 최고 수준의 청자이다.
군산 야미도 해저에서도 토기와 고려 청자에서 조선 백자에 이르기까지 70점 가량의 다양한 유물이 2002년 4월에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서양제 도기병이다.[사진 2] 서양에서 동아시아로 무역하던 선박에서 사용하던 병으로 동체 한 면에는 원형 마크가 있다. 그 원형 마크 안에 ‘SELTIRS’, 아래로는 ‘THUM NASSAU’라고 찍혀 있다.[사진 3]
무안 도리포 해저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청자가 발굴되었다. 1995, 1996년 실시된 해저 발굴에서 총 639점의 상감청자가 인양되었다. 청자는 주로 대접, 접시, 탁잔 등으로 봉황당초문, 운봉문, 포류수금문, 연당초문, 연화문, 연판문, 국화문 등이 상감 또는 인화 기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사진 4] 전성기의 비색 청자는 아니지만 전형적인 여말선초의 쇠퇴 양식을 보이므로 전남 강진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선박과 함께 3만여 점의 유물이 발굴된 곳은 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해저이다. 1983년 12월, 1984년 3월부터 5월까지 실시된 발굴에서 선박과 선원 생활용품 및 청자 등이 인양되었다. 선박은 10톤 정도의 무게로 고려의 선박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해저에서 인양된 청자는 고려 왕실과 개경의 귀족이 사용한 고급 청자와는 다른 조잡한데 소위 ‘녹청자’이다. 그릇의 종류는 매병, 반구병, 유병, 소병, 대접, 완, 각종 접시, 장구 등 다양하다. 특히 청자철회초문장구는 희귀한 예이며 흑유도 인양되었다.
녹청자 계열의 완도 해저 출토 청자는 해남 진산리 가마에서 제작하여 완도 해역을 거쳐 주변 지역에 운반,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토제 시루, 나무 함지와 망치, 청동 완과 숟가락과 국자 등 60여 점의 생활용기도 흥미롭다.
세계인들의 눈길을 모은 유물은 신안 방축리 해저에서 인양된 대규모 도자기 무역선 ‘신안선’에서 나온 다량의 중국 도자기이다. 발굴 작업은 1976년 10월부터 1984년 9월까지 10차에 걸쳤고, 국가사적 274호로 지정되었다. 이 발굴에서는 침몰한 선박의 실체 뿐 아니라 중국 자기와 고려 자기 및 일본 자기 및 여러 물품 등 총 22,007점의 유물이 세상에 드러났다.
신안선은 중국에서 물품을 선적하여 일본을 향해 가던 중 한국 해역에서 침몰한 것인데, 중국 도자기가 만 여점 이상이다. 중국 자기는 소량의 송대 자기도 있으나 대부분은 원대 자기로 송, 원 자기를 대표하는 용천요, 관요, 정요, 경덕진요, 균요 등의 청자, 청백자, 추부백자樞府白磁, 투박한 무역백자, 흑유, 백탁유白濁釉, 옹기 등이 인양되었다. 이 가운데에는 전 세계에 한 점 밖에 없는 「청백자진사채시명靑白磁辰砂彩詩銘전접시」가 있어 그 소중함은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다. 중국 청백자는 기벽이 종이 같이 매우 얇고 반투광성이므로 매우 섬세한 느낌을 준다. 원대에 유행한 갈색의 반점 철반문鐵斑文이 장식된 청백자와 청자도 여러 점 인양되었다. 이들 철반문 청자와 청백자는 물소를 타고 있는 동자, 여인상 촛대, 보살, 대접, 접시 등 형태가 다양하다.[사진 5] 그러나 대부분의 신안 도자기는 해외 수출용으로 만든 백자이므로 제작수법이 다소 거칠고 전체적으로 투박한 양식을 보인다.
신안선에는 특별히 고려청자 7점이 선적되어 있었다.[사진 6] 매병 2점, 운학문완, 잔탁, 베개, 뚜껑, 사자 등인데 고려 청자는 당시 중국에서도 고급품이었으므로 고가의 골동품으로 취급되었던 것 같다. 목적지가 일본이었으므로 한국 자기를 애호하는 일본인이 구입한 것이 분명하다. 가마쿠라시대(11921333)의 일본 세또瀨戶 도기도 2점 발견되었다. 또 원의 동전인 지대연간至大通寶, 13081312, 「지치삼년至治三年」명(1323) 목패 등으로 미루어 신안 해저 유물의 연대는 1308년과 1323년 전후 시기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신안 무진리 해저에서 조선 초 15세기 전반기의 백자항아리가 영광군 낙월면 소각시도 해저에서 청자방형연적이 발견되었다. 이 청자연적의 네 면에는 팔괘八卦가 각각 양각으로 표현되었고, 상면에는 동물이 웅크리고 앉아있다. 바닥의 음각 명문은 「용마부도龍馬負圖」라고 판독된다. 중국 원의 절강성 용천 청자 양식이다. 해남 송지면 어란리 해저에서는 커다란 청대의 녹유항아리가 인양되었다. 이 항아리의 앞뒤면에 ‘남주점南酒店’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주점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 밖에 제주 지역에서는 신안 해저에서 인양된 중국 원의 토기를 비롯하여 조잡한 무역자기와 흑갈유 및 귀 달린 병이 흔히 출토되었다. 이는 제주가 중국한국(서해신안제주)일본 구주로 이어지는 항로의 한 지점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맺음말
한국 서해안 해저에서는 한국 자기 뿐 아니라 중국 자기도 다량 발굴되었다. 한국 자기는 주로 고려 청자이고, 중국 자기는 신안 해저 유물과 같은 송, 원대 자기가 대부분이다. 강진이나 부안 등 세련된 고려 청자의 생산지는 수도 개경의 왕실과 중앙 귀족이 거주하는 소비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싣고 서해안을 항해하는 무역선이 빈번했다. 따라서 예기치 않은 기후 변화로 인해 침몰된 자기의 양도 엄청나므로 최근까지도 서해 해저에서는 수많은 고려 청자가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 가까이 왕실과 중앙관청에 자기를 공급하기 위해 분원 관요가 운영되고 있었다. 또한 전국적으로 곳곳에 가마가 들어섰기 때문에 국내에서 지역간의 자기의 이동은 줄어들었다. 다시 말하면, 각 지역 내에서 자기의 생산과 소비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 자기는 두 가지 경로로 한국에 유입되었다. 하나는 한중 왕실 간에 이루어진 조공무역[관무역], 다른 하나는 일반인들이 행한 사무역[민간무역 혹은 밀무역]이다. 신안 해저 유물의 경우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으로 매매된 물품들이다.
결론적으로 서해 해저에서 발굴된 풍부한 도자기를 통해 중국한국, 서남해안신안제주, 해역일본으로 이어지는 운반 경로가 확연히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서해와 남해로 이어지는 해역은 동아시아 무역의 활발한 중심 항로였던 것이다.
해저유물 발굴 현장 들여다보기
자료협조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정리 본지편집부
해상실크로드
바닷길은 육지길 못지않게 인류문명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해왔다. 중세에는 유럽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범세계적인 해상로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길을 우리는 육지의 실크로드Silk Road*에 견주어 ‘해상실크로드’라 부른다.
해상실크로드는 지중해에서 홍해를 거쳐 아라비아해를 지나 인도남부에 도달한 다음, 동남아 말라카해협을 통과한 후 중국 남부로, 그리고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이어진다. 육지의 실크로드 남쪽에 있는 바닷길이라 해서 ‘남해로Southern Sea Road’라고도 불리며, 주로 중국의 도자기와 동남아시아·인도의 향료가 서양으로 운반되던 길이라 해서 ‘도자기의 길’, 또는 ‘향료의 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바닷길은 육지의 실크로드보다 상대적으로 후대인 8~9세기에 부각되어 이용도가 높아졌다. 그 이유는 아바스조의 이슬람제국이 전성기를 맞이해 해상무역을 적극 권장하여 아랍상인들이 해상무역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당唐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끼치는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둔황敦煌 등 실크로드의 주요지역을 상실한 점과 당대 이래로 발달한 조선술과 항해술로 인해 대량수송에 유리한 바닷길이 선택되었다.
해상실크로드의 구간은 크게 ①지중해에서 인도까지의 구간, ②인도에서 동남아시아까지의 구간, ③동남아시아에서 중국까지의 구간, ④중국에서 일본까지의 구간 등으로 나뉜다. 이 네 개 전 구간을 어느 한 종족이 모두 담당한 것이 아니라 각 구간에는 주도세력이 있어 이들이 각 구간에서 무역을 장악했다.
지중해↔인도 구간은 인도인이나 페르시아인이 무역을 독점했다. 이들은 연안해로를 따라 무역을 독점하면서 그리스와 로마 귀족층에 향료·비단·진주 등을 공급하였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동방무역의 전진기지로써 번성하였다. 중세 들어 홍해에서 아라비아해를 횡단해 곧바로 인도남부로 가는 원양항해가 등장하였다. 이는 계절풍을 이용해 가능한 항해였다.
인도↔동남아시아 구간은 인도 상인들의 차지였으며 이들은 이 길을 통해 황금과 향료, 갖가지 보석을 서방과 동방으로 이동시켰다. 인도 상인들의 이동과 함께 언어, 문자, 불교문화가 전파되었다. 이 구간의 무역 중심지는 인도 남부의 캘리컷과 스리랑카의 콜롬보였다. 스리랑카는 동남아시아에서 중동 쪽으로 가는 해상실크로드상의 기항지로써 번성했다.
동남아시아↔중국 남동해안 구간은 중국 상인들의 독점 아래 있었다. 당시 광주廣州·천주泉州 등이 남방무역의 본거지로써 번창했는데 광주에서 서쪽으로는 연안을 따라 베트남, 동남아시아에 이르고 동남쪽으로는 필리핀, 보루네오까지 무역을 했다. 이 해로를 따라 진주·상아·산호·보석 등이 중국으로 들어오고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가 수출되었다.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는 중국과 인도 쪽의 중계무역항으로 역시 해상실크로드상의 주요 요충지였다. 말라카를 중심으로 한 말레이시아 해역에는 6,000여개가 넘는 난파선이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확인 된 것만도 50개가 넘는다.
중국 남동해안↔일본 구간에서는 중국과 한국 상인들이 주로 활약했으며 그것의 가장 상징적인 사실이 9세기 장보고 선단의 활약과 신안해저에서 발굴한 14세기 중국 무역선이다. 당시 이 구간 주요항구로는 중국의 천주·명주慶元, 한국의 흑산도·벽란도, 일본의 하카다 등이 유명했다. 중국의 남부항구를 통해 보석, 자단목, 후추 등 서역과 동남아시아의 특산품과 중국의 도자기가 한국과 일본에 전해졌다.
동북아시아 해로
고대로부터 중국과 한국,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동북아시아 해로가 개통되어 서로간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삼국시대 이후에는 중국, 동남아시아, 아랍국가와도 직간접적으로 교역을 하였다.
동북아시아 해로는 크게 북방해로와 남방해로로 나뉜다. 북방해로는 중국의 북동부 해안과 한반도 서북부해안을 따라가는 연안해로로 기원전 3세기부터 이용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 동해안에서 발해만을 지나 압록강 어귀, 서남해안에 이르고 다시 남해안으로 연결되며 일본열도까지 이어진다.
남방해로는 우리나라 옹진반도 부근에서 황해를 횡단하여 산동반도에 이르는 길(황해횡단로)과 우리나라 서남해안에서 흑산도를 거쳐 중국의 절강성으로 비스듬히 횡단하는 길(동중국해사단로) 등 두가지가 있다. 동중국사단로는 우리나라 서남해안에서 나누어져 남해안, 일본 코스로 이어진다.
남방해로는 8세기에 접어들어 점점 다양해지고 활성화 되어진다. 중국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상실되면서 해상실크로드가 동서문화의 교통로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배경아래 송·원대에 한국과 중국, 일본은 동북아시아 해로인 남방해로를 통해 인적, 물적 교류를 활발히 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동북아시아 해로는 유럽까지 연결되는 광범위한 세계 교역로인 해상실크로드의 일부분으로서 편입되어 갔다.
신라유적에서 보이는 유리잔과 유리병, 구슬, 괘릉의 무인석상, 황금장식 보검 등은 서역계통의 유물들이다. 신라 승려 혜초는 723년 중국의 광주에서 뱃길로 인도로 건너가 인도와 서역 각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이란 여행기를 썼다. 9세기 신라의 장보고는 중국과 한국, 일본을 잇는 동북아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해 해상무역을 독점했다. 또한 일본 나라의 정창원에는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유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9세기 이후 아랍문헌에는 신라와 아랍제국간의 교역에 대한 기록이 많다.
한국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한 일본으로 가던 원대의 무역선(신안선)도 중국 동남해안에서 한국,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로를 타려던 배였다. 도자기·동전·자단목·후추·약초·금속생활품·문방구 등 수많은 무역품을 싣고 가다 우리나라 해상에서 침몰한 것이다.
이들 유물들과 기록들은 동북아시아 지역이 기존의 중국과 한국의 해로를 통해 최소한 8세기부터는 세계의 교역로인 해상실크로드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맺음말
해상실크로드는 인류문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동서교역로이다. 많은 문화와 물자가 이동하고 지구 저쪽과 이쪽에 있는 사람끼리 만남의 장을 열기도 한 길이었다. 이 바닷길에는 수많은 선박이 오고갔으며 많은 항·포구 등 도시가 발달하였다. 또한 교역도시에는 세계 각 지역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내며 번창했다.
해상실크로드 왕래 선박들 중에서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태풍이나 암초를 만나 침몰한 배가 많다. 유네스코의 한 보고서는 전 세계적으로 약 300백만 척의 난파선이 바다에 가라앉아 있다고 추정한다. 이들은 당시의 사회상과 문화상에 대한 정보를 그대로 안고 잠들어 있는 타임캡슐과도 같고 역사·문화의 창고이기도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서해안의 충남 태안 해역에서 수 천점의 고려청자를 실은 난파선이 발견되었다. 2005년 전북 군산 십이동파도 해역에서 발굴한 고려시대 청자운반선에 이어 두 번째이다. 앞으로 체계적인 수중발굴을 통해 선박과 유물을 인양할 것이지만 현재 확인된 것 만해도 엄청난 양이 될 것 같다. 당시의 조선기술, 도자기기술, 미술사, 생활사 등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보물이 곧 쏟아져 나올 예정이다.
이들 난파선의 발견지점은 위에서 언급한 해상실크로드의 일부인 고대 북방항로상의 서해 연안해로 상에 위치해 있다. 고려시대 전남 서남해안에서 서해안을 따라 개경에 이르는 길에는 수많은 연안선과 국제무역선이 오갔는데 앞으로 많은 연안선 뿐 만 아니라 신안해저 발굴 선박과 같은 무역선도 발견되리라 예상해 본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대 서해연안항로는 그야말로 보물창고라 할만하다.
해저유물 발굴 현장 들여다보기
자료협조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정리 본지편집부
지난 5월 충남 태안군 근흥면 대섬 일대에서 주꾸미 어로작업을 하던 어부에 의해 청자그릇이 들어 올려졌다. 이를 태안군에 신고함에 따라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관장 성낙준)은 ‘충남 태안군 근흥면 대섬 인근해역’의 수중문화재 긴급탐사를 실시했다. 신고지역에 대한 긴급탐사 결과, 청자대접 등 30여점의 도자기가 신고지점 주변에 매장된 상태를 확인하였다. 우선 청자대접 3점, 청자접시 5점, 청자유병 1점 총 9점이 수습됐다. 수습된 유물은 같은 기종이라도 문양과 번조방법에서 다소 차이가 확인되나 모두 12세기경의 청자로 보인다.
예로부터 충남 태안군 근흥면 일대 해안은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연려실기술 등의 문헌 기록에서 난행량難行梁이 전해지며, 조류의 흐름이 빨라 선박침몰 사고가 빈번해 운하의 굴착掘鑿을 시도한 기록이 있다. [고려사 권제16 세가 인종12년(1134년) 7월, 조선왕조실록 태종 12년(1412년) 11월]에 따르면 조사 지역에는 이미 확인된 매장 유물수습과 함께 침몰한 고선박의 존재 가능성이 있다.[사진 1.2.3.4.5]
그리드 설치
긴급탐사 지역을 중심으로 그리드를 설치한 후 물분사기(Water Jet, 물을 이용하여 수중갯벌을 제거)를 이용한 제토를 실시하여 갯벌에 노출된 유물의 매장상태 기록, 실측 및 촬영 후 수습하는 체계적인 발굴이 실시됐다. 이 조사는 서남해안의 해상 항로를 확인하고, 고려청자의 생산과 운송, 질적 차이 등 사회상과 문화상 조명의 새로운 자료를 확보하는 중요 근거가 될 수 있다.[사진 6.7]
고려청자를 다량 실은 운반선 발견
긴급탐사 지역 수중발굴조사를 실시하던 중 고려청자를 다량으로 적재한 선박을 발견하였다. 유물은 긴급탐사를 실시한 대섬 남서방향에 넓게 산포되어 있었으며,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청자 운반선을 확인하는 성과를 얻은 것이다. 청자 운반선은 동서방향으로 침몰되어 있었다(추정 규모 : 동서 7.7m, 남북 7.3m). 확인된 선체는 외판(폭 40cm, 두께 6cm)·멍에형 가룡 부속구·저판추정 목재일부와 가공하지 않은 원통목·석제닻장으로 확인되었다. 선박에 적재된 유물은 종·횡으로 중첩된 상태이며, 교란층도 일부 있다. 적재유물은 대접과 접시가 주종을 이루고, 과형주자, 항缸, 발鉢, 단지 등 이전 수중발굴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다양한 기종들이 보였다. 적재상태는 청자 사이에서 쐐기목재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조사한 군산 십이동파도와 동일한 적재방법으로 완충재짚와 받침 쐐기목재를 이용하여 끈으로 묶어 포장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과형주자를 항缸 속에 볏짚으로 완충하여 적재한 유물을 통해 기형에 따라 포장방법을 다르게 하였음이 확인됐다.[사진 8.9.10]
12세기 중반 강진 청자유물 540점 발굴
탐사단은 노출된 선체와 유물을 촬영하고, 청자완 등 540여 점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발굴된 청자는 다양한 기종·문양·유색釉色·번조방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굽이나 번조받침의 형식이 유사하여 동일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노출로 인해 표면에 이물질이 붙어 있으나, 유약의 시유상태가 매우 양호한 고급품이다. 기종은 과형주자瓜形注子, 항缸, 발鉢, 단지, 대접, 접시, 완, 잡유호, 받침대 등 다양하다. 문양은 앵무문, 모란당초문, 철화문, 화엽문, 연판문, 어문 등 다양하며, 내화토비짐이나 규석을 이용하여 개별번조하거나 포개서 번조하였다. 상감청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를 종합하면 이 청자들의 제작 시기는 12세기 중반 강진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기종과 기형이 다양하고 문양, 유약, 태토, 번조기법 등이 우수하여, 강진에서 생산하여 왕실이나 귀족층을 소비자로 하는 개경을 향해 항해하던 중 침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생산지 강진에서 출발하여 북상하던 중 이곳에서 침몰된 것이다.[사진 11.12.13]
고려청자 생산유통 및 전통조선기술 발달사 연구자료 활용
이번 조사기간 동안에는 주변외곽 유물수습, 유물집중 매장처, 매장상태 및 선박규모를 파악하여, 이후 종합적인 발굴조사의 기초자료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번 발굴결과는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따라서 문화재청 및 관계기관(국립문화재연구소, 충청남도 태안군)과 협의하여 본격적인 추가발굴조사를 추진하게 될 것이다. 발굴 현장은 현재 불법인양을 방지하기 위해 대섬 인근 해역에 대한 중요문화재(사적) 가지정(2007. 6. 7~12. 6)과 함께 태안해양경찰서, 태안군청, 해안 경계부대, 국방과학연구소 등에 현장보호를 위한 감시·경계 조치가 취해져 있는 상황이다.
향후 본격적인 수중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최근에 발굴한 군산 비안도(2002~2003), 십이동파도(2003~2004), 야미도(2006) 등의 유물과 함께 고려청자의 생산과 유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연구자료로 제공 될 것이며, 전통한선의 조선기술 및 발달사 연구에도 새로운 중요자료로 추가하게 될 것이 기대된다.[사진 14.15]
< 더 많은 자료를 보시려면 월간도예 2007년 9월호를 참조바랍니다. >